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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160화 (160/164)
  • 외전 2화

    운명의 짝

    황성 전투로부터 14년 후, 화산.

    찬야는 풍광이 좋은 정자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슬슬 불혹을 바라보는 그였지만 잘생긴 외모는 여전했다.

    꾸준한 수련 덕분에 경지는 더 높아졌고, 마침내 화경의 경지에 들어섰다.

    그리고 2년 전, ‘검존(劍尊)’이라는 칭호와 함께 남북 십성의 한 자리에 올랐다.

    사람들은 자유로이 강호를 떠돌며 협행을 하는 그를 가리켜 ‘방랑검존(放浪劍尊)’이라 부르기도 했다.

    “드르렁. 드르렁. 푸우. 푸우.”

    그가 신나게 코를 골며 낮잠을 자는 그때.

    다다다-.

    화산파 도복을 입은 소녀 한 명이 달려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귀여운 외모의 소녀였다.

    “백부! 어서 일어나요, 어서!”

    눈을 뜬 찬야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미소를 지었다.

    “서향(曙香)이 왔구나. 무슨 일이야?”

    남서향. 남량과 유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올해 열 살이었다.

    서향은 일곱 살 되던 해부터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무공에 빠진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했다.

    열 살이 되자, 화산을 나가 강호 무림을 경험하고 싶은 듯했다.

    정자 난간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서향이 찬야에게 말했다.

    “내일 떠나신다면서요? 저도 백부를 따라 강호로 나가고 싶어요.”

    “전병 먹을래?”

    찬야는 웃으며 전병 하나를 내밀었다. 서향은 주먹을 쥐고 찬야를 노려보았다.

    “말 돌리지 말고요! 이번 협행에 저도 데려가 주세요!”

    “강호를 경험하기에 넌 너무 어려. 나중에 더 크면…….”

    “안 데려가 주면 백부가 침실에 숨겨 둔 춘궁도 다 불태울 거야!”

    “으악! 그러지 마! 그게 얼마나 귀중한 건데! 그보다 내 방 뒤졌어?”

    찬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먼저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고 와. 그럼 생각해 볼게.”

    “칫! 이번에도 허락 안 해 주실 거 알면서 하는 말이죠?”

    서향은 입술을 삐죽였다. 화내는 모습도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찬야는 서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은 말로 달랬다.

    “그야 네가 다칠까 봐 그러지. 너무 미워하지 마.”

    “제가 다친다구요? 남북 십성인 백부가 곁에 있는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이 백부는 죽은 목숨이야.”

    찬야는 상상만 해도 오한이 드는지 몸을 벌벌 떨었다.

    “히잉…….”

    실망한 서향은 울상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찬야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오는 길에 선물 사 올게. 기분 풀어.”

    “그럼 가기 전에 옛날 얘기나 실컷 해 줘요.”

    “그래.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백부가 만난 여자들 이야기?”

    “……그건 조금 더 크면 듣자. 오늘은 무림대회 이야기를 해 줄게.”

    서향은 전병을 우물거리며 찬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날 밤, 찬야는 도관을 나서다 서향과 마주쳤다.

    그녀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채였다.

    찬야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서향아.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

    “헤헤.”

    서향은 변명하는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 녀석이 정말. 이러다 남 사제나 유라한테 걸리면 큰일이라고.’

    머리를 긁적인 찬야는 잠시 서향을 바라보다 물었다.

    “돌아오면 분명 혼날 텐데. 그래도 가고 싶어?”

    서향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찬야는 헛웃음을 흘렸다.

    서향이 강호에 나가고 싶어 하는 데는, 따지고 보면 그의 잘못도 있었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나이인 서향에게, 동료들과의 모험 이야기를 꾸준히 들려줬다.

    매화검투부터 시작해 무림맹으로 가 여러 임무를 수행하고 마교의 적들과 싸웠던 일들을.

    그 이야기는 어린 서향에게 무림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생각해 보니 내 잘못이네. 내 잘못이야.’

    찬야는 문득 어릴 적 일을 떠올렸다.

    남량, 운휘와 함께 지하미궁을 탐험하던 그때를.

    무모한 건 아버지나 딸이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목숨 걸고 조카 소원 들어주는 백부는 나밖에 없을 거야.”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서향이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백부 최고! 운휘 숙부랑 위지혁 백부보다 찬야 백부가 더 좋아요!”

    “그건 그나마 위로가 된다. 흐흐.”

    씨익 웃은 찬야가 말했다.

    “그럼 가자. 이 잘생긴 백부가 너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 줄게.”

    “좋아요!”

    두 사람은 은밀히 화산을 빠져나갔다.

    ***

    찬야와 서향이 도착한 곳은 섬서의 ‘안원현’이라는 마을이었다.

    협행을 의뢰한 사람은 안원현의 현감인 송운(宋運)이라는 사내였다.

    찬야와 서향을 접객실로 안내한 그는 ‘흑귀단(黑鬼團)’이라는 도적 집단에 대해 말했다.

    “놈들이 안원현에 나타난 지는 보름 정도 되었습니다. 첫날 집 다섯 군데가 수탈당하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스무 명이나 죽임당했습니다. 다음 날, 두목이라는 자가 현청에 서신 하나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매달 상납금을 바치지 않으면 이곳의 백성들을 몰살하겠다는 협박이 적혀 있더군요. 저는 관병들을 보내 토벌을 시도했지만 격퇴당하고 말았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찬야가 물었다.

