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45화 (45/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45화

제11장. 짧은 휴식(3)

부천시청역 근처에 차를 세운 필두.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복잡하다’였다.

‘주차 공간 찾기도 쉽지 않군.’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유료주차장 타워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한 뒤, 곧장 차를 주차했다.

하차 이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혜정이 스마트폰을 매만지며 지도 어플을 실행시켰다.

“이쪽이에요.”

여기서부터는 혜정의 시간이다.

만화 전시회가 언제, 어디에 열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그렇기에 필두는 군말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대략 10여 분의 시간을 소요한 뒤에 도착한 어느 빌딩 앞.

“이곳에서 열린다고 해요.”

“그렇군요.”

혜정의 말대로 빌딩 입구에 ‘만화 전시회 입구’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팻말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화살표를 따라 도착한 곳은 빌딩의 엘리베이터.

여기에도 만화 전시회 안내 팻말이 보였다.

다만, 입구에 서 있던 것과는 다르게 만화 전시회에 대한 정보가 좀 더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7층에서 하는군요.”

“네. 아, 이거 타면 될 거 같아요.”

혜정이 어느 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필두.

하나 만화 전시회 때문일까. 엘리베이터 안에는 꽤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옆으로 좀…….”

“여기서 내릴게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 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했다.

층수를 나타내는 표시 옆에는 이미 ‘만원’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린 탓에 필두와 혜정 역시 구석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짧게 혀를 찬 필두가 혜정을 구석에 두고 주변으로부터 보호하듯 자세를 취했다.

순간적으로 필두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게 된 혜정. 그녀의 표정이 붉게 달아올랐다.

“…….”

말없이 고개를 아래쪽으로 떨구는 그녀의 모습에 필두 또한 속으로 침을 삼켰다.

달콤한 샴푸 향기.

게다가 연약한 모습이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위험하군.’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처럼 목숨을 위협받는다든지 하는 그런 차원의 위험함이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뜻했다.

물론 필두 정도면 충분한 자제력을 지닌 남자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속내를 내비칠 정도라면, 그만큼 민혜정이라는 여자가 매력적인 여성임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기야. 레디너스 대륙의 3대 미인들과 견주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일 수준의 아름다움을 보유하고 있는데, 어찌 남자로서 설레지 않겠는가.

필두가 속으로 혜정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그녀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상당한 근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덕분에 평소에 잘 신경 안 쓰던 것까지 묘하게 신경 쓰였다.

혹여나 머리에 자그마한 비듬 같은 게 묻어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최근에 살짝 보이기 시작한 여드름이 발각되지는 않을까? 오늘 바른 립스틱 색은 과연 필두의 취향에 맞는 색일까?

온갖 걱정거리가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자와 사귀지 못했던 숫처녀답게 적지 않은 당혹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7층입니다.

층수를 안내하는 목소리와 동시에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동시에 사람들이 우르르 7층에서 내렸다.

이 많은 사람들 역시 필두와 혜정처럼 오늘 열리는 만화 전시회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드, 드디어…….”

이제야 겨우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된 혜정이 안도의 말을 꺼냈다.

필두 또한 마찬가지로 답답함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지옥에서 벗어난 두 남녀가 다시금 천천히 걸음을 뗐다.

7층 전부가 만화 전시회로 활용되고 있었기에 이후 혜정의 길 안내가 따로 필요하진 않았다.

“이쪽이에요, 필두 씨!”

보고 싶었던 코너가 있었던 모양인지 필두에게 손을 흔드는 헤정.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유독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혜정의 부름에 따라 장소를 이동한 필두의 시선에 꽤 범상치 않은 그림들이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 작가님의 그림이에요. 웹툰 연재도 겸하고 계시는데, 그림 하나하나에 정성이 느껴지더라고요. 게다가 잘 그리기도 하시고요.”

“그렇군요. 혜정 씨 말대로 한 장 한 장마다 그림에 의미가 담겨 있는 거 같습니다.”

빈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레디너스 대륙에도 화가라는 부류의 직업이 있다. 거기에서 좀 더 상세한 부류로 나뉜다면, 오늘날의 만화라 불리는 그림들을 그리는 자들도 레디너스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문화가 발달된 국가는 그들이 하는 일도 전문직으로 취급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립군…….’

눈앞에 펼쳐진 그림들과 레디너스 대륙은 전혀 접점이 없다.

그럼에도 필두는 알 수 없는 향수를 느꼈다.

그만큼 레디너스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커서 그런 것일까.

지금의 삶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이곳에는 필두를 두려워하는 자들도, 그리고 필두를 죽이려 하는 자들도 존재하지 않다. 그렇기에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와 달리 숨어다닐 필요도 없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는 기쁨이 이 세계에는 존재했다.

하나 그렇다고 평화로운 삶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흑마법사. 악인 중에서도 악인이라 불리는 드리무어다.

