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5화
제2장. 악인이 되어 돌아오다(2)
멧돼지라는 생명체가 무엇인지 드리무어도 잘 알고 있었다.
퇴원을 한 이후에도 집에 있는 데스크톱을 통해 주기적으로 계속해서 이곳 세계가 어떤 곳인지 파악했다.
이를 위해 온라인 세계를 영접하는 행동을 습관처럼 들이고 있었기에 이제 웬만한 것들은 현지인 마냥 다 꿰차게 되었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멧돼지라…… 몬스터의 일종이라도 되는 건가.’
나무기둥으로 상당히 견고하게 만들어진 측각기 계단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파괴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괴력을 지니고 있는 생물체로 파악이 되었다.
“…….”
한쪽 무릎을 굽혀 계단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하는 드리무어.
건축쪽에 일가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빠른 이해력이라면 금세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해야 할지 구상할 수 있었다.
이윽고 부러진 나뭇조각 하나를 먼발치에 던지면서 병사들에게 외쳤다.
“곧장 작업 들어간다.”
“저, 정말입니까?”
“행보관님…… 저희 산 올라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조, 조금만…… 쉬면 안 되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들도 전도혁처럼 의도적으로 앓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안색을 보아하니 진심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본보기로 한 명을 참수시켜 ‘지금 당장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군기를 세우고 싶었으나.
이 세계는 살인이라는 문제를 상당히 민감하게 다루고 있었다.
레디너스 대륙에도 물론 살인죄가 있긴 했다.
하나,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라든지 전쟁 등이 빈번하게 발생했기에 이 세계와는 다르게 살인이라는 죄책감이 덜하긴 했다.
게다가 드리무어는 선인이 아닌 악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 있는 15명을 손가락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전부 죽일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차후의 일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곳 세계의 현행법에 따른 처벌도 문제지만, 마법을 사용해 사람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 세간에 널리 퍼지게 할 순 없었다.
레디너스 대륙에서 이 세계까지 온 추격대에게 자신의 소재지에 관한 힌트를 주는 격이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한다.
“……알았다. 정확히 딱 5분만 쉬도록 한다.”
“5분은 좀…….”
너무 짧은 거 아니냐는 눈빛을 보내오는 병사들.
그러나 더 이상의 타협은 없었다.
“3분으로 줄일까?”
“5분 휴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병사들이 곧장 자리에 앉아 수통으로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너무나도 많은 체력을 허비한 탓에 말이 오가거나 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르게 필두는 전혀 흐트러짐 없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잠시 정신을 집중하면서 마나를 골고루 넓게 퍼뜨려 놓는다.
이윽고 머지않아 미간을 살짝 찡그린 필두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아직 완벽하게 힘을 회복하려면 좀 멀었군…….’
그가 마음만 먹으면 국경까지도 마나를 얇게 펴 널리 퍼뜨릴 수도 있었다.
하나 지금은 고작해야 반경 100여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때와 지금 이 세계에 있는 마나의 파장과 흐름이 달라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시공의 균열을 넘기 전보다 훨씬 더 마법력이 약해져 있었다.
‘난감하군. 만약 여기서 이대로 추격대와 조우하게 된다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일 게야.’
그래도 드리무어의 육신이 아닌 강필두란 남자의 육신을 차지하게 된 걸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어찌 되었든 다시 한번 마나를 거둬들인 뒤.
강필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병사들을 재촉했다.
“5분 지났다. 슬슬 일어나도록.”
* * *
작업은 말 그대로 빡셈 그 자체였다.
쉬는 시간은 단 5분. 그 이상의 휴식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채 병사들에게 노동만을 강요했다.
덕분에 병사들은 초주검이 되어 산에서 내려갈 준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필두의 재촉거림 탓이었을까.
3~4일은 소요될 작업량이 단 하루 만에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게다가 필두의 작업 지시도 평소와 다르게 체계적이었다.
본래 강필두란 남자는 이렇게까지 능력 있는 행보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퇴원 이후 병사들 앞에 나타난 행보관 강필두는 어리숙하고 착하기만 하던 예전의 강필두와 완전 딴판이 되어 있었다.
“보면 볼수록 희한하단 말이야.”
“……그러게.”
병사들끼리 속으로 바뀌어버린 필두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후.
“내려갈 준비 다 끝났냐.”
“예, 예!”
“그럼 서두르자.”
필두의 뒤를 따라 터벅터벅 힘없이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하는 병사들.
어느 하나 발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는 이가 없었다.
덕분에 약간 더딘 복귀 행군을 유지하고 있을 무렵.
뿌드득!
