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7화
제6장. 훈련 준비(2)
훈련 물자들을 면밀히 살펴보던 필두.
가지고 다니던 수첩을 통해 부족한 물자들을 확인해 직접 적어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야 할 물건이 꽤 많군.’
얼추 예상은 했었는데, 이렇게나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제1포대의 경우에는 한동안 훈련이 없다가 실로 오랜만에 포대전술훈련이라는 걸 받게 되었다. 그래서 여타 다른 훈련보다 더 철저한 준비 과정을 요하고 있었다.
하나 그것도 다 훈련 물자가 제대로 갖춰져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수첩에 적힌 부족한 훈련 물자들을 눈에 익혀두는 동안, 필두와 함께 포상을 이동하며 일광건조만 죽어라 한 선임급 병사들은 거의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해, 행보관님. 다 끝나셨지 말입니다…….”
소진언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하나포부터 여섯포까지.
심지어 제1포대 사격지휘소를 포함해 치장물자 적재 창고까지 전부 싹 다 돌았다.
이제 더 돌 만한 곳도 없었다.
“왜. 힘드냐.”
“그, 그렇지 않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소진언의 한 마디였다.
그러자 필두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안 힘들다면 다른 작업 계속하든가.”
“죄송합니다! 힘들어 죽겠습니다!”
결국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소진언을 비롯해 다른 병사들 역시 제발 추가 작업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듯 필두를 응시했다.
그러자 필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좋다. 막사에 들어가서 쉬도록.”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보관님!”
오죽하면 사랑한다는 말까지 하겠는가.
지옥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며 후다닥 막사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선임급 병사들.
필두가 혹여나 변심이 들까 해서 거의 도망치다시피 장소를 이탈했다.
그렇게 선임급 병사들이 마수의 손길에서 벗어났을 때.
시간은 이미 5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태양조차 퇴근한 저녁 7시 반.
아직 행정반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수첩 위로 무언가 바쁘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필두의 모습에 행정병과 당직사병의 표정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필두가 행정반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병사들에겐 고통이었다.
행여나 또 무슨 작업 같은 걸 시키지 않을까.
아니면 대청소라든지 이런 귀찮은 것들을 지시하지 않을까.
머릿속에 그런 걱정들이 한 가득이었다.
하나 병사들의 이런 우려와 다르게 필두는 오직 포대전술훈련에 관한 것만 신경 쓰고 있었다.
훈련이라 함은 병사들을 단련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다.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에도 병사들이 대규모 훈련에 들어가면, 그 국가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였다.
물론 그곳은 실제로 전쟁도 빈번히 발생하는 곳이었기에 그랬던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필두가 아는 바로는 대한민국이란 나라 역시 결코 안전한 지역이 아니었다.
북한과의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벌어질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드리무어로서는 여러 번의 전쟁 경험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세계의 현대전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포대전술훈련 같은 나름 규모 있는 훈련을 통해 현대전의 양상이 어떤지 알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이런 개인 욕심이 외부에는 ‘훈련에 의욕을 보이는 행보관’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었다.
실제로 간부들 사이에서도 ‘우리 행보관이 달라졌어요’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드리무어의 영혼이 자리 잡기 전의 강필두는 훈련에도 그리 열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독기가 없었으니까.
그 때문일까. 의욕도 없고 독기도 없는 행보관, 강필두의 아래에서 병사들 역시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필두는 달랐다.
악마가 되어 돌아온 행보관!
그게 강필두의 현재 이미지였다.
“흐음.”
옅은 신음을 내며 의자에 몸을 묻는 필두.
그의 모습을 예의주시하던 오늘의 당직사관, 통신반장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로 그리 고민하시는 겁니까? 행보관님.”
“부족한 훈련 물자를 어떻게 채울지 고민이다.”
“아, 그거 말입니까? 바깥에 나가서 사오면 됩니다.”
“그래도 되는 건가?”
“네.”
실로 간단한 문제였다.
필두는 복사 관련 마법을 이용해서 부족한 훈련 물자들을 채워놓을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나 만약 그렇게 한다면 타 간부와 상관에게 어떤 식으로 부족한 물자를 채웠는지 명쾌하게 답을 들려줄 수가 없었다.
마법은 다른 이들에게 절대 비밀이었으니까.
하지만 필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괜한 걸로 고민했군.”
“하하하, 행보관님. 바깥에서 사오는 방법 말고 훈련 물자 채울 방법은 아마 타 부대에서 훔쳐오는 것밖에 없을 겁니다. 뭐, 그러면 큰일나긴 하지만요.”
“도둑질은 안 좋지.”
흑마법사인 자신이 이런 말을 하니 뭔가 좀 어색하게 들렸다.
도둑질보다 더한 짓도 많이 해본 드리무어인데, 이제와서 본인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아무튼 바깥에 나와서 사오면 된다 이거지.”
“예, 행보관님.”
“좋은 정보 고맙다.”
“정보랄 것까지야 있습니까, 하하.”
어색한 웃음을 토로하는 통신반장이었다.
하기야.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필두가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겨우 이런 거 가지고 말이다.
통신반장이 이런 의구심을 가지거나 말거나, 필두의 머릿속은 벌써 내일 계획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오전.
작업 분류를 위해 집합을 마친 병력들 앞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바로 행보관, 강필두였다.
