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3화
제5장. 주말 출근(2)
주말의 일광건조는 병사들에게 있어서 지옥과도 같았다.
안 그래도 평일 날, 각종 노가다로 심신이 지쳐 있는 병사들인데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광건조를 한다고 하면 자연스레 짜증이 올라오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일광건조를 지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순둥이 행보관이라 불렸던 남자, 강필두였다.
볼을 꼬집고 눈을 비벼봐도 틀림없었다.
사방에 널려 있는 매트릭스와 모포, 포단과 베개의 형체는 여전히 나전구의 시야에 각인되어 있었다.
“진짜로 행보관님이 시킨 거냐?”
“네. 그리고 일광건조가 끝이 아닙니다. 조금 있다가 대청소도 시키려고 하시는 거 같습니다.”
“뭐라고? 이런 미친! 갑자기 무슨 대청소야! 저번 주에도 했잖아!”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하랍니다.”
일광건조 하나만으로도 피곤한데, 거기에 대청소까지 하라니.
“세상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전구 상병님. 그 말,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그, 그러냐.”
그만큼 정황이 없음을 뜻했다.
일광건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면회 복귀 신고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행보관님, 행정반에 계시냐?”
“네. 계십니다.”
알고 있다고 한들,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행정반에 가고 싶지 않았다.
괜히 트집이라도 잡혀 행보관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신고를 생략할 수는 없었다.
뚜벅뚜벅.
사열대의 계단을 오르는 나전구.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후우.”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막사 입구에 들어선 뒤, 행정반의 문을 열었다.
“충성! 상병 나전구,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나전구의 등장에 절로 고개를 돌리는 한 남자.
행보관, 강필두였다.
“왔냐.”
“예! 행보관님.”
“면회는 즐거웠나.”
“네! 즈, 즐거웠습니다!”
“그렇다면야 다행이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일까.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강필두의 말에 나전구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오자마자 일광건조부터 시작해서 병사들을 빡세게 굴리는 중이던 강필두.
그의 모습에 일말의 불안감이 스쳤다.
‘설마…… 내가 아까 면회 신고 대충 했다고 그러시는 건가?’
보복성 명령일지도 몰랐다.
물론 가능성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만약 자신의 불량한 신고 태도 때문에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중이라면, 분명 나전구에게도 피해가 갈 터.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임하고 있던 그에게 강필두가 피식 웃음을 토해냈다.
“뭘 그리 긴장하냐. 내가 무섭나?”
“아, 아닙니다!”
“그럼 안 무섭나. 호구로 보인다는 뜻인가?”
“저, 절대 그렇지 아, 않습니다!”
평소에는 순둥이 행보관이라며 병사들에게 뒷담화 대상이 되었던 강필두지만, 지금의 그는 왠지 모를 포스를 자아내고 있었다.
순둥이라 불려도 그의 계급은 상사. 직위는 행정보급관이다.
일개 병사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강필두가 천천히 나전구에게 향했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나전구의 전신은 호랑이와 마주한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때, 강필두가 나전구의 어깨 부분에 손을 뻗었다.
이윽고.
“전투복에 주름이 져 있군. 아침에 그렇게나 옷차림에 신경 쓰던 녀석이 이게 뭐냐.”
“죄, 죄송합니다!”
“품위 단정하게 하도록. 넌 군인이면서 내 부하이기도 하니까.”
“예!”
고작 옷 주름 펴준 것에 불과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럼에도 뭐라고 할까…….
순간 지옥을 맛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 *
저녁 식사 시간 이후.
병사들에게 있어서 토요일 저녁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다.
쉴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특정 TV 프로그램이 지친 군인들의 심신을 달래주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저녁 7시만 되면 어김없이 방영되는 ‘가요경합전’.
오늘은 세간에서도 유명한 5인조 섹시 걸그룹, 설틴이 출연할 예정이었다.
설틴의 컴백 무대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하면서 9090대대 제1포대 생활관은 상당히 보기 드물게 거의 모든 장병이 TV 앞을 지키고 있었다.
평일의 경우에는 헬스장이나 PX, 축구 게임이나 노래방을 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에 한눈 팔릴 때가 아니었다.
“쉿! 조용! 곧 나온다.”
소진언이 웅성거리는 이들에게 주의를 줬다.
정확히 7시 34분.
지금 무대가 끝이 나면, 곧바로 설틴의 무대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TV를 응시하는 와중이었다.
“오늘따라 생활관이 상당히 조용하군.”
1생활관으로 기습 방문을 시도한 강필두의 모습에 병사들의 얼굴이 점점 사색을 띠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다!
오늘 강필두는 잔뜩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안 그래도 기강이 헤이해진 병사들의 평소 모습에 윽박을 지르곤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주말 출근까지 마다치 않고 부대로 찾아와 일광건조와 대청소를 시킬 정도였으니…… 그의 독기는 최근 물이 잔뜩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하고 있는 건가.”
