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35화
제9장. 이동준비(6)
3993 진지로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곳곳에 메아리쳤다.
한편, 본대와 함께 진지로 복귀한 검은 새 한 마리가 병사들 몰래 필두에게 다가왔다.
새를 지그시 바라보던 필두가 오른손을 뻗자, 마치 검은 새가 빨려 들어가듯 그의 손바닥으로 모습을 감췄다.
동시에 다시 팔을 내리려는 순간, CP 텐트 설치에 여념이 없던 장진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행보관님. 갑자기 왜 팔을…….”
“신경 꺼라. 그보다 배식 차가 5시 반쯤에 이곳으로 도착한다고 하니까 10분 전에 행정분과 애들 CP텐트 앞으로 집합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난로 설치하는 것도 잊지 말고. 컵라면하고 음료수, 건빵은 어디다 뒀냐.”
“아직 차량에 적재되어 있습니다. CP 텐트 설치하면 애들이랑 같이 바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잘 부탁하마.”
“예! 맡겨만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장진화가 몇 분 전, 필두에게 체력이 없다느니 뭐니 하는 잔소리를 듣긴 했어도 행정분과 분대장으로서 제법 싹싹하다는 평을 받아오는 병사이기도 하다.
간부들 사이에서도 제법 이미지가 좋은 병사이기에 장진화라면 믿고 맡길 만했다.
물론 필두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드리무어였던 시절, 그때 그의 밑에는 유능한 마법사들이 즐비해 있었다.
하나같이 전부 다 실력 있는 천재 마법사들.
그리고 세상에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드리무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에게 일을 맡기면, 구태여 필두가 신경 쓸 여지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잘 해내는 모습만 보여줬다.
하나 지금은 누구 하나 필두의 곁에 남아 있지 않다.
오로지 나 홀로 겨우 살아남게 된 필두.
“…….”
철천지원수 같은 마일더의 뒤를 이어 그리운 자신의 제자들의 얼굴마저 떠오른 탓일까.
필두가 자신도 모르게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 * *
필두가 레디너스 대륙에 있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 전포반은 말 그대로 훈련과의 전쟁을 펼치는 중이었다.
측각수와 방열방위각을 다시금 확인하던 소진언이 포 뒤에서 훈련 물자들을 챙기는 후임병들에게 다급히 외쳤다.
“3번, 4번 포수! 와서 자키부터 띄워라! 편사각 장입부터 해놓는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김조항의 부름에 전도혁과 그의 동기이기도 한 정성태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빠르게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자키를 띄우는 건 견인곡사포 포병이라면 한 번은 거쳐야 할 중노동이다.
쇠봉을 잡고서 좌, 그리고 우. 이것을 계속 번갈아 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자키를 띄울 때까지 그저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들만이 하는 오해에 불과하다.
실제로 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가신 발톱을 보이지 않게끔 묻기 위해 땅을 파는 일보다도 더 힘이 드는 과정이다.
물론 땅을 까는 것에 비한다면 시간도 훨씬 짧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체력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깨달을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키 띄우기다.
자키봉을 가져와 꽂은 전도혁과 정성태.
두 사람이 서로 눈빛 교환을 마쳤다.
이윽고 정성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삼!”
포병식 숫자 세기로 자키 띄우기의 포문을 연 두 사람.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하므로 호흡도 잘 맞아야 한다.
안쪽으로 끌어당기고, 바깥쪽으로 밀고.
좌, 우. 번갈아가며 자키봉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하는 전도혁과 정성태.
이등병 때부터 자키 호흡을 맞춰와서 그런지 무난한 팀플레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 바로 그 순간.
“큭……!”
갑자기 정성태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수 자리에 앉아 있던 김조항이 급격하게 시선을 돌렸다.
“정성태! 너, 왜 그러냐. 어디 다쳤어?”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얌마,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잖아!”
워낙 정황이 없던 탓에 정성태의 몸 상태를 제대로 체크하지 못했던 김조항이 사수 자리를 벗어나 자키 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김조항의 수상쩍은 움직임에 소진언도 급격하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뭐야. 왜 그래?”
“성태 녀석, 상태가 이상합니다.”
“성태가? ……야, 너 땀을 왜 이렇게 많이 흘려!”
“그, 그게…….”
본인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아무리 봐도 뭔가 수상쩍어 보였다.
괜히 짬을 먹은 게 아니다. 척 보면 척 아니겠는가. 정성태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눈치챈 소진언이 손짓했다.
“정성태.”
“일병 정성태!”
“너, 일로 와 봐라.”
“괘, 괜찮습…….”
“두말하게 하지 마라.”
“…….”
소진언이 비록 50일 뒤에 전역할 말년병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포대 왕고로서 아직 그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고집을 꺾고서 소진언 앞에 마주 서는 정성태.
그의 전신을 쭉 훑어보던 소진언이 손을 뻗어 정성태의 오른쪽 팔꿈치를 매만졌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역시 그랬구먼.”
오른팔의 움직임이 뭔가 부자연스럽다 싶었더니, 소진언의 예상대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어쩌다가 그랬냐.”
“괘, 괜찮습니다! 충분히 할 만합니다!”
“이 자식아.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괜히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
소진언이 이렇게까지 폭언을 할 정도면, 상당히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뜻한다.
