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34화
제9장. 이동준비(5)
하나포부터 여섯포, 그리고 사격지휘와 통신분과가 함께 쓸 텐트까지.
병사들이 사용할 텐트는 도합 7개가 필요하다.
수송분과와 행정분과는 각 포반 텐트에 따로 분배되어 잘 예정이기 때문에 이들의 텐트까지 확보할 필요는 없었다.
6개의 텐트에 행보관인 강필두와 포대장이 사용할 CP 텐트까지. 총 8개의 텐트 자리를 확보해둬야 한다.
3993 진지는 9090대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른 포병부대도 와서 사용을 자주 하는 편이다.
그래서 평소 이들이 어느 곳에 텐트 자리를 마련했는지에 대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주일 전에는 K-9 자주포 부대가 이곳 3993 진지에서 1박을 했었다.
그들의 흔적이 아직도 보이는 자리로 향한 필두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번 사용한 자리라 그런지 평탄화 작업이라든지 배수로 등도 아직 그 윤곽을 유지했다.
그중에서도 강필두의 마음에 꼭 드는 건 바로 배수로였다.
때마침 오늘 저녁에는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우 확률 90%. 거의 온다고 봐도 무방한 수치다.
‘재활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텐트 하나 치기에도 많은 체력을 요한다.
그 와중에 기우 대비까지 한답시고 병사들에게 배수로 작업까지 시킨다면, 가뜩이나 없을 체력이 더더욱 바닥까지 떨어질 게 뻔하다.
추운 날씨에는 가급적 많은 체력을 비축해놓는 편이 좋다.
특히나 몸 쓰는 일이 전부다시피 하는 군인들은 더더욱 몸이 재산이다.
병사들의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건 행정보급관으로서 당연한 일.
그런 생각에 입각해 얼마 전, K-9 부대가 사용한 텐트 자리를 재활용하기로 잠정 결정을 내렸다.
“장진화.”
“벼, 병장 장진화! 부르셨습니까?”
필두가 텐트 자리를 물색하는 동안, 장진화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필두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잃어버린 체력을 최대한 회복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의 부름에 허겁지겁 다가온 장진화. 그러자 필두가 손으로 어느 한 쪽 지역을 가리켰다.
“저쪽에 CP 텐트 설치해라. 그리고 오른쪽으로 하나포부터 시작해서 사격지휘, 통신분과 텐트까지 쭉 일렬로 세워서 텐트 설치할 수 있게끔 표식 남겨둬라.”
“예, 알겠습니다!”
CP 텐트를 기준으로 각 분과 텐트 위치까지 설정을 마쳐놓은 필두.
텐트를 지금 당장 세우진 못한다. 무엇보다도 훈련 일정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므로 일찌감치 텐트를 설치한답시고 병력들을 빼돌릴 순 없다.
텐트 설치는 훈련이 끝난 이후. 야간 훈련을 마치고 났을 때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8시는 되어야 가능하다.
결국 해가 저물었을 때 텐트를 쳐야 한다는 뜻이 된다.
병사들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일정이 그렇게 짜여 있음을 원망하는 수밖에.
본대가 3993 진지에 도착을 하게 되면, 대략 오후 3시에서 3시 반 정도가 될 것이다.
배식은 6시부터 시작될 예정이니, 이제 슬슬 취사반과 연락을 취해 식사 준비 현황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전에.
“…….”
장진화가 행정분과 분대원들에게 텐트 설치 자리를 알려주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필두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통제관과 정찰병, 그리고 측각수는 현재 가상의 정찰 임무를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행정분과 인원들도 조금 전, 필두가 하달한 명령에 따라 물자들을 나르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모습을 보였다.
다시 말해서, 필두를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시선이 없다는 뜻이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가볍게 말아쥔 필두.
이윽고 그가 손을 펴자, 손바닥에서 새의 형상을 띈 검은 존재가 작은 날개를 펼쳤다.
흡사 까마귀와도 같아 보였다.
필두가 마나를 응집시켜 일시적으로 만든 소환물이다.
마인드컨트롤이 어렵다 하더라도 오랜만에 본 실력을 발휘한 필두였기에 소중한의 트라우마 걱정은 사실 할 필요도 없었다.
본래는 이동 중인 본대에 별로 관여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또 다른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9090대대 제1포대 포대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행보관인 강필두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분명 자신에게 악영향이 올 터.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소환수를 만들어 감시를 하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속이 편하다.
충신 전도혁이 있긴 하지만, 일병이 보여줄 수 있는 영향력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가서 내 눈이 되어 녀석들을 철저히 감시해라.”
필두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모양인지 검은 새가 힘찬 날개짓을 펼쳤다.
하늘 높이 날아오는 새 한 마리. 감시를 위해 만든 소환수를 날려보낸 뒤, 행정분과가 한창 작업 중인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 포대전술훈련의 핵심은 바로 ‘무사고’다.
제아무리 훈련 잘 받아봤자 사고 한 번 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안전에 유의한다. 하지만 사실, 필두는 이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쟁을 대비한 훈련에 안전 주의라니…… 마일더 녀석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일지 뻔하군.’
드리무어 추격대를 이끌었던 정평난 기사, 마일더.
그리고 자신을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았던 원수 같은 남자.
오랜만에 그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 * *
포대 이동이 시작된 지 15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그때 자리에서 팍 일어나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야! 그 빵, 내가 먹었다!’라고! 파하하하하!”
“그, 그러냐…….”
