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황성 전투(5)
황성. 승건궁(承乾宮).
무림인들을 이끌고 그곳을 지나가던 유선이, 걸음을 멈추었다.
강력한 마기(魔氣)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아 들자, 뒤따르던 청랑이 말했다.
“스승님? 갑자기 왜…….”
“적이다.”
저벅저벅.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비단옷에 장신구를 걸친 여인이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홍옥 같은 두 눈이 요사스럽게 번득였다.
여인을 본 순간, 무림인들 중 대다수가 같은 생각을 했다.
‘아름답다.’
한순간 전장인 것조차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력이 약한 자들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반면, 유선의 표정에는 일절 변화가 없었다. 그가 차갑게 물었다.
“누구냐. 복마십군의 일원인가?”
여인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 용제 유선. 우리 초면이지? 나는 복마십군의 화군(花君) 비요(悲謠)라고 한다. 듣던 대로 아주 미남이군.”
내력을 끌어올린 유선이 비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청랑에게 말했다.
“내가 적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무림인들과 함께 황궁으로 가거라.”
“…….”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유선이 고개를 돌린 순간, 청랑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엇?”
당황한 유선이 검을 들어 청랑의 공격을 막아 냈다.
“랑아! 이게 무슨 짓이냐!”
소리친 유선은 청랑의 두 눈을 확인하고 흠칫했다.
‘초점이 없다? 조종당하고 있구나!’
이를 악문 유선이 청랑의 가슴팍에 장력을 날렸다. 퍼억!
청랑은 입에서 피를 뿜으며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이번에는 무림인들이 일제히 유선을 향해 달려들어 검을 내질렀다.
터엉-! 유선은 내력을 방출해 달려드는 무림인들을 밀어냈다.
고개를 돌린 그가 비요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아름다운 여인을 따르는 것. 그게 남자란 족속 아닌가? 후후.”
“환술을 걸었군.”
“환술? 아니지. 이건 그런 잔재주가 아니야.”
비요는 짐짓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내가 지월 님에게 받은 권능은 ‘색욕(色慾)의 권능’이다. 상대가 내게 가진 음심(淫心)을 증폭시킨 뒤, 내 충실한 수하로 만드는 능력이지. 덕이 높은 고승이라고 해도 내 미혹(迷惑)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그건 당신 역시 마찬가지야.”
유선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 비록 수양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그따위 능력에 당하지는 않는다.”
“자신만만한데? 참고로 지금 발현한 힘은 권능의 3할 정도야. 최대치를 끌어올려도 당신이 버틸 수 있을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파팟! 비요에게 쇄도하던 유선이 멈칫했다.
‘크윽. 이건…….’
비요가 가진 ‘색욕의 권능’은, 생각보다 더 강력한 능력이었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고, 음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당장 검을 내리고 달려가 비요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유선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그것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3할의 능력만으로 어지간한 초절정의 고수마저 비요의 수하가 된 것을 보았을 때, 가히 초인적인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호라. 제법인데? 이거 자존심이 상하는군.”
비요가 상의를 풀자, 속살이 드러났다. 유선의 눈이 커졌다.
“지금 네 머릿속은 나를 덮치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할 테지. 어때? 날 안아 보고 싶지 않아? 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지는 않고? 목덜미에 코를 박고 살냄새를 맡고 싶겠지? 매끄러운 피부를 만져 보고 싶을 거야. 자신의 욕망을 참지 마.”
몸을 날린 유선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나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채앵! 수도(手刀)를 세워 검을 막은 비요가 나직이 감탄했다.
“과연 남북 십성인가. 내 권능을 버텨 내고 또 공격까지 하다니, 솔직히 놀라워. 그런데……. 검격이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쇄애액! 비요는 벼락같은 속도로 손을 뻗어 장력을 내쏘았다.
유선은 기합을 내지르며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쩌엉! 간신히 공격을 막은 유선이 신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우우웅! 내력을 끌어올린 비요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네 심장을 찔러 주지.”
유선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남은 방법을 사용해야겠군.’
생각을 마친 유선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청운적하검 오의-. 만조유영구천(萬鳥遊泳九天).”
비요가 비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겨우 생각해 낸 방법이 그거야? 어차피 소용없는 짓…….”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무림인들의 손에서 떠나 허공으로 떠오른 수백 자루의 검 때문이었다.
‘저건, 이기어검(以氣馭劍)?’
유선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것이 내 전력이다. 어디 막아 보거라.”
다음 순간, 허공에 뜬 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에서 날아왔다.
“치잇!”
비요는 혀를 차며 날아드는 검을 쳐 내거나 피했다. 그러나 점점 피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지금이다!’
유선은 정신을 집중해 검을 쏘아 보냈다.
푹! 푸욱! 네 자루의 검이 비요의 사지를 관통했다.
곧이어 일곱 자루의 검이 그녀의 전신을 베고 지나갔다.
후두둑-. 잘려 나간 그녀의 신체 부위가 바닥에 떨어졌다.
비요가 죽자, 무림인들은 ‘색욕의 권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승님!”
정신을 차린 청랑이 달려왔다. 청운적하검의 오의, ‘만조유영구천’을 푼 유선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힘들구나.”
그때, 마도세계의 문이 열리고 악마들이 이승으로 건너왔다.
유선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물들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세상이……. 멸망하려는 것인가.”
그는 청랑의 도움을 받아 다급히 운공을 시작했다. 괴물들과 싸우기 전, 조금이라도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
황성. 장춘궁(長春宮).