평소의 소진언은 가벼워 보이고 농담을 일삼는 그런 이미지로 각인이 많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방금 내뱉은 이 말은, 소진언이라는 인물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꽤 강경한 축에 속했다.
“아까 훈련 물자 적재할 때…… 살짝 부딪친 거 같습니다.”
“전투복 걷어봐라.”
“……예.”
힘없는 목소리와 함께 야전상의를 벗은 정성태가 전투복 상의를 걷어 올려 자신의 오른쪽 팔꿈치를 보여줬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절로 탄식이 튀어나왔다.
“이런……!”
“생각보다 심각한데…….”
계속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정성태 때문에 정말 벌 겨 아닌 부상인 걸까 하는 생각도 해봤었다.
하나 상처를 직접 눈으로 본 순간, 그 생각은 헛된 희망에 입각한 오해였음을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잔뜩 부어오른 오른쪽 팔꿈치.
한눈에 봐도 적지 않은 통증을 야기시킬 것만 같은 심각한 부상이었다.
“조항아.”
“상병 김조항.”
“성태 데리고 행보관님한테 가라. 의무실에 보내야 할 거 같다.”
소진언의 제안. 정성태는 납득이 안 된다는 얼굴을 했지만, 김조항은 그와 생각이 달랐다.
“알겠습니다.”
“김조항 상병님! 저, 정말 괜찮습니다! 이대로 훈련 계속할 자신 있습니다!”
“정성태. 내가 저번 훈련 때에도 말했을 거다. 군대는 다치는 곳 없이 몸 성히 보존해서 나가는 게 장땡이라고. 물론 의욕 넘치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무리하다가 더 큰 병명이라도 얻게 된다면 누가 책임진다고 그러냐.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너보다 네 부모님이, 가족이 더 가슴 아파할 거다.”
“…….”
“네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걸 명심해라.”
“……죄송합니다, 김조항 상병님. 그리고 소진언 병장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선임병들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본인의 자존심 세우겠답시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는 건 민폐에 불과하다.
정성태도 생각이 그리 없는 남자는 아니다.
결국 소진언의 말대로 김조항과 함께 행보관, 강필두에게 가기로 한 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김조항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사수 자리에 올라탄 소진언.
“사수 은퇴해서 두 번 다시 이곳에 앉을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사수를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보다도 더 큰일이 있었다.
바로 자키를 누가 띄우느냐 하는 문제였다.
“어디 보자. 누구를 데려올까.”
가장 믿음직한 정성태가 빠지게 된 건 아쉽지만, 그래도 그의 빈자리는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남은 인력이 누가 있을까 찬찬히 살펴보던 소진언.
그때, 자키봉을 말아쥔 전도혁이 소진언에게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굳이 다른 분대원들 불러올 필요 없습니다, 소진언 병장님.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뭐……?”
물론 자키는 혼자 띄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라는 말뿐. 그 부작용은 이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홀로 자키를 띄운답시고 도전했던 몇몇 호기 넘치는 병사 중에서 과반수 이상은 중도 포기를 했고, 겨우겨우 풀(Full) 자키를 띄우는 데에 성공한 병사도 이삼일 정도는 몸져누울 정도였다.
그만큼 힘든 게 나 홀로 자키하기, 그것도 풀로 띄우기다.
연대장이 온다고 한 만큼 건성으로 자키를 끝내서는 안 된다. 실사격과 비등하게 무조건 풀로 자키를 띄워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부담감이 클 터.
그것을 익히 잘 알고 있음에도 전도혁은 다시금 자신이 혼자서 자키를 띄우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어차피 김조상 상병도, 성태 녀석도 빠진 마당에 자키 작업에 병력을 둘이나 붙이게 된다면, 보나 마나 저희 하나포가 방열 꼴찌 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괜찮겠냐. 괜히 그러다가 너까지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강한 자신감을 어필하며 야전상의를 벗어젖히는 전도혁.
추운 날씨임에도 상의 옷 소매까지 걷어 올렸다.
두꺼운 팔뚝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관심병사 코스프레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존재한다.
전도혁. 그만큼 몸 좋고 힘이 세기로 유명한 병사가 없다는 사실을.
사회에 있을 때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꾸준하게 운동을 해왔던 터라 몸에 근육들이 보기 좋게 붙어 있었다.
그라면 나 홀로 자키, 풀로 띄우기도 가능할지 몰랐다.
그리고 전도혁의 이런 행동은 정성태처럼 자존심 하나 지키고자 하는 그런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다.
전도혁에게는 남들한테 알려지지 않은 비밀 지령 하나가 있었다.
S급 병사가 되어라.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남자, 강필두가 직접 내린 미션이다.
‘하나포가 방열 꼴찌로 했다는 말이 행보관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또 무슨 벌을 받을지 몰라!’
자존심 지키기보다 필두에게 눈도장 찍히는 게 싫어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소진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아무튼, 최대한 다치지 않게 주의하면서 해라.”
“예, 알겠습니다.”
자키봉을 잡은 전도혁의 팔에, 그리고 어깨에 붙어 있는 근육들이 불끈불끈 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그동안 관심병사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약한 척을 해왔던 그.
하나 지금의 전도혁은 다르다.
리미트가 해제된 그는 현재, 9090대대 제1포대 최고의 근력과 체력을 자랑하는 병사로 거듭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