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 행보관되다-12화 (12/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2화

제5장. 주말 출근(1)

1생활관에서 나른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던 병사들.

그중에서도 소진언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관물대 아래에 처박혀 있던 모포와 베개를 꺼내 들었다.

“졸려 뒈지겠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소진언 병장님.”

김조항이 그의 안부를 묻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소진언이 다시 한번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안 피곤하겠냐. 야간 외곽근무 때 말번초도 아니고 그 전번초였으니…… 제대로 잠도 못 잤다.”

“하하, 그러면 피곤할 만도 하지 말입니다.”

야간 말번초의 경우에는 그래도 차라리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6시가 기상 시간이라고 친다면, 말번초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근무를 마치는 편이었다.

은근슬쩍 근무 교대를 할 때 늦장을 부리면 아침 점호도 빠질 수 있으니, 오히려 말번초가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또 자다가 근무를 나가느니, 차라리 1시간 일찍 잠을 잤다가 근무를 나서는 편이 덜 피곤하지 않은가.

그러나 말번초 바로 그 전번초는 최악의 야간 근무 중 하나로 손꼽혔다.

4시에 일어나 근무를 갔다 오면 5시다. 이미 외곽 근무를 서느라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인데, 여기서 1시간 깔짝 눕는다고 다시 잠이 올까.

몸을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새벽 6시에 도달하게 되고, 이들은 결국 1시간 잠을 설친 시간에 더해 외곽근무 1시간까지…… 도합 2시간을 손해 본 채 점호까지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 얼마나 피곤하고 억울한 일인가.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소진언이 김조항에게 새겨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 먹기 전까지 나 깨우지 마라.”

“그러다가 행정반에서 집합이라도 걸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통제관님이라면 안 걸겠지.”

성격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통제관은 쓸데없는 일들도 병사들을 주말까지 괴롭히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행정반을 슬며시 바라보던 소진언이 추가적인 정보를 들려줬다.

“행보관님도 계시지 말입니다.”

“야. 우리 행보관님이 주말에 뭐 작업 같은 거 시키기라도 했냐. 오늘은 그냥 오랜만에 병사들 얼굴 보고 싶어서 주말에 출근했겠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하긴, 그렇지 말입니다.

“아무튼 난 잘 테니까 문제 생기면 네 선에서 알아서 처리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언은 마음껏 안심하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하고 말았다.

-아아, 행보관이다.

생활관 내부에 울려 퍼지는 필두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조항이 작은 의구심을 표현했다.

“행보관님이 왜 방송을……?”

“글쎄다…….”

진언도 궁금한 모양인지 얼굴을 빼꼼 내민 채 귀를 기울였다.

그 순간.

-지금부터 전 분과는 일광건조 실시할 수 있도록.

방송을 듣자마자 병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야, 조항아.”

“사, 상병 김조항.”

“지금…… 내가 꿈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아닌 거 같습니다만.”

일광건조라는 말에 순간 진언과 조항을 포함해 다른 병사들의 행동이 정지했다.

자신들이 잘못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필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의 말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후딱 일광건조 안 하냐. 실시!

“시, 실시!”

강제적으로 대답을 강요당한 병사들.

그들의 마음속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

제1포대 막사 근처에 마련된 간이 헬스장.

그곳에서 꾸준히 운동하고 있던 전도혁의 귓가에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단어가 들려왔다.

“일광건조…… 라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필두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면서 ‘후딱 일광건조 안 하냐, 실시!’라는 말이 들려왔기에 더 이상의 의심이 필요 없어졌다.

일광건조 하라는 방송이 나올 때마다 전도혁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의무실을 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행보관에게 또다시 잘못 찍히기라도 한다면…… 또 야산에 멧돼지 먹잇감이 될지도 몰라!’

필두는 분명 그에게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렸다.

A급 병사로 성장하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나락으로 추락한 전도혁의 내무 생활 이미지를 올려야 했다.

쿵! 쾅!

들고 있던 아령들을 바닥에 던지다시피 급하게 내려놓은 뒤.

냅다 막사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두 다리에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끌어모아 1생활관에 도착한 전도혁.