운전하던 도중, 심심한 모양인지 소중한이 예전에 대학 생활을 할 때 겪었던 경험 중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이야기 내용은 웃기다. 하지만 하나포 반장은 솔직한 심정으로 웃을 수가 없었다.
혹여나 이야기라도 하다가 하나포 포상에 있었을 때처럼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그 생각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중한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필두의 재간으로 현재 그에게는 ‘사고’라는 기억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포 반장님,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거 같은데……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신 건 아닙니까?”
아까부터 소중한 표 베스트 탑 10 안에 들어갈 법한 웃긴 이야기들을 계속 나열하고 있었는데, 하나포 반장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 이런 질문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물음에 하나포 반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다. 그보다 운전, 운전에 신경 써야지. 안 그러냐!”
“그거야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993 진지로 가는 길은 제가 또 전문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 렇다면야 정말 좋겠지만…….”
하나포 반장이 느끼는 불안감과는 다르게 실제로 소중한은 여태까지 포차를 잘 운전해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건 하나포 반장의 착각이 아니리라.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흐른 뒤.
모두가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3993 진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 이들.
본대가 도착함과 동시에 사격지휘 정찰병이 먼저 박스카부터 유도를 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다음 차례는 하나포 포차.
“조심해서 운전해야 한다, 중한아!”
“걱정 붙들어 매시기 바랍니다, 하나포 반장님! 운전하면 또 이 소중한 아니겠습니까! 이름처럼 소중하게 운전하겠습니다!”
“그, 그래 줘라!”
자신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단단히 붙들어 맨 하나포 반장.
단독군장 상태로 뛰어온 하나포 정찰병이 파란색 수기와 붉은색 수기, 두 개를 들고서 하나포 포차를 유도했다.
덜컹, 덜컹, 덜컹!
지면이 고르지 못한 덕분에 포차의 흔들림이 더더욱 거칠어졌다.
평상시에도 그다지 좋지 못한 승차감을 보여주는 군용 차량인데, 지형까지 험하니 롤러코스터 뺨칠 만큼의 스릴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난간을 꽉 잡은 소진언이 병사들에게 외쳤다.
“다들 안 튕겨 나가게 조심해라!”
“예, 알겠습니다!”
위병소 앞 하천 다리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난관이다!
여기서 포차가 옆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 부상을 피하기 힘들 터!
고작해야 훈련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훈련에 임해야 했다.
물론 레디너스 대륙에서 받는 훈련에 비해서는 훨씬 낮은 강도임에 틀림이 없지만 말이다.
엄청난 덜컹거림 속에서 드디어 하나포가 방열을 해야 할 자리가 소중한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저대로 직진이군!”
눈을 반짝이며 운전대를 꽉 잡은 소중한.
그러면서 좀 더 과감함을 내비치듯 엑셀을 밟았다.
아까보다 더한 덜컹거림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못 버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소중한의 운전 스킬, 그리고 과감성이 빛을 본 덕분일까.
다른 분과들에 비해 하나포가 가장 먼저 정차에 성공했다.
“고생했다, 중한아!”
“일병 소중한! 아닙니다!”
하나포 반장이 곧장 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포차 뒤에 탑승해 있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하차! 포 내리고 방열부터 한다, 실시!”
“실시!”
포병의 생명은 빠른 초탄 발사다.
게다가 이들이 다루는 포의 종류는 자주포도 아닌 견인곡사포다. 자주포는 혼자서 드르륵 움직여 포상에 자리를 잡고 정지한 채 편각과 사각만 맞추면 그 자체만으로도 방열이 끝난다.
하나 견인곡사포는 다르다.
포차에서 포를 떼어내고, 가신을 벌린 뒤에 실사격을 위해 가신 발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을 판 뒤에 묻는다.
그리고 포를 발사하는 데에 필요한 물자들을 배치하고, 편각과 사각을 딴다.
이 과정만 하더라도 대략 40분에서 1시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자주포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게 견인곡사포의 현실이다.
155㎜ 견인곡사포. 6. 25전쟁 당시 에이스로 활약하던 무기지만, K-9이 나온 지금 이 시기에는 시대상에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 화력 무기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힘들더라도 부대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155㎜ 견인곡사포가 현역으로 활약하는 동안 포병들도 힘을 내는 수밖에 없다.
“가신 벌린다! 다들 발 조심!”
“발 조심!”
소진언의 말에 복명복창하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포병들.
전도혁 역시 구슬땀을 흘리며 방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하나포를 필두로 둘포, 그리고 삼포와 넷포, 다섯포, 여섯포까지.
도합 여섯 개의 포반들이 제각각 스피드를 올렸다.
누가 먼저 방열을 완벽하게, 그리고 빠르게 끝내느냐. 이것도 은근히 경쟁 요소가 된다.
게다가 이번에는 내기까지 걸려 있다.
“이번에 방열 꼴 찌하는 분과가 PX 쏘기로 했으니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매달려라! 알겠냐!”
“알겠습니다아!”
소진언이 내기를 언급하자 병사들의 사기가 급등했다.
여기서 지면, 훈련이 끝날 당시 어마어마한 돈이 깨진다.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가뜩이나 적기로 소문난 군인 월급 아니겠는가. 그마저도 자신의 먹거리가 아닌 남의 배를 배불리 해주는 데에 사용된다면, 당분간은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이다.
투지를 불태우며 방열 준비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는 병사들.
이들의 요란한 목소리가 3993 진지를 가득 채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