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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행보관되다-19화 (19/175)
  •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9화

    제6장. 훈련 준비(4)

    믿기지가 않은 명령이었다.

    이걸 어떻게 두 사람이서 옮긴단 말인가.

    그래도 전도혁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으니, 고만해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으랏차차차!”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며 짐짝을 들어 올리는 고만해.

    순간 그의 입에서 기합 소리에 뒤를 이어 단발적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X발, X나게 무겁네!”

    때마침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모양인지 필두가 날카로운 일침을 선사했다.

    “욕할 시간 있으면 부지런히 옮겨라.”

    “그, 그래도 행보관님…….”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는 표정을 짓는 고만해의 모습에 필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놈들이 어떻게 나라 지키겠다고. 잘 봐라.”

    그렇게 말하고서 필두가 갑자기 자세를 낮췄다.

    그러더니 바로 앞에 있는 짐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심지어 한 개도 아니었다.

    왼손에 하나, 오른손에 하나.

    도합 두 개의 짐짝을 들어 올리기 위해 움직이는 필두였다.

    그 모습에 놀란 나머지 고만해가 손사래를 쳤다.

    “해, 행보관님! 그러다가 다치십니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편이…….”

    필두는 사고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괜히 무리하게 힘을 썼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는가.

    고만해뿐만 아니라 철물점 주인도 그를 만류했다.

    “짐 옮기는 건 젊은 친구들에게 맡기고 행보관님은 쉬시는 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고만해.”

    “일병 고만해!”

    “거기서 얌전히 보고 있어라.”

    불안한 예고 한 마디를 던진 필두가 점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본인의 특기인 흑마술을 발동하는 중이었다.

    마나의 흐름이 그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함과 동시에 근력을 일시적으로 상승시켜주는 마법을 거는 순간.

    마치 강력 본드로 바닥에 붙여 놓은 것과 같은 무게감을 자랑하던 짐짝 두 덩어리가 너무나도 가볍게 수직 상승했다.

    “헉……!”

    필두의 괴력에 고만해가 헛숨을 삼켰다.

    강필두. 그의 나이, 38세.

    결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20대 초반의 청년들에 비해 훨씬 더 강인한 기력을 뽐냈다.

    “이 가벼운 것 하나 못 드냐.”

    “…….”

    “나도 두 개씩이나 드는 걸 가지고 괜히 무겁다고 생색내기는. 쯧쯧…… 엄살 그만 부리고 후딱 옮기기나 해라.”

    “아, 알겠습니다!”

    필두가 저렇게까지 힘을 쓰는데, 한창 혈기 왕성한 자신이 고작 하나에 구시렁거릴 수도 없지 않은가.

    남자의 자존심이란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법.

    결국 고만해 또한 전도혁과 마찬가지로 자포자기의 심정을 지니기 시작했다.

    * * *

    행보관, 강필두과 함께 시내로 나갔다가 근육통과 함께 복귀하게 된 두 남자, 고만해와 전도혁.

    “아고고…… 나 죽는다, 이 녀석아!”

    “죄, 죄송합니다!”

    엎드려 누운 고만해의 등과 어깨를 마사지해 주던 이등병이 곧장 사과의 말을 건넸다.

    끙끙 앓아누운 고만해와 다르게 전도혁은 사회에 있을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라 하더라도 이번 노가다는 분명 빡셌다.

    한편, 제1생활관으로 돌아온 소진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설마 저 많은 것들을 고작 단 두 명한테 나르라고 말할 줄이야. 아무튼, 고만해도 그렇고, 전도혁도 그렇고. 고생 많았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소진언 병장님.”

    고만해가 누운 자세에서 머쓱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와 다르게 전도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편, 두 사람과 다르게 멀쩡한 모습으로 행정반에 자리를 잡은 필두는 오늘 공수해 온 훈련 물자들을 최종 체크했다.

    ‘이것으로 물자 부족 문제는 해결되었군.’

    전쟁에서 훈련 물자는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훈련 물자의 부족은 곧 그 전쟁의 패배를 의미하는 법.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필두는 이 작업만큼은 만전을 기하고 싶었다.

    ‘남은 것은 생필품 체크, 그리고 병사 개인 면담인가.’

    훈련을 앞둔 만큼 병사들의 컨디션, 그리고 상태 등도 미리 확인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뒤늦게 문제라도 생기면 곧장 그 소식이 언론을 타기 시작하고, 사건에 관계된 자들은 하나둘씩 군복을 벗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몰랐다.

    인명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필두도 익히 잘 인지하고 있었다.

    사실 레디너스 대륙에 있었을 당시에는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다뤄지고 있지 않았다.

    치안이 낮은 도시에선 살인과 강도, 강간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군대 내에서 대규모 훈련을 하다가 병사가 사망해도 현 세계처럼 큰 파급력을 가지진 않았다.

    레디너스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하나 이곳은 많이 달랐다.

    인권이 보장되어 있는 곳. 그렇기에 필두도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는답시고 읍참마속(泣斬馬謖)과 같은 수단을 동원할 순 없었다.

    물론 필두한테 있어서 마속과 같은 존재감을 가진 병사 자체도 없었지만 말이다.

    ‘하여튼 조만간 개인 면담도 실시해야겠군. 그렇다면 다음은…….’

    곧장 다른 안건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아직도 계셨군요, 행보관님.”

    때마침 행정반으로 돌아온 포대장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미 퇴근 시간도 훌쩍 지나셨는데, 집에 안 들어가셔도 됩니까?”

