흑마법사 행보관되다 46화
제11장. 짧은 휴식(4)
마나의 기운이 감지되자마자 필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아니, 급해졌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아…… 그, 그러세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운전대를 잡고서 차량을 출발시킬 기세였던 필두였으나, 이제 와서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긴 것 마냥 빠르게 차 밖으로 나섰다.
그의 빠른 걸음을 지켜보던 혜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참으셨나 보네.”
혜정은 필두가 정말로 화장실에 볼일이 있어 저리 급하게 서두르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나 필두가 바삐 움직이는 건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위층이군!’
마나의 흐름을 감지한 필두가 좀 더 속도를 냈다.
5~6층 높이에서 유독 마나의 흐름이 빠름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이동 마법으로 순식간에 해당 층수로 도달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리는 꼴과 다름이 없었다.
아직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자신의 실력을 미리 드러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숨겨야 한다.
필두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감추는 게 좋다.
일반인 연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순간이동 마법보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또 그 지옥 같은 인파를 뚫어야 하는가.’
그러나 필두의 예상과는 달리 아까처럼 많은 인원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는 않았다.
필두나 혜정처럼 이미 전시회를 다 둘러보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손쉽게 5층에 도착한 필두.
내리자마자 마나 사용의 흔적을 추적했다.
“…….”
그의 발걸음이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이 세계에서 필두 말고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추격대인가?’
그 가능성도 충분히 열어볼 만하다. 차원이동 마법은 레디너스 대륙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마법 중 하나.
다시 말하자면, 억지로 못하게 할 뿐이지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마법이기도 하다.
만약 추격대가 어떻게 해서든 희대의 악인, 필두를 잡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해 금기시된 차원이동 마법까지 활용했다면…….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겠군.’
침을 꿀꺽 삼키는 필두였다.
아군보다 적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벌써 긴장할 필요는 없다. 이곳은 나의 홈그라운드. 녀석들이 막 차원이동을 해왔다 하더라도 이 세계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려. 그 빈틈을 노리면 된다!’
레디너스에 비해서 이곳 세계는 마나의 질도, 그리고 양도 다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필두 또한 새벽 아침마다 눈을 떠 최소 30분 이상 마나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 과정을 반복했다.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는 드리무어였지만, 그전에는 천재 마법사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마법 길드에서도 유망주라 불리며 재능의 꽃을 피운 드리무어조차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마나를 운용하기 위해 몇 달간의 집중적인 수련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론을 적용한다면, 추격대가 설사 방금 이곳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드리무어를 상대로 손쉬운 전투를 펼칠 수는 없을 터.
이점을 살려 녀석들을 제압하면 그만이다.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군!’
전투를 앞뒀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긴장과 두근거림이 필두를 자극했다.
싸움이라면 그 역시 한가락하는 흑마법사다. 상대가 추격대라도 지레 겁먹거나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천천히 마나의 흔적을 추적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강렬해지는 마나 사용의 흔적.
그러나…….
‘여기서부터 끊겨 있어.’
5층 중간 복도까지 도달했을 때, 필두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인위적으로 마나를 조작했다는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하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 소용돌이쳤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필두가 서 있는 이곳이 누군가가 마법을 사용한 현장이라는 뜻이다.
‘도망쳤나?’
최대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추적망을 넓혀봤지만, 더 이상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놓친 것이다.
‘조금만 더 빠릿빠릿하게 행동했더라면,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추격대가 정말로 이곳에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에 우연히 겹쳐 마나의 흐름이 역행해서 발생한 초자연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방법이 없어졌다.
뭔가 뒤가 찝찝하다.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사건 탓에 필두의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었다.
‘내일 출근하면 애들이나 굴려야겠군.’
졸지에 필두의 스트레스 풀이 대상이 되어버린 병사들만 불쌍하게 되어버렸다.
속으로 연신 혀를 차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시 이동하는 필두.
그때, 누군가가 필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
삽시간에 굳어지는 표정.
마법을 사용한 누군가가 일부러 인기척을 지우고 필두를 유인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도달하자,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에 마나 덩어리를 생성시켰다.
하나 머지않아 이러한 경계심은 필두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행보관님 아닙니까. 이곳에는 어인 일로?”
9090대대 제1포대 대대장이 사복 차림으로 필두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삼킨 필두가 곧장 거수경례를 시전했다.
“충성. 지인하고 위층에서 열린 만화 전시회를 보기 위해 잠시 들렸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7층에서 그런 행사가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 필두의 시선이 대대장의 곁에 나란히 서 있는 자들에게 고정되었다.