갑자기 어디선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낌새를 눈치챈 필두가 걸음을 정지했다.
“이건…….”
좋지 않은 예감이 흘렀다.
점점 해가 저무는 와중에 제1포대 인원들 이외의 존재가 산길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낌새가 느껴졌다.
‘추격대인가.’
낭패다.
벌써 추격대가 여기까지 따라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혹여나 방금 전, 필두가 마나를 널리 퍼뜨렸던 흐름을 감지하고 이곳에 왔을지도 몰랐다.
여러 가지 가설들이 실타래처럼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킬 무렵.
병사 중 한 명이 난데없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메, 멧돼지다!”
“뭐어?”
놀란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에는…….
쿵쿵!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진동을 뽐내며 다가오는 멧돼지.
한 동물이 선사하는 위압감이 엄청났다.
“으, 으아아아악!”
“해해해행보관님! 메, 멧돼지가……!”
병사들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필두는 오히려 안심했다는 듯한 눈빛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시끄럽게 쫑알쫑알 대지 말고 산길로 뛰어내려가라. 저놈은 내가 쫓을 테니까.”
“그, 그렇지만 행보관님! 위험합니다!”
“입 다물고 내려가라고 했다. 더 이상 입 아프게 같은 말 반복시키지 마라.”
“…….”
지금은 멧돼지를 쫓아낼 수 있는 수단 같은 건 없다.
하다못해 공포탄이 장전된 K-2라도 있었으면 멧돼지에게 위협 사격을 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총조차 없는데 어떻게 멧돼지를 혼자서 마크하겠다는 건가.
그러나 필두의 강압적인 말에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산길을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병사들의 무리 속에서 같이 산길을 타고 뛰어가던 전도혁이 속으로 웃음을 토해냈다.
‘멍청한 행보관 녀석, 저놈 때문에 멧돼지까지 만나게 되고…… 오늘 일진 더럽게 안 좋네! 쳇!’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든 게 아직도 악감정으로 남은 모양인지 필두를 욕하면서 걸음아 나 살려라 하는 식으로 냅다 튀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갈 시점에서 필두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본래 실력 좀 발휘할 수 있게 되었구먼.”
병사들이 있으면 오히려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방해 요소로밖에 작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두는 일부러 겁을 줘 병사들부터 먼저 도망치게 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
“이계에서 해보는 사냥의 맛은 어떤지 한번 체험해 볼까.”
필두의 양손에 마나 덩어리들이 급격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 * *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9090대대 제1포대.
그러나 머지않아 이런 평화의 나날도 병사들의 웅성거림에 의해 금방 깨지게 되었다.
“저, 전포대장님!”
막사를 향해 뛰어오는 다수의 병력.
때마침 행정반에서 출장 나간 포대장을 대신해 끝나지 않는 부대 관련 사무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전포대장이 짜증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무슨 일인데 이리도 호들갑이냐! ……가만, 너희는…….”
강필두와 같이 측각기 계단을 보수하기 위해 산에 올라간 인원들임을 파악한 전포대장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병사들 15명이 오와 열을 맞춰 행보관의 인솔로 복귀한 게 아니었다.
뭔가 다급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모양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게다가.
행보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전포대장이 15명의 인원 중 한 명이기도 한 김조항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냐. 행보관님은 또 어디 가셨고?”
“그, 그게……!”
숨을 헐떡이던 김조항이 다급하게 호흡을 몰아 내쉰 뒤.
빠르게 상황 보고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복귀하던 도중에…… 메, 멧돼지와 마주쳐서 도망오게 되었습니다……!”
“멧돼지라고? 아니…… 그런데 왜 너희만 온 거냐! 행보관님은?”
“저, 저희보고 먼저 도망치라 하고 혼자 남으신…….”
“이런 미친……!”
전포대장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강필두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입원을 한 뒤, 오늘 겨우 부대에 복귀를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사들을 위해 혼자서 남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전포대장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당직!”
“상병 신오수!”
“지금 당장 방송 때려서 간부들 전부 다 집합하라고 해! 서둘러!”
“예,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다.
만약 조항의 말이 사실이라면…….
“행보관님을 구해야 한다……!”
* * *
난데없이 등장한 멧돼지
인터넷을 통해 사진을 봤던 게 전부였지만, 확실히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크릉, 크르릉…….”
소형차와 맞먹는 엄청난 덩치를 지닌 멧돼지가 콧김을 거칠게 뿜어냈다.
분명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외형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에 한정되는 이야기일 뿐.
지금의 강필두에겐 그저 무식하게 덩치만 큰 사냥감에 불과했다.
“어디 보자.”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하는 강필두.
