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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164화 (외전 완결) (164/164)

외전 6화

비련(悲戀)

마교 교주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합은 어느덧 3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허억. 허억…….”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위광은 거친 숨을 내쉬며 밤길을 달렸다.

그는 3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다른 후보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학성과 주환의 소식을 들은 후보들이 그를 우선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2개월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채로 싸우면 괴물이라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근처에 다른 놈이 있을 것이다. 몸을 피할 장소를 찾아야 해.’

반 시진 전, 마지막으로 전투를 치르며 내상을 심하게 입었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1개월 정도는 한 곳에 머무르며 치료에 집중해야 했다.

문제는,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광은 걸음을 멈추고 피를 토했다.

더는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 쉴 곳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바닥에 쓰러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 그곳에 커다란 기루가 있었다.

명월루라는 이름의 기루였다.

‘기루라. 당장 몸을 숨기기에 적당해 보이는군.’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위광은 비틀거리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빈 창고로 들어온 그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일단 팔다리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방으로 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아보자.’

눈을 감자 수마(睡魔)가 밀려들었다.

‘마지막으로 잤던 게 나흘 전이었던가. 모르겠다. 너무 졸리다.’

위광은 결국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번쩍 떴다.

창고 문이 반쯤 열리고 그 사이로 한 인영(人影)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위광은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싸울 자세를 취했다.

창고 안으로 들어온 건 한 여인이었다.

위광은 그녀를 본 순간 숨을 멈추었다.

아름답다. 그런 생각이 저도 모르게 떠올랐다.

여인은 한 폭의 그림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온 듯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에 짙은 화장으로 보아 이곳 기루에서 일하는 기녀인 듯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겠지. 일단 지풍으로 수혈을 짚어 잠재운 다음 이곳을 떠나자.’

잠시 위광을 쳐다보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이었다. 당황한 위광이 말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돕겠다는 것이냐?”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누군지는 관심 없습니다. 제 눈에는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당장 사람을 부를까요?”

“자, 잠깐 기다려!”

위광은 고민했다. 처음 보는 이 여인을 믿어도 되는 걸까?

여인은 위광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 모습이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수인(囚人)처럼 보였다.

위광은 여인의 두 눈동자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적어도 거짓을 말하는 눈빛은 아니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몸을 숨길 곳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 약초와 붕대도.”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위광을 일단 여인이 준비해 둔 목욕물로 몸을 씻었다.

그 다음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오자,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배가 고팠던 위광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음식은 매우 맛있었다. 위광이 감탄하며 물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음식이지? 정말 끝내주는군.”

“우육면입니다.”

“한 그릇. 아니, 세 그릇만 더 부탁하지.”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우육면으로 배를 채운 위광은 침상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여인이 붕대를 갈아 주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위광이 말했다.

“인사가 늦었군. 도와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내 이름은 위광이다.”

“희(熙)라고 합니다.”

“마땅히 답례를 해야 하나, 지금 내게는 돈이 없다.”

“보상을 바라고 당신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대신, 네가 필요로 할 때 내 무력을 한 번 빌려주겠다.”

위광은 내상을 치료하는 동안 희의 방에 머무르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대는 여인치고는 식견이 풍부하고 재주도 많은데, 왜 기녀를 선택한 거지?”

“저는 원래 평범한 집안의 딸이었는데 아버지가 도박에 미쳐 재산을 거덜 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집을 떠나고 저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해 기루로 팔려 온 것이지요. 말이 잘 통하는 기녀는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학문과 재주를 익혔습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이곳을 나갈 겁니다.”

말하는 희를, 위광이 가만히 응시했다.

‘연약해 보이지만 강하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해야 하나.’

위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처음 보는 부류의 여인이군.”

“공자도 제가 처음 보는 부류의 사내입니다.”

위광이 물었다.

“무슨 뜻이지?”

“공자가 제 방에 머무른 지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으셨지요.”

“그런데?”

“저를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는 사내는 처음 봤습니다.”