강필두가 이들에게 물었다.
드리무어가 아닌 강필두 본인이었다면 현재 병사들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숨을 죽이고 대기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강필두의 몸속에는 드리무어라는 사악한 흑마법사가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들이 걸그룹 때문에 TV 앞에 죽치고 앉아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게…….”
“…….”
대답을 망설이는 병사들을 대신해 최고참인 소진언이 운을 뗐다.
“설틴이 컴백한다고 해서 대기 중입니다!”
“설틴? 그게 뭐지?”
“걸그룹입니다! 요즘 대세라고 불리는 아이돌 그룹인데…… 저희 사이에서도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강필두의 시선이 절로 TV를 향했다.
그러는 사이에 병사들이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혹여나 이 시간에 또 무언가를 시키는 건 아닐까.
물론 시키면 해야 한다. 그게 바로 군대라는 곳이니까.
최근 필두의 독기가 바짝 올랐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아는 병사들이었기에 더더욱 불안한 기색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감정을 읽기라도 한 걸까.
필두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TV 보는 거 방해할까 봐 겁나나.”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최대한 필두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병사들이 즉각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이름 하야 ‘설틴 컴백무대 사수하기’.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빛을 본 걸까.
필두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TV 보는 것까진 터치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봐라.”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감사합니다!”
필두의 배려에 감동(?)을 받은 모양인지 여기저기서 감사의 표현이 들려왔다.
곧바로 걸음을 재촉하며 생활관을 벗어나는 필두.
그의 군기 잡기는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지, 병사들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주말 저녁은 자유 시간. 오후 때 대청소와 일광건조로 고생했으니 저녁은 푹 쉬게 놔두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괜히 빡세게 군기 잡는다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채찍질에는 항상 당근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게 필두가 생각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 * *
저녁 점호는 토요일 당직사관에게 맡겨두기로 한 필두는 막사 앞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량에 몸을 실었다.
“조심해서 가시기 바랍니다, 충성!”
“충성!”
당직사관과 당직병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차를 몰아가는 필두.
집에 돌아가면 마나 수련부터 먼저 실행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현 차원에 머물고 있던 현지인인 강필두라는 남자의 몸에 숨어지내고 있지만, 언제 추격자들이 이곳에 올지 모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본래의 힘을 되찾으려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강필두는 자신만의 군대를 양성하려고 일부러 9090대대 제1포대 병사들에게 보다 강도 높은 병영생활을 강요하고 있었다.
애초에 병사들이 강필두를 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순둥이 시절의 강필두였다면 병사들의 이러한 태도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드리무어는 달랐다.
그는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시선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자가 있다면, 드리무어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본때를 보여주고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예전부터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이 세계에서 멋대로 자신의 흑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아직 마력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을뿐더러, 이 세계 주민들에겐 마법이라는 단어 자체가 판타지 세계에서나 나오는 허구의 존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필두가 마법을 사용한다면, 분명 다방면으로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레디너스에서 파견될지도 모르는 추격대에게 자신의 흔적을 알리는 과오를 범할 수도 있었다.
최대한 그의 존재감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전도혁 같은 반항적인 병사에겐 흑마법이 특효약이었다.
그럴 때에만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웬만해선 이 세계 현지인처럼 행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법만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이 고철을 타고 다닐 필요도 없을 터인데.”
처음에는 운전이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던 드리무어였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름 신선했다.
레디너스에선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넘기기 힘든 것도 있었다.
띠리리링!
스마트폰 신호음이 그의 차량 안을 가득 채웠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를 확인한 강필두.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강필두란 남자의 어머니인가.”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필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예. 접니다. 무슨 일입니까?”
-저번에 말했던 그 소개팅 말이다. 구체적으로 날짜를 잡았으면 하는데 언제쯤 시간 되니? 이 어미가 좋은 처자 하나 잡아뒀다.
“…….”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당시,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던 것이다.
어찌 저 찌 계속 날짜를 미뤄오고 있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압박은 커져만 갔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자식을 장가보내려고 하는 게 이 세계의 관습인가.’
얼마 전에 당했던 사고 때문에 결혼에 대한 압박이 더 심해졌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이번 주 주말이면 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래? 주말, 주말이란 말이지…… 알았다. 그쪽이랑 시간, 장소 조율해서 나중에 알려주마.
“예.”
결국 마지못해 백기를 들고 만 강필두.
병사들 앞에선 악마와도 같은 행보관으로 이미지 체인지를 하고 있었지만, 부모님에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에 가족들을 잃었던 트라우마가 아직도 자리매김을 한 덕분일까.
‘진짜 가족도 아닌데. 나란 놈도 참 별걸 다 신경 쓰는군.’
필두의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