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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행보관되다-6화 (6/175)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6화

제3장. 거짓말 사냥꾼(1)

“……어, 어째서……?”

글씨를 쓰려고 했으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새하얀 종이 위에 행보관이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대로 다 적어내려 했으나, 손은 그대로 멈춘 채였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일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손이 멈춰서 움직이지 않다니.

당황한 나머지 근처에 있던 김조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조항 상병님!”

“……왜 그러냐.”

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반응하는 김조항.

그의 얼굴에는 도혁과 말을 섞는 것조차 하기 싫다는 티가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심병사인 척을 하면서 편하게 군 생활을 하려는 녀석의 수작이 빤히 보였는데, 도혁을 좋게 생각할 병사가 과연 어디 있을까.

도혁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구태여 자신이 먼저 선임의 도움을 찾진 않았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은 달랐다.

“글씨가 안 써집니다!”

“글씨가 안 써져?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글씨를 쓰려고 하면 말입니다. 갑자기 손이 멈춰서…….”

글씨를 적는 시늉을 직접 해 보이며 상황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더욱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

글씨가…….

써졌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른손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 김조항에게 글씨를 못 쓰게 되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펜을 들고 끼적이려고 하는 순간 마음대로 손이 움직인 것이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글씨가 잘 써지는 듯한 손놀림을 구사하는 전도혁의 행동에 조항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뭐? 글씨가 안 써진다고? 잘만 쓰는구먼!”

“이, 이상합니다! 분명 아까는…….”

“이제는 글씨 못 쓰는 병을 들먹이면서 또 관심병사 노릇하려고 그러는 거냐? 하다 하다 이제는 별의별 핑계를 다 대는구먼.”

“…….”

김조항을 비롯해 하나포 인원들은 전부 다 전도혁의 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당사자인 전도혁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서 관심병사인 척을 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전역만 하면 두 번 다시 안 볼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그들과의 전우애 대신 편안한 군 생활을 택했다.

그 덕분에 전도혁을 좋아하는 이는 사실 거의 없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니…….

딱 한 명.

마음에 들지 않지만, 병사들의 고충을 들어줘야 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가 한 명 있었다.

‘행보관님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겠구먼……!’

마음이 약한 강필두라면 분명 도혁의 세 치 혀로 그를 구워삶으며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오늘 하루 보여준 그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기에 영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부러 센 척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슬리퍼를 신고 어디론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전도혁.

그를 향해 조항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태클을 걸어왔다.

“어디 갈 때에는 분대원에게 보고하고 가는 게 FM 아니냐.”

“……행정반 좀 갔다 오겠습니다.”

“행정반? 뭐하러.”

“행보관님에게 상담 요청이 있습니다.”

“…….”

간단하게 할 말만 남긴 채 빠르게 행정반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조항.

그의 입에서 절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원…….”

* * *

멧돼지 사건이 얼추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강필두는 슬슬 퇴근 준비를 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예상치 않은 상담 요청이 들어와 그의 퇴근을 방해했다.

“충성. 일병 전도혁.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간단하게 행정반 출입 신고를 마친 전도혁이 과감하게 필두를 향해 걸어왔다.

“행보관님. 잠시 상담 요청이 있어 왔습니다.”

“나 퇴근하려는 거 안 보이냐.”

강필두의 표정에서 노골적인 귀찮음이 느껴져 왔다.

역시…….

평소의 강필두와 뭔가 달랐다.

‘아니, 얕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나한테 강하게 나가는 것일 뿐이다. 행보관은 행보관일 뿐…… 겁먹지 말자.’

스스로 결심을 다진 전도혁이 당돌하게 재차 상담 요청을 해왔다.

“제가 정신적으로 병적인 문제를 드러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제1포대에서 자살 소동이라도 발생하게 된다면…… 그때는 행보관님도 책임지실 수 없으실 겁니다.”

“말투 봐라. 싸가지 하고는…….”

전도혁의 언행을 통해서 평소 그가 얼마나 강필두를 얕봐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한 필두가 행보관실을 가리켰다.

“들어가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먼저 행보관실로 들어간 전도혁.