악인이면 악인답게 레디너스 대륙에게 다시 한번 공포라는 이름의 재앙을 선사해야 한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혜정이 그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다음에는 저거 봐요.”

“……네, 그러죠.”

드리무어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혜정이 순수한 미소와 함께 좀 더 자신에게 어울려달라는 식으로 다가왔다.

평화 그 자체의 모습.

하나…….

‘이런 것도 나쁘진 않군.’

악인도 때로는 쉬어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다.

* * *

한 층을 통째로 전시회에 할애하고 있다 하더라도 건물 크기 자체가 엄청 크거나 하지 않았기에 2시간 이내에 충분히 다 돌아볼 수 있었다.

양손 가득 전리품들을 챙긴 혜정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 혜정을 바라보며 필두 역시 옅은 미소를 선보였다.

사실 필두는 그렇게까지 구미가 당기는 물품이 없었다. 그래서 헤정에 비해 그리 많은 물품을 구매하거나 하진 않았다.

철저하게 기념품이 될 만한 것들만 샀다.

반면, 그녀의 소비욕은 오늘 정점을 찍은 모양인지 상한선 없이 그대로 수직 상승세를 보였다.

필두의 차 뒷좌석에 짐들을 내려놓은 이후, 혜정의 표정이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엄마한테 또 혼나겠어요, 충동구매했다고…….”

“헤정 씨 돈으로 산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30살 되고 나서부터는 돈 좀 모아두라고 잔소리를 많이 하시기 시작했거든요. 시집갈 때 혼수 마련해야 한다나 어쨌다나…….”

“하하, 그렇군요.”

“그, 그래도 착실히 돈 모으고 있어요! 저, 그렇게 헤픈 여자 아니니까요!”

“네, 알고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혜정의 반응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이러니 목사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도 아직 혜정을 아이 보듯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부모 마음이야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 부모의 시선에서 본다면 애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부모라는 존재다.

“…….”

순간 필두의 표정이 굳었다.

부모.

가족.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전부 한순간에 잃어버린 남자.

그것이 바로…… 드리무어다.

그날 이후. 그는 악인이 되기로 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다 앗아간 빌어먹을 세상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는 천재 흑마법사, 드리무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그 마음가짐은 지금도 변치 않고 있다.

순간 어두워진 그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던 혜정이 살짝 겁먹은 듯 물었다.

“저기…… 필두 씨? 어디 아픈 곳이라도…….”

“아, 아닙니다.”

적지 않게 당황한 필두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두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기 중 하나가 바로 포커페이스다.

겉으로 속마음을 표출하지 않는 능력.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펼치는 철저한 연기 실력이 그의 장기 중 하나인데, 조금 전의 필두는 달랐다.

가족에 관한 것들만 떠오르면 그는 이성을 잃는다.

조금 전도 마찬가지.

‘오늘따라 나답지 않군.’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필두가 다시 표정을 되돌렸다.

“괜찮습니다. 잠시 훈련 생각 좀 해서 그런 겁니다.”

“훈련이 또 있나요?”

“예. 얼마 뒤에 행군 훈련이 있습니다. 42㎞에다가 야간 행군이라서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게 많더라고요.”

“아하, 그런가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방금 필두 씨 표정, 너무 안 좋아 보였으니까요. 만병의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하잖아요? 힘든 일이 있을수록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해요. 그러면 훨씬 편해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혜정 씨.”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간다.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필두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악인으로서의 행보를 계속 이어나가지 않는 이상, 드리무어라는 정체성 자체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필두는 악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슬슬 가죠. 차 밀리기 전에요.”

“네!”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인 혜정이 익숙한 걸음으로 운전석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후의 일정은 간단하다. 저녁 식사 후에 영화 관람을 끝으로 오늘의 데이트 일정을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정석적인 데이트 코스였다.

혜정도 애초에 필두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한 건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그와 같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크나큰 축복이었다.

“식사는 뭐로 할까요.”

“글쎄요.”

곧장 대답이 없는 그녀를 대신해 필두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좋은 것을 보여주셨으니,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정말요?”

“네.”

“고마워요, 필두 씨.”

먼저 혜정에게 의견을 구했다.

특별히 생각나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하는 그녀.

하나 그 순간, 필두의 모든 행동이 정지했다.

“……!”

삽시간에 구겨지는 그의 표정.

느껴지지 말아야 할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감지되는 마나의 파동.

‘어째서……?’

제아무리 필두라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당혹감을 감출 방법이 없었다.

물론 마나의 존재 자체는 예전부터 충분히 감지되고 있었다.

하나 그 마나를 인위적으로 운영한다는 것 자체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었다.

필두가 알던 평상시 마나의 흐름이 아니다.

이건…….

‘누군가가 마법을 썼다는 증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