    “섬서성 도지휘사에게 도움을 청해 보셨습니까?”

    “저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닙니다만…….”

    송운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그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던 겁니다. 서신에 이런 말도 적혀 있더군요. 관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는 즉시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도망칠 것이라고.”

    “그랬군요.”

    송운은 찬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 도사님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고수라고 들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찬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을 몰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럼 도사님만 믿겠습니다.”

    서향이 찬야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백부. 저도…….”

    “안 돼.”

    찬야가 일축하자 서향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 말했다.

    “현감 어르신. 무림맹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찬야가 송운에게 물었다.

    “저 말고도 협행을 의뢰한 사람이 있습니까?”

    송원은 고개를 저었다.

    “의뢰를 요청하는 과정에 실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송원은 일단 손님을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지시했다.

    이내 문이 열리며 무복을 입은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송원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무림맹에서 왔습니다. 연랑(聯浪)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아, 선객이 있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찬야와 눈을 마주치고 표정이 굳어졌다.

    “아…….”

    여인을 바라보는 찬야의 표정 역시, 경직되어 있었다.

    “연랑.”

    “찬야.”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접객실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

    접객실을 나온 찬야와 서향은 송원이 마련해 준 객실로 향했다.

    서향은 찬야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찬야 백부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어.’

    서향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영특하며 특히 눈치가 빨랐다.

    ‘분명 그 언니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호기심이 발동한 서향은 찬야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백부. 저 잠시 측간 좀.”

    “혼자 갈 수 있겠어? 같이 갈까?”

    “백부도 참.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다녀올게요!”

    서향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 접객실 앞으로 도착했다.

    ‘오! 마침 나온다.’

    서향은 조용히 연랑의 옆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너는…….”

    당황한 표정을 짓던 연랑이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 나는 연랑이라고 해. 그 도복은…… 화산파니?”

    “네. 저는 남서향이라고 해요. 백부님을 따라 협행을 왔어요.”

    “어린 나이에 대단하구나. 찬야……. 같이 온 그 사람이 네 백부야?”

    “네. 저희 백부랑 어떤 사이예요?”

    서향이 대뜸 질문했다. 어린아이라 돌려 말하는 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그냥 조금……. 아는 사이야.”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알고 싶어요. 알려 주세요!”

    서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연랑이 서향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네 방으로 가면서 이야기해 줄게.”

    복도를 걸으며, 연랑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오래전이었지. 아주 어릴 때였어. 후기지수들과 함께 협행을 나간 곳에서 그를 만났고, 좋아했어.”

    연랑은 씁쓸한 웃음을 뱉었다.

    “그가 내게 적극적으로 다가오길래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굴더라고.”

    “그래서 포기했어요?”

    “태어나서 처음 좋아한 사람이었거든. 화가 나더라. 그래서 말도 없이 떠나 버렸어.”

    “그럼 이제 안 좋아해요?”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으니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방 앞에 도착했다. 연랑은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멀어졌다.

    서향은 연랑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아직 좋아하는 거 같은데. 백부도 아마 같은 마음일 거야. 똑같은 표정을 지었으니까.”

    서향이 보기에, 찬야는 어딘가 늘 외로워 보였다.

    어쩌면 그 외로움을 잊게 만들 사람이 저 사람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참 머리를 쥐고 고민하던 서향이 눈을 크게 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다음 날 아침, 흑귀단의 본거지로 쳐들어간 찬야는 아주 박살을 내 버렸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그에게, 고작 도적 집단 하나를 쓸어버리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두목이라는 자는 무공을 폐한 다음, 현청에 넘겼다.

    간단히 일을 처리한 찬야가 송운의 배웅을 받으며 현청을 나가는 때였다.

    “찬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랑이 그를 불렀다.

    찬야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서향이가 여기서 잠시 기다리라고 해서…….”

    찬야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안 변했네. 생각보다.”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응. 너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니까.”

    찬야는 담담히 고백했다. 연랑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날 좋아했다고?”

    “그래.”

    “거짓말. 너는…….”

    “그땐 나도 어렸어. 널 좋아하는데, 그걸 티 내기 싫었던 거지.”

    찬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말없이 떠난 그날, 나 엄청 울었어. ‘그때 고백할걸…….’ 이러면서 엄청 후회했어.”

    “…….”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곁에…….”

    “곁에 남자가 있냐고?”

    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없어.”

    “정말?”

    “왜 좋아해? 남자가 없다고 네 고백을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해?”

    “노력할게.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다른 여자에게 눈길 돌리는 일, 다시는 없어.”

    “너 같은 호색한이 잘도 그러겠다.”

    “진짜야. 믿기 어렵겠지만.”

    말하는 찬야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연랑. 너를 연모해.”

    연랑이 대답했다.

    “고백이 너무 늦었지만 받아 줄게.”

    서향은 멀리서 당과를 먹으며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백부. 정말 축하해요.’

    그녀의 첫 강호 나들이는 제법 만족스럽게 끝난 듯했다.

    화산으로 돌아온 후.

    “나나나나나, 남 사제! 제발 살려 줘! 내가 잘못했어!”

    “내 딸을 데리고 몰래 사라지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찬야는 분노한 남량을 피해 달아나며 소리쳤다.

    “서, 서향아! 이 백부 좀 살려 다오!”

    “아, 수련하러 갈 시간이네.”

    “이 배신자!”

    끄아악-. 찬야의 비명 소리가 평화로운 화산에 울려 퍼졌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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