때마침 병사들이 죽을상을 하고서 일광건조를 하기 위해 매트리스와 침낭, 모포와 베개들을 들고서 사열대 바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임급들이 죄다 외곽근무니 면회니 하는 것들로 자리를 비운 터라 일광건조를 실행할 수 있는 인원이라고는 소진언과 김조항밖에 없었다.

두 명밖에 없는 와중에도 소진언은 어떻게 해서든 자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발휘하며 생활관 마룻바닥에서 그대로 누운 채 배 째라는 식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한 마디로 말년병장이 부릴 수 있는 꼬장이었다.

“소진언 병장님. 그렇게 누워계시다가 행보관님이 보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아니다. 저건 행보관의 탈을 쓴 악마야! 내가 알고 있던 행보관님은 주말에 일광건조 따윈 안 시켰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만…….”

그러나 얼마 전.

행보관이 측각기 계단 보수 작업을 할 때 보여줬던 카리스마를 생각한다면, 사고를 당하기 전의 행보관과 당한 후의 행보관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 사고가 행보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교통사고를 기점으로 행보관은 달라졌다.

적어도 김조항은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소진언이 제아무리 배짱 플레이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다지 좋은 꼴은 못 볼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일 났네…… 다른 분과들은 이미 침구류 다 깔기 시작했는데.’

속으로 난감함을 표하는 소진언.

바로 그때였다.

“소진언 상병님! 제가 옮기겠습니다!”

“네가?”

“예!”

그렇게 말하면서 두터운 매트리스를 2개 겹쳐 마룻바닥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두 팔을 쫙 펼치더니…….

혼자서 두 개를 한꺼번에 번쩍 들어 올렸다!

제1생활관 내에서도 가장 두껍기로 소문이 난 매트리스가 두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소진언이 사용하는 매트리스.

그리고 다른 하나가 오대기 소대장으로 지정된 간부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매트리스였다.

이번 주 오대기 소대장이 하나포 반장인 관계로 이 매트리스 역시 하나포가 당분간 맡기로 했다.

그럼에도 두꺼운 매트리스들을 번쩍 든 전도혁.

역시 체격에 맞게 제대로 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일단 이거 옮기고 오겠습니다!”

“어…… 그, 그래라…….”

평소의 전도혁 답지 않게 엄청난 의욕을 선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조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전도혁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

* * *

하나포의 후임급 인원들이 거의 다 외곽근무를 나갔음에도 이들은 전혀 어려움 없이 일광건조를 진행하고 있었다.

펼쳐놓은 판초 우의 위에 매트리스를 세워 겹쳐놓고, 그 위로 모포와 포단, 마지막으로 베개까지 올려놓음으로 인해 일광건조를 마무리했다.

여타 다른 분과들이 비해서도 월등히 빠른 속도를 자랑하며 일광건조를 끝낸 하나포 분과.

놀랍게도 이게 다 전도혁의 성과였다.

“후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는 전도혁.

평소 근력 운동이라든지 이런 걸 주기적으로 하기에 제아무리 두터운 매트리스를 옮긴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될 여지가 없었다.

한편,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조항이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물어왔다.

“야, 전도혁.”

“일병 전도혁!”

“너… 뭐 잘못 먹었냐?”

“멀쩡합니다만…….”

아니, 김조항과 소진언의 입장에선 도혁이 멀쩡하게 보이지 않았다.

매번 관심병사 핑계를 대면서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던 전도혁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는 방송이 나오자마자 생활관으로 달려와 여타 다른 분대원들에 비해 가장 적극적으로 일광건조에 나섰다.

전도혁의 이상 행동도 수상하게 여겨졌지만, 그보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게 따로 있었다.

“일광건조 다 끝났냐.”

“예, 예!”

“끝났습니다!”

행정반에서 나온 행보관, 강필두를 향해 병사들이 제각각 일광건조가 끝났음을 보고해 왔다.

그러나 순간.

필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누가 침구류만 일광건조 하라고 했나.”

“…자, 잘못 들었습니다……?”

병사들의 마음속에 일말의 불안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방송상으로는 일광건조를 하라고 했지, ‘침구류 일광건조를 하라’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인즉슨…….