한편, 그의 발언에 당직사병과 당직병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전도혁이 방금 보여준 행동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행보관님한테 저게 무슨 말버릇인지 모르겠네…….”

“행보관님, 저런 녀석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시면 되지 않습니까?”

살짝 손을 들어 두 병사의 불만을 억제한 필두.

그러면서 말없이 행보관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필두가 간단한 마법을 몰래 시전했다.

‘사일런스.’

우우웅!

마나의 파동이 작은 행보관실을 감싸듯 펼쳐졌다.

그가 건 사일런스 마법 덕분에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 일체 바깥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어지게 된 셈이었다.

전도혁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필두가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글씨가 안 써진다고?”

“네!”

“어디 한번 써봐라.”

“…….”

백지 위에 글씨를 쓰기 위해 펜을 쥐어 보였다.

그러나 순간.

도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글씨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펜을 들고 글씨를 쓰는 시늉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잘 쓰였었다.

하지만 몰래 마음의 편지를 써 행보관의 만행을 고발하려고 하면 손이 글씨를 쓰는 행동을 거부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연 어떨까.

‘……마음의 편지에 쓰려던 내용을 쓴다면…… 아마 글씨가 안 써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품으며 일부러 백지 위에 행보관을 험담하는 글씨를 쓰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 순간.

손이 그대로 공중에 정지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거 보시기 바랍니다! 행보관님! 글씨가 안 쓰여집니다!”

“…….”

“어떻습니까! 제 말이 맞…….”

“별의별 미친 녀석을 다 보는군. 설마 내가 보는 앞에서 나의 험담을 쓰려고 하다니.”

“……!”

순간 필두의 말에 도혁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가 글씨를 쓸 수 없게 되는 전제조건은 바로 종이 위에 ‘행보관의 험담’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행보관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백지를 보고서?

“설마……!”

오전에 있었던 행보관의 머리 마사지가 주마등처럼 도혁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강필두.

그가…… 자신의 몸에 발생한 이상징후의 원인이었다!

도혁의 겁에 질린 모습을 보자마자 필두의 입꼬리가 양쪽 귀밑에 걸리기 시작했다.

“관심병사인 척을 하는 놈이라서 글러 먹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머리도 잘 돌아가는군…… 특별히 내 부하 1호로 삼아주지.”

그 순간 전도혁은 분명 똑똑히 들었다.

본인의 군 생활이 꼬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 * *

음흉스러운 미소를 띄워가는 필두.

도혁은 그에게서 섬뜩한 아우라마저 느껴질 정도로 많은 공포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하, 한 겁니까!”

도혁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그의 몸에서 발생한 탓에 일시적인 패닉 상태를 일으킨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도혁에게 있어서 ‘착한 호구’ 취급을 받던 강필두가 진범이라고 하니…….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2배, 아니, 3배 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짚었나?”

“…….”

“네놈이 마음의 편지에 내 험담을 쓰지 못하도록 ‘최면’을 걸어뒀다. 이러면 이해가 되나?”

“최, 최면……?”

물론 필두가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최면을 거는 방법이라든지 그런 기본 지식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최면은 단기간 내에 상대방을 세뇌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필두는 최면보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편했다. 실제로 도혁에게 건 필기 금지 세뇌 역시 최면이 아닌 마법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드리무어가 지난 몇 주 동안 강필두라는 존재로서 이 세계의 주민으로 살아본 결과, 마법이란 존재는 이들에게 있어서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그래서 일부러 마법이 아닌 최면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었다.

“최면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직도 못 믿겠나? 그럼 ‘내 이름’을 백지 위에 한번 적어봐라.”

“…….”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를 하던 도혁이 강필두라는 이름 세 글자를 적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러나.

필두가 말했던 그대로 도혁의 오른손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3자가 보면 도혁이 느끼고 있는 이 감각을 전혀 모를 것이다.

마치 오른손만 자신의 몸이 아닌 타인의 몸처럼 뇌에서 내린 명령을 거부한 채 행동을 정지하고 있는 이 기이한 감각을 도대체 누가 공감해 줄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왼손으로 펜을 잡았다.

그러나 그 기이한 감각은 오른손에 머무르지 않고 왼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긴 모양인지 이번에는 팬의 끄트머리를 입으로 물었다.