물론 희의 미모는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원한다면 강제로 취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은인이 아니었다면, 욕망을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위광은 짐짓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난 자기 욕구 하나 절제하지 못하는 짐승 같은 부류가 아니다.”

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순간 방이 밝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얼굴이 붉어진 위광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밤은 술이 마시고 싶은데, 함께하겠나? 다른 뜻은 없으니 오해 말고.”

희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돈을 벌어야 해서요.”

“상대해야 할 손님이 있나?”

회는 품에서 화투패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아니요. 이걸로 돈을 벌 생각입니다.”

“도박이라. 가진 재주 중에 도박도 포함되어 있던 건가?”

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 명월루에서 가장 유명한 박도(博徒:노름꾼)가 바로 접니다.”

위광은 희를 따라 명월루 내 위치한 도박장으로 향했다.

그날 희는 원금의 3배나 되는 돈을 쓸어 담았다.

방으로 돌아온 위광은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말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런 기세면 금방 부자가 되겠어.”

“시간 나면 기술을 가르쳐 드리지요.”

위광과 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과 같이 보내는 시간들이.

***

명월루에 몸을 숨긴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내상 회복을 마친 위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은 후보 놈들아. 각오하고 있어라. 이제 내가 네놈들을 사냥할 차례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위광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이곳을 떠나면 그 여인을, 희를 떠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미소와 다정한 눈빛을 영원히 볼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마구 욱신거렸다.

아무래도 희의 존재가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듯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기녀 한 명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연(演)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희의 부탁을 받고 위광의 약 심부름을 하던 여인이었다.

“무슨 일이냐? 희는?”

위광의 물음에, 연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언니가……. 희 언니가 위험해요!”

“뭐라고?”

“손님이 언니에게 밤시중을 들라고……. 언니가 거절하니 갑자기 뺨을 때리더니…….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제발 언니를 살려 주세요!”

쾅! 문을 박차고 나선 그는 이를 악물고 연이 알려준 방으로 달려갔다.

‘희! 조금만 기다려라!’

퍽! 퍽! 방 안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취한 듯 보이는 귀공자가 쓰러진 희를 발로 짓밟고 있었다.

“이 천한 계집이 감히! 나를 거절해? 그 건방진 태도를 오늘 제대로 고쳐 주마!”

귀공자는 평소 장식용으로 들고 다녔던 검을 빼들었다. 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련은 없다. 기루에 팔려 온 순간부터 이런 죽음은 각오한 것이니까. 다만 한 가지……. 그 사람에게 전해 줄 말이 있었는데, 전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귀공자가 희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바람처럼 날아온 위광이 그의 목을 붙잡았다.

“네놈은 또 뭐냐! 내가 누군 줄 알고! 이거 놓지 못해?”

“시끄럽다. 벌레 자식아.”

콰득! 그대로 힘을 주자, 귀공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를 바닥에 내던진 위광이 쓰러진 희를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서, 희는 눈을 떴다.

“……위광?”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희를 내려다보며, 위광이 나직이 말했다.

“나와 같이 가자. 희.”

***

5개월 만에 모든 후보를 처리하는 데 성공한 위광은 희를 데리고 당당히 천산으로 복귀했다.

천일강은 매우 흡족해하며 위광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내 뒤를 이어 교주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너의 재능이라면 천하를 일통하는 것도 꿈은 아니겠지.”

“반드시 숙원을 이루겠습니다.”

교주 즉위식이 끝나고 교주 자리에 오른 위광이 희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에게 무공을 가르칠 것이다. 너는 내 호위 무사가 되어 중원 정복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거라.”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희가 말했다.

“공자님. 아니, 교주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하거라. 무엇이든 들어주마.”

“교주님을 따라 새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저에게 새 이름을 내려 주십시오.”

“새 이름이라.”

잠시 생각하던 위광이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럼 앞으로 너를 ‘낭연청(浪燕靑)’으로 부르겠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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