“장구류까지 깡그리 다 일광건조한다. 실시!”

“시, 실시!”

예상치 못한 강필두의 추가 명령에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항을 비롯해 도혁 또한 마찬가지.

“…….”

말없이 전도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필두.

그의 시선을 은연중에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낀 도혁이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현재 도혁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기도 한 강필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히익!’

속으로 비명을 내지른 전도혁이 마치 걸음아 나 살려라는 식으로 빠르게 생활관을 향해 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필두가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녀석들아, 너희도 전도혁처럼 후딱후딱 움직이지 못할까!”

“아, 알겠습니다!”

필두의 한 마디에 병사들은 졸지에 관심병사로 찍힌 전도혁보다도 못한 녀석들이 되어버렸다.

* * *

면회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는 나전구.

놀러 온 친구 세 명 중 유일한 홍일점이기도 한 여성, 김미나를 몰래 훔쳐보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미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나전구였기에 이번에 그녀가 직접 친구들과 함께 면회를 온다고 했을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기뻤다.

면회를 온다고 해서 한껏 치장을 한 모양인지 평소 전구가 알던 미나의 모습보다 훨씬 더 예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전구가 미나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두 명의 친구들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랜만에 ‘젊은 여자’를 본 소감이 어떠냐?”

“소감이라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뭐 어때. 군인이라면 다들 여자를 그리워할 텐데. 안 그러냐?”

“암, 그렇고말고!”

일부러 미나와 전구를 연결해 주기 위해서 두 사람을 엮어보려고 노력하는 친구들.

그 모습에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전구였다.

괜히 이런 대화 때문에 미나가 불편해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속으로 노심초사하는 전구였으나, 당사자인 미나는 정작 그리 많은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 모양인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편안히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짜? 그렇다면 내가 온 게 다행이네.”

“그, 그렇지…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전구의 모습에 그의 친구들이 속으로 쌍욕을 날렸다.

‘이 새끼야! 지금이 기회 아니냐! 여자가 아니라 네가 보고 싶었다고 말을 해야지!’

‘으이구…… 이 화상아!’

기껏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줬는데, 정작 용기를 내지 못한 전구 때문에 더 이상의 대화 진전은 힘들어졌다.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이것저것 묻는 와중에.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면회 시간의 끝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위병소까지 친구들을 배웅해 주는 전구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도 꼭 와줘!”

“물론이지, 짜식아!”

“그때는 꼭 면회 외출 나가자!”

두 친구와의 우격다짐.

그사이에, 미나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손을 흔들어줬다.

별다른 배웅 인사를 직접 듣진 못했지만, 미나의 그런 모습만으로도 전구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짧고도 행복했던 면회 시간을 마친 이후.

막사로 올라가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하면서 막사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전구.

“하아… 휴가는 언제 나가냐.”

모아놓은 포상 휴가도 없는 상황에서 상병 정기 휴가까지 최근에 써버렸으니… 또다시 휴가를 나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했다.

없는 휴가 타령을 하면서 막사로 올라온 전구.

동시에 그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뭐야?”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침구류뿐만이 아니라 방탄모, 단독군장과 방독면 등 장구류까지 사열대 앞에 나란히 진열된 게 아닌가!

“설마……?”

전구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단어.

바로 일광건조였다.

“말도 안 돼! 오늘 일광건조를 했다고?”

당직이기도 한 통제관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웬만해선 병사들을 편하게 쉬는 쪽으로 해주려는 타입의 간부였다.

그런데 그가 일광건조를… 그것도 침구류뿐만이 아니라 장구류까지 시켰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바로 그때, 마침 방독면 세척까지 끝내고 힘없는 발걸음을 유지하던 병사 중 한 명이 전구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면회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혹시 통제관님이 일광건조 하라고 하신 거냐?”

“그게 말입니다…….”

병사가 잔뜩 썩은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더더욱 믿기지 못할 만한 발언을 들려줬다.

“행보관님이… 하신 겁니다.”

“……!”

그 순했던 행보관이 주말에 일광건조라니.

전도혁을 제외하고 아직 제1포대 병사들은 현재의 행보관이 자신들이 알던 그 순둥이 행보관과 다른 인물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