    “이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워낙 집중하고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미 해는 저문 지 오래. 병사들 역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와 개인정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행보관님 쓰러질까 봐 걱정됩니다. 이제 슬슬 들어가시지요.”

    연대장의 참관 때문에 행보관에게 더 많은 업무를 맡기고 만 포대장.

    그 때문일까. 행보관의 이런 무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 시각, 8시 반.

    확실히 포대장의 말대로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는 편이 좋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몸 관리 잘하시고요. 아, 그리고 차 운전하실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포대장이 다시금 신신당부를 했다.

    목숨을 잃을 뻔한 큰 교통사고를 겪었던 필두였기에 포대장으로선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리무어에게는 그런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저 귀를 기울이는 척만 하고서 곧장 막사 바깥을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위병소 바깥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릴 무렵.

    띠리리리링!

    그의 스마트폰이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 화면을 보자마자 필두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직 통화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해왔는지 너무나도 손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마지못해 통화하기를 선택한 필두.

    “여보세요.”

    “나다, 필두야. 이번 주에 소개팅하기로 한 거, 잊지 않고 있지?”

    기다렸다는 듯이 소개팅 이야기를 언급하는 그의 어머니였다.

    “알고 있어요.”

    “오후 2시에 신세계약국 사거리 앞에서 보기로 했다. 중매해 주기로 한 아주머니랑 그 처자랑 같이 나오기로 했으니, 잊지 말고 나오려무나.”

    “네.”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는 필두였다.

    어차피 이번 한 번만 만나면 된다.

    만나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그래도 소개팅 한 번 했으니까 당분간은 여자 만나라는 말, 흘려듣도록 하겠다’라는 말을 내뱉을 자격이 주어질 터였다.

    눈 한 번만 딱 감고 나가면 된다.

    여차하면 전도혁에게 했던 것처럼 여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그냥 다시 집으로 도로 돌아가게 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법을 사용하는 건 심사숙고해야 했기에 이건 좀 고민을 할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와 통화를 끊을 무렵.

    타이밍 좋게 그의 집에 딱 도착할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곧장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운 필두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 세계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너무 많군.”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포대장, 그리고 철물점 주인 등등.

    과도한 관심은 오히려 필두를…… 아니, 드리무어를 피곤하게 만드는 법이다.

    나 홀로 독고다이를 외치며 살아왔던 그로선 이런 다방면의 관심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아무튼 토요일이라.”

    주말까지 반납하면서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게 조금 스트레스가 쌓일 만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세계에 드리무어란 흑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강필두만 있을 뿐.

    * * *

    토요일 오전.

    본래대로라면 부대로 출근을 하려고 했던 필두였으나, 갑작스럽게 잡힌 소개팅 약속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소개팅이 9090대대 제1포대 병력들에게 의외의 호재로 작용하고 만 것이다.

    “주말에도 열심히 괴롭혀주려고 했더니만. 운이 좋은 녀석들이로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소개팅을 물리치고 다시 부대로 복귀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빨리 소개팅을 마무리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전투복 대신 다른 입을 만한 옷들을 고르기 시작한 필두가 전신거울 앞에 섰다.

    옷장에 걸려 있는 다수의 옷들을 살펴본 결과.

    “이게 가장 무난하겠어.”

    세미 정장 느낌이 나는 옷을 선택했다.

    양복을 입고 가기에는 뭔가 좀 딱딱한 분위기를 연출할 거 같고, 그리고 움직이기도 좀 불편했다.

    트레이닝복 같은 걸 입고 갔다가는 분명 중매를 봐주기로 한 아주머니와 필두의 어머니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분명하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결국 지금 필두가 들고 있는 옷이 최종 선택을 받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전신거울 앞에 마주서 옷맵시를 확인해 봤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군.”

    자화자찬이긴 했지만, 필두가 말한 그대로 정말 괜찮아 보였다.

    애초에 필두가 여자와 연이 없었던 건 못생긴 얼굴이라든지 못난 체형 등이 아니었다.

    소극적이고 숫기없는 태도 덕분이었다.

    오히려 얼굴은 나름 봐줄 만했다. 육신은 드리무어가 필두의 육신을 차지한 이후 꾸준히 운동을 해오고 있었기에 잔근육이 제법 늘어 탄탄한 근육 몸매로 변모했다.

    38세임에도 나름 훈남으로 바뀌게 된 필두. 사고 이후 생활 방식이 180도 바뀌게 된 아들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오히려 아들의 이런 변화를 반겼다.

    하지만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나는 건 여전했다. 그게 필두의 부모가 생각하는 유일한 불만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러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슬슬 나가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모르겠군.”

    약속 장소까지 차를 타고 가면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하나 오늘은 주말. 차가 밀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라도 조금 더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 * *

    약속장소인 사거리에 도착한 필두가 손목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재 시간, 오후 1시 56분.

    4분이 남은 상황에서 누군가가 필두를 불렀다.

    “필두야, 여기다!”

    그의 어머니와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한 아주머니가 필두의 이름을 불렀다.

    빠르게 걸음을 이동하기 시작하는 필두.

    하나 그 순간.

    필두의 시선에 놀라움이 물들었다.

    물론 그건 중매쟁이 아주머니 곁에 나란히 서 있던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행보관님……?”

    “혜정 씨가 여길 어떻게…….”

    바로 저번 주에 만났었던 목사의 딸, 민혜정.

    그녀가 바로 필두의 소개팅 상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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