도제 팽인호와 팽자엽 부자(父子)는 복마십군의 광군(狂君), 요위(要衛)와 마주쳤다.
한 자루의 대부(大斧)를 든 요위가 끌끌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남북 십성의 도제라. 베는 맛이 있겠군.”
철컥. 도를 뽑아든 팽인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희는 뒤로 물러나 있거라. 싸움에 방해된다.”
팽자엽은 팽가의 무사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며 생각했다.
‘가주님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놈들이 가진 이능(異能)이 조금 걸리는군. 저자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요위는 자신의 앞에 선 팽인호를 향해 물었다.
“네놈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마. 어디를 베어 죽여 줄까?”
킁, 하고 코웃음을 친 팽인호가 말했다.
“어디든 상관없다. 그 전에 내가 네놈을 죽일 거거든.”
터엉!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린 요위가, 대부를 내리쳤다.
팽인호는 도를 들어 요위의 대부를 막아 냈다. 쩌엉!
“이번에는 내 차례군.”
씨익 웃은 팽인호는 도에 힘을 주며 그대로 요위를 밀어냈다.
‘으윽! 내가 힘에서 밀리다니!’
퍼억! 발로 요위의 가슴팍을 걷어찬 팽인호가 수평으로 도를 휘둘렀다.
쩌엉! 팽인호의 도를 막아 낸 요위는 충격으로 바닥에 넘어졌다.
‘단숨에 머리를 쪼개 주마.’
쇄애액! 팽인호의 도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요위는 정신없이 몸을 일으키며 대부를 휘둘렀다.
퍼억! 요위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파파팟! 팽인호가 거구를 날려 쇄도하는 순간이었다.
쩌엉! 그는 요위가 날린 부강(斧罡)을 막고 주욱 밀려났다.
지켜보던 팽자엽이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가주님이 밀려나셨다?’
잠시 도신(刀身)을 바라보던 팽인호가 요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대부를 어깨에 얹은 요위가 히죽 웃었다.
“이것이 내가 지월 님에게 받은 권능. ‘분노(忿怒)의 권능’이다. 상처를 입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힘이지.”
“그럼 한 번의 일격으로 네놈을 죽이면 되겠구나. 간단하군.”
우우웅! 내력을 끌어올린 팽인호가 오호단문도의 ‘맹호투격(猛虎投擊)’ 초식으로 도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도강(刀罡)이 요위의 정수리 위로 떨어지며 굉음이 울렸다.
먼지가 걷히자, 요위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크으으……. 과연, 무시무시한 위력이군.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구덩이 속에서 몸을 일으킨 요위가 말했다.
“덕분에 나는 더 강해졌다. 팽인호.”
“생각보다 더 튼튼한 놈이었군. 그럼 이건 어떠냐?”
팽인호가 다른 초식을 꺼내 들려는 순간이었다.
쩌엉! 순식간에 접근한 요위가 그의 가슴팍에 권격을 날렸다.
“커억!”
팽인호는 피를 토하며 날아가 내성 벽을 부수고 아래 처박혔다.
조금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속도와 힘이었다.
“으윽.”
팽인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요위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네 말을 그대로 해 줘야겠군. 생각보다 더 튼튼한 놈이었구나. 그럼 더 강하게 공격해 볼까?”
우우웅! 요위가 대부에 기를 집중시키자, 대기가 떨렸다.
그는 자신의 절기인 ‘대력강참(大力强斬)’으로 대부를 휘둘렀다.
쩌어어엉! 폭발이 일어나며 기파(氣波)가 터져 나갔다.
먼지가 걷히자 쓰러진 팽인호가 보였다. 팽자엽과 무인들이 소리쳤다.
“가주님!!!”
그때, 상체를 일으킨 팽인호가 손을 들어 달려오는 그들을 제지했다.
“소란 떨지 마라.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는 팽인호에게, 요위가 다가왔다.
“그 공격을 맞고서도 일어나다니,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군.”
일순, 그는 걸음을 멈추고 팽인호를 응시했다.
팽인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지? 놈에게 이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팽인호는 도를 치켜들고 허리를 낮춘 자세를 취했다.
“오호단문도 오의-. 호왕지체(虎王肢體).”
위험하다. 요위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추하게 발악하지 말고 죽어라.”
요위가 대부를 휘두르는 그때, 팽인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후웅!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요위의 머리 위였다.
쩌억! 팽인호의 도가 요위의 팔 하나를 잘라 냈다. 요위가 비명을 질렀다.
“이 자식!”
부웅! 상처를 입어 더욱 강해진 요위가 한 손으로 대부를 휘둘렀다.
콰아앙! 근처에 있던 궁궐 하나가 비스듬히 잘려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참격을 피한 팽인호가 바닥을 박차고 쇄도했다.
그 순간, 요위는 보았다. 팽인호의 투기가 만들어 낸 환상을.
그건 마치 거대한 호랑이와 같았다.
“크아아아!!!”
팽인호는 괴성을 지르며 도를 내질렀다. 범의 형상을 한 기의 덩어리가 작렬하며 요위의 몸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지켜보던 팽자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것이 바로……. 오호단문도의 오의!’
기뻐하는 것도 잠시, 복마십군보다 더 위험한 것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본 그가 표정을 굳혔다.
팽인호는 마도세계의 악마들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지월 놈이 꾸민 짓인가 보군. 후우……. 차라리 천마 위광이 있었을 때가 좋았다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는 도를 어깨에 얹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자. 저것들 잡으러.”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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