‘엑, 행보관님이시잖아?’
‘이런 빌어먹을…….’
‘행보관님이 시키는 작업은 절대로 안 나간다! 절대로!’
병사들은 어제, 분대장급 선임병들이 포상을 일일이 싹 돌아다니며 고생 아닌 고생을 한 모습을 먼발치에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훈련 물자 체크만 하고 끝날 줄 알았던 행보관과의 동행이 설마 지옥행이 될 줄이야.
병사들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지만, 여하튼 한 가지 확실한 건 ‘행보관과 같이 작업하면 안 된다!’라는 점이었다.
특히나 소진언을 포함해 어제 필두와 함께 포상을 돌아다녔던 병사들은 더더욱 이러한 마음을 굳게 잡고 있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빠지리라!
그렇게 생각할 무렵, 필두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나랑 같이 바깥에 나갔다가 올 병사 두 명 모집한다.”
“바깥이라니……?”
“어느 바깥을 말하는 거지?”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군대를 기준으로 바깥이라 칭할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광활했다.
철조망 밖이 전부 ‘바깥’이었으니 말이다.
‘혹시 울타리 작업 아니야?’
‘목진지 공사일지도 모르지.’
‘측각기 계단 작업일지도.’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동안, 필두가 곧장 자신이 표현한 ‘바깥’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려줬다.
“근처 시장에 좀 다녀올까 한다.”
“……!”
시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병사들의 표정이 싹 바뀌기 시작했다.
시장, 그 말인즉슨…….
‘사회에 나갈 수 있다는 뜻인가!’
매력적인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기독교 종교 행사에 갔던 병사들은 민혜정이라는 아리따운 미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젊은 여자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 상태였다.
남자는 여자 없이는 살기 힘든 존재. 더욱이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여자 구경하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군인들에게 있어서 바깥에 나간다는 건 실로 귀중한 체험이기도 했다.
외박도, 외출도, 휴가도 아닌데 사회에 나가서 민간인들을 볼 수 있다니!
비록 필두와 함께 가야 한다는 불안 요소가 존재하긴 하지만, 민간인(젊은 여자)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제가 가겠습니다!”
“병상 구민상! 강력하게 지원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절 데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후임급이건 선임급이건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지원자들이 속출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속내에 필두가 속으로 웃음을 감췄다.
병력들을 쭉 훑어보던 찰나에, 앞줄에서 열정적으로 손을 들고 있는 한 명의 병사가 포착되었다.
바로 성찬에게 강제 충성을 맹세했던 전도혁이었다.
“전도혁.”
“일병 전도혁!”
“너도 바깥에 나가고 싶냐.”
“예, 그렇습니다!”
필두가 이번에 데려고 나갈 병사들은 단 두 명.
기왕이면 두 사람 다 힘을 꽤 쓰는 병사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전도혁이라면 충분히 기대에 부응할 터.
“좋다. 우선 한 명은 너로 확정.”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평소에 그렇게 뒷담화를 깠던 행보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은덕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
이 한 명을 누구로 할까 고민하던 필두가 이윽고 어느 병사 한 명을 가리켰다.
“거기, 너.”
“일병 고만해!”
“뭐? 나보고 그만하라고?”
“아, 아닙니다! 이름이 ‘고만해’입니다, 행보관님!”
필두의 때아닌 농담에 고만해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일병밖에 안 된 병사가 행보관에게 어찌 감히 대들 수 있단 말인가.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사건이 될지도 몰랐다.
전도혁이라면 몰라도, 고만해에겐 그런 깡은 없었다.
“너하고 전도혁. 이렇게 두 명이 나와 함께 간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또 한 명의 병사가 필두의 선택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당시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이것이 또 다른 지옥행 열차가 될 줄은…….
* * *
필두의 차에 먼저 오른 전도혁과 고만해.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전입한 동기였다.
그럼에도 서로 그렇게까지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전도혁 때문이었다.
일부러 관심병사를 자처해 군 생활을 편하게 보내려고 했던 전도혁은 동기들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강필두 한 명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으니, 관심병사 콘셉트는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었다.
A급 병사가 되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필두가 있는데, 어찌 관심병사 코스프레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단 말인가.
멧돼지의 먹이가 되기 싫다면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이 좋았다.
그 때문일까. 최근에는 동기들끼리의 교류가 빈번하게 늘어났다.
자주 말을 주고받는 동기 중 한 명. 그 사람이 바로 고만해였다.
“선택받은 자가 된 걸 축하한다, 전도혁.”
“그러게 말이다.”
필두의 차에 먼저 오른 두 병사가 의기투합을 했다.
전도혁은 애초에 필두한테 단단히 눈도장이 찍혀서 그렇다 치더라도, 고만해는 운이 좋았다.
“나가면 행보관님이 맛있는 거라도 사주겠지?”
“그걸 어떻게 아냐.”
고만해의 말에 전도혁이 곧장 태클을 걸었다.
마치 괜한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는 듯했다.
하나 고만해의 생각은 달랐다.
“듣자 하니 행보관님, 가끔 병사들 데리고 바깥에 나가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랬데.”
“진짜로?”
“물론! 직접 경험한 선임들한테 들은 거니까 믿어도 돼!”
그러나 고만해가 놓친 크나큰 중요 정보가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사주던 착한 행보관은 강필두고, 지금의 행보관은 드리무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