양손이 아닌 입으로 행보관에 관한 험담을 쓰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해서든 필두의 만행을 적어내기 위해 정상적인 필기 방식을 포기하면서까지 노력하는 도혁의 모습에 필두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아주 그냥 생쇼를 하는구먼. 어디 백날 그렇게 해봐라. 내 이름이라도 써지나.”

“…….”

당연한 결과겠지만…… 입으로 펜을 물고 글씨를 써보려 해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강필두라는 이름 세 글자조차 적을 수가 없었다.

최면이라니. 그런 비상식적인 요소로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걸어놓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처음에는 필두가 그저 허황된 패기를 부리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몸소 실시간으로 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질적인 감각을 느끼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더 자신을 속이겠는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행보관님…… 참으로 치사하십니다. 설마 최면까지 배워가면서 저에게 이런 만행을 저지르실 줄이야.”

“만행이라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당연한 처사’라고 여겨라.”

“…….”

어차피 상관없었다.

행보관에 대한 것들만 종이에 적지 못할 뿐이지, 그 이외의 것들은 충분히 글씨를 적을 수 있었다.

억울하고 짜증 나긴 하지만, 행보관만 어떻게든 잘 피해 다니면 될 일.

그러나.

필두의 다음 이어지는 말이 도혁의 전신에 닭살을 돋게 만들었다.

“나 혼자만 피해 다니면 될 거로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난 네 군 생활이 끝날 때까지 죽어라 굴릴 예정이니까.”

“제, 제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건 과거의 네 기억을 되짚어보면 답이 나올 텐데?”

“…….”

글씨가 안 된다면 말이라는 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대대장에게…… 아니면 연대 측에서 내부 부조리 검열이 오기라도 할 때, 검열관에게 행보관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이실직고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칠 무렵, 이미 도혁의 이런 잔꾀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필두의 다음 새로운 카드가 펼쳐졌다.

“설마 내가 ‘필기’에만 최면을 걸었을 거 같나?”

“무, 무슨 말씀이신지…….”

“나에게 욕을 해봐라.”

“……?”

뜬금없이 본인에게 욕을 해달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요구란 말인가.

게다가 상대는 간부였다. 제아무리 거짓 관심병사 행세로 편한 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도혁이라고 하지만, 간부 앞에서 직접 그를 욕하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욕하고 싶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필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야, 이 씨……!”

두 눈을 질끈 감고 쌍시옷으로 시작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순간!

“으아아아악!!”

갑자기 도혁의 입에서 욕설 대신 비명이 튀어나왔다.

뇌를 쥐어짜는 듯한 두통과 매스꺼움이 겹쳐져 헛구역질까지 하게 만들었다.

뒤이어 호흡곤란 증세까지 오는 모양인지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켁켁…….!”

“괴로워 보이는군.”

“사, 살려주세요, 행보관님……!”

“요? 누가 요 자를 쓰라고 했지?”

군대 말투를 잊을 만큼 당황스러웠다.

행동에 제약이 걸린 것도 모자라 금기시되는 짓을 하게 되면 반작용으로 어마어마한 육체적 고통이 가해졌다.

필두가 자신의 몸에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을 직접 듣긴 했었지만…….

필기는 그저 행동 정지로 끝이 났었다.

그러나 험담을 직접 ‘말’로 한다는 건 엄청난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내 말을 좀 믿겠나?”

“크윽……!”

이제 필두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의욕조차 사라졌다.

그의 말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진실이고…… 현실이다!

도혁이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필두의 입가에는 더더욱 짙은 미소가 새겨졌다.

악인으로서의 본능이 오랜만에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왜 그러냐. 내 부하 1호로 삼아준다는데 영광으로 알아야지. 좀 더 기쁜 표정을 지어봐라.”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 게 살아 있는 것보다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굴릴 생각이다.”

“…….”

“선택해라.”

부하가 되거나, 아니면 끝까지 관심병사인 척하면서 그에게 반항하거나.

이지선다의 선택지.

그러나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전도혁.

그러면서 동시에 거수경계를 시전했다.

“최선을 다해 행보관님을 받들겠습니다아!!”

그가 선택한 모범 답안은…….

살기 위한 충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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