한 명은 대대장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 그리고 남은 두 명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듯한 어린아이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이들과 대대장의 관계가 어떤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족인가.’
필두에게 있어서 민감한 사항 중 하나였다.
그러는 동안, 대대장의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분이에요?”
“우리 부대 제1포대 행보관.”
“어머? 그 일 잘하신다는 행보관님이셨네요! 반가워요! 보고 싶었어요.”
여성이 친근함을 표하며 먼저 필두에게 다가왔다.
일순간 당황한 필두였으나, 이내 그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강필두라고 합니다.”
“남편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남편이 행보관 칭찬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자자, 너희도 인사하렴.”
대대장의 아내가 아이들에게 인사를 강요했다.
낯선 이와의 조우에 자못 놀란 아이들이었으나, 그래도 집안 교육이 잘되어 있는 모양인지 곧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애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주는 필두.
그럴 때마다 오묘한 기분을 삼켜야 했다.
그런 필두의 모습을 보던 대대장이 다른 쪽으로 오해를 한 모양인지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행보관님도 이제 슬슬 장가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생각 없습니다. 우선은 부대가 안정화되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하하! 믿음직스러운 말이군요.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필두의 이런 말 때문일까. 대대장으로선 뿌듯함과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9090대대에 필두 같은 사람만 있다면, 대대장으로서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그럼 내일 부대에서 뵙겠습니다.”
“행보관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요.”
“예. 충성!”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거수경례를 잊지 않는다.
사적인 만남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군인 아니겠는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 때마침 차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혜정이 필두를 반겼다.
“아, 필두 씨! 속은 좀 어때요? 괜찮나요?”
“네, 괜찮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혜정은 아직도 필두가 화장실에 급한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줄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필두는 악인이라 불리던 남자였으니까.
하나 아까 느껴진 격렬한 마나의 움직임은 매우 신경 쓰였다.
‘내 착각인가…….’
여전히 그 원인은 밝힐 수 없지만, 그래도 꽤 신경에 거슬릴 만한 일이 생겨버렸다.
* * *
월요일 오전.
다른 간부들보다도 훨씬 더 이른 출근을 서두른 필두의 눈빛이 매서웠다.
막사의 상태가 영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이…….”
포대전술훈련을 무사히 잘 받았다고 너무 오냐오냐했더니, 금세 헤벌레 풀어져 버린 것이다.
위생 상태도 그렇고 기강이 해이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포착되었다.
“내가 한동안 소리를 안 치니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 다 되었군.”
제1포대 내에선 사실 필두 말고 군기 잡는 간부는 기껏해야 통제관밖에 없다.
통제관도 빡세게 군기를 잡는다거나 하는 편까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기강을 잡는 선까지만 하므로 제1포대 병사들은 간부를 무서워하기보다는 도리어 친구 같은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었다.
물론 병사 친화 정책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바로 강필두였다.
하나 그건 사고가 나기 전의 강필두일 뿐, 드리무어의 영혼이 자리 잡은 강필두는 오히려 병사들을 괴롭히는 데에 모든 전력을 쏟는 악인 중에서도 악인이다.
하필이면 제1포대 병사들은 오늘, 그 악인에게 제대로 찍히게 된 것이다.
“무엇을 시킬까. 대청소? 벌목작업? 선택할 게 너무나도 많군.”
하나같이 전부 다 심신이 지치는 그런 작업들뿐이다.
막사 계단을 오르면서 오늘 해야 할 작업 부류를 선정하는 와중에 누군가가 필두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충성!”
하나포 반장이었다.
이번 주 오대기 소대장을 맡고 있었기에 그는 현재 막사에서 병사들과 함께 동숙을 진행하고 있었다.
“충성. 무슨 일이냐.”
“포대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포대장님이? 출근하셨던가.”
“네. 30분 전에 이미 오셨습니다.”
“흠, 그런가.”
필두가 가장 먼저 출근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보다 이른 시간부터 필두를 찾다니. 급한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어디 계시냐.”
“포대장실에 계십니다.”
“알았다. 그리고 당직한테 말해서 9시 20분에 병력들, 사열대 앞으로 집합시켜둬라. 작업 분류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하나포 반장에게 대신 말을 전해둔 뒤 포대장실로 향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자, 포대장이 굳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앉으시죠.”
그의 말에 따라 소파에 앉은 필두가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물었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실은…….”
포대장이 잠시 말끝을 흐렸다.
이윽고 무거운 한숨과 함께 나쁜 소식의 정체를 들려줬다.
“사단에서…… 내무 부조리 관련으로 검열 나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