그가 제아무리 본래의 힘을 되찾지 못했다고 한들, 몬스터도 아닌 일반 들짐승에 불과한 멧돼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은 지니고 있었다.
“시간도 촉박하니까…… 슬슬 가볼까!”
파바박!
지면을 박차며 먼저 선공을 가하기 위해 움직이는 필두.
그의 빠른 움직임은 상대방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지만, 멧돼지도 자신의 영역에 낯선 인간들의 출입을 허락한 덕분에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필두를 향해 육중한 덩치를 밀어붙여 왔다.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친 필두가 그대로 공중으로 도약했다.
펑!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족히 5미터 이상의 높이까지 수직으로 상승한 후.
“그래비티(Gravity).”
짧은 시동어와 함께 필두의 몸이 매섭게 내려꽂혔다.
목표로 삼은 곳은 바로…….
멧돼지의 등!
퍼어어억!
“꽤애애애액!”
두터운 살집을 뚫고 전해지는 엄청난 통증.
멧돼지의 입에서 절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읏차.”
멧돼지의 등을 전투화 밑바닥으로 사정없이 짓밟아준 뒤 다시 지면에 안착했다.
그와 동시에 필두의 입가에 마치 초승달처럼 섬뜩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 감촉…… 실로 오랜만이군.”
레디너스 대륙에 있을 당시, 세간에 희대의 악인이라 욕을 먹으며 많은 사람과 목숨을 건 전투를 해왔던 드리무어 아닌가.
비록 대상이 동물이긴 하지만, 살아 있는 존재에게 살의를 담아 일격을 가했다.
그 기분을 오랜만에 느낀 덕분인지 필두의 입에서 환희에 찬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타아앙!
한 발의 총성.
더불어 미세하게 퍼지는 화약의 냄새에 멧돼지가 비틀거리면서 산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쳇. 너무 일찍 왔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필두의 귓가에 전포대장을 비롯해 제1포대 인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행보관님!”
“아…… 네.”
“다행입니다. 일단 멧돼지가 보이자마자 공포탄을 쏘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화약 냄새를 맡고 도망간 모양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전포대장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그러나.
필두의 입장에선 전혀 다행스럽지 않았다.
모처럼 스트레스 풀이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 기회가 날아가 버렸으니 필두의 기분이 좋겠는가.
‘나중에 몰래 멧돼지 사냥이라도 하러 나가야겠군.’
훗날을 기약해 보는 필두의 시선은 여전히 멧돼지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 * *
저녁 식사 집합 전.
간부들은 아직도 행보관의 상태가 걱정인 모양인지 그를 행정반에 잡아두고서 연이어 괜찮냐는 식의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는 와중에 병사들 사이에서도 오늘 있었던 필두의 행동에 대해 놀라움과 더불어 이상함을 느끼는 대화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행보관님 말이다…… 예전보다 뭔가 확 달라진 것 같은 그런 느낌 안 드냐?”
하나포 분대장, 소진언의 물음에 김조항이 공감대를 형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작업할 때에도 장난 아니었습니다. 평소의 행보관님이라면 작업 한 40분 하고 20분 쉬고, 추진도 하고…… 이러셨을 텐데 오늘은 완전 달랐지 말입니다.”
“어떻게 달랐길래?”
“쉬는 시간은 5분으로 고정하고, 그 이외에는 전부 작업, 작업, 작업…… 어휴. 지옥이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음,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FM보다는 AM을 많이 강조하던 강필두와 뭔가 달랐다.
소진언과 김조항,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작업 시간도 그렇지만, 병사들을 먼저 도망치게 하고 나 홀로 멧돼지와 마주한 것도 강필두답지 않았다.
막사 내에서 그렇게 병사들의 잡담이 오고갈 무렵.
“…….”
조심스럽게 종이와 펜을 꺼내 든 전도혁의 입가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어려 있었다.
‘행보관이고 나발이고…… 오늘 나를 괴롭힌 대가, 철저하게 치르게 해주마!’
때마침 내일은 대대장이 직접 제1포대를 방문해 마음의 편지함을 열어보는 날이기도 했다.
이 기회를 틈타 오늘 저녁, 행보관의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쪽지를 적어 마음의 편지함에 넣어두면…….
분명 강필두에게 복수의 펀치를 날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펜을 꺼내든 전도혁이었으나.
“……!”
그의 계획은 머지않아 어떠한 장치 때문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글이…… 써지지 않아……?’
펜을 끼적이고 싶어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몸이 글씨를 쓰는 일 자체를 거부하는 듯했다.
난생처음 맛보는 기이한 현상 탓일까.
전도혁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