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황제의 부름(2)
황궁 외성 입구에 도착한 남북 십성은 황실 경비대의 안내를 받아 편전(便殿:황제가 거처하는 곳. 또는 정무를 보는 장소)으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선 순간, 수백의 군세(軍勢)가 넓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흑갑(黑鉀)과 창으로 무장한 군사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남북 십성을 노려보았다.
남량은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만한 병력을 굳이 광장에 세워 둔 것은, 우리를 믿지 못하는 황제의 심정을 대변한 것인가.’
내성 문을 넘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궁전이 있었다.
대전에 들어서자 좌우로 대신들이 나열해 있었다.
그리고 대전의 중앙에는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가 있었다.
남북 십성은 바닥에 엎드리며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잠시 기다리자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자 용포(龍袍)를 입은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내였지만 지존의 위엄이 느껴졌다.
말없이 남북 십성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말했다.
“짐이 그대들을 부른 이유를 짐작하는가?”
남궁천이 모두를 대표해서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소신들이 불민하여 폐하의 뜻을 헤아리지…….”
“짐이 황태자였던 시절, 선황을 통해 무림의 존재를 처음 들었다. 그때는 단순히 임협(任俠)의 무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그 실체를 알고 난 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량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황제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초인적인 힘을 가진 자들이 황실의 통제에서 벗어나 멋대로 조직을 만들고 세력을 키운다? 심지어 황실은 불가침의 조약을 맺어 그것을 방관하고 있더군. 기가 찰 노릇이지.”
젠장.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 것 같다.
황제의 언성이 높아졌다.
“선황께서 무슨 생각으로 무림을 방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은 다르다! 짐은 무림의 세력을 잠재적 위험 요소로 판단하고 있느니라. 그대들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는 무림과 황실의 관계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관계를 다시 세운다 하심은…….”
“무림 세력을 하나로 통합한 다음, 그들을 관리하는 부서를 새로 만들 것이다. 그대들은 오직 짐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고 짐이 허락했을 때만 칼을 휘두를 수 있다.”
남북 십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림을 황실이 통제한다고?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경우, 권력의 개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어.’
‘황제는 예전부터 저런 생각을 했던 것인가. 아니면…….’
남궁천이 다급히 말했다.
“폐하. 소신들은 황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백성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제를 받으면 행동에 제약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백성들을 구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들이 백성을 구하는 데만 전력을 쏟았나? 짐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낙양의 참상을!”
결국 황제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대전 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태화 진인이 조심스레 반박하고 나섰다.
“폐하. 그건……. 사교 무리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그는 단단히 결심한 듯했다.
“짐이 혼자 결정한 사안이 아니다. 조정 회의에서 대신들이 모두 찬성했다. 그대들은 돌아가 황명을 기다리도록 하라.”
이만 물러나라는 소리였다. 허나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가만히 있던 유종학이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들이 상대하는 적은 온갖 사술(邪術)과 모략으로 천하를 위험에 빠뜨리려 하는 간악한 무리입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무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대전으로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아니. 위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문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량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 목소리…….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든 남량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 입을 벌렸다.
검은 무복.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마치 먹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사내가 그곳에 있었다.
흑암제(黑暗帝) 지월(地月).
삼천위의 일원이자 남량의 마지막 복수 대상.
그가 놀랍게도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폐하. 저자가, 저자가 어찌 이곳에…….”
팽인호가 당황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물었다.
“마침 잘 왔군. 소개하지. 앞으로 무림을 관리할 인물이다.”
남북 십성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라고?
유선은 한순간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외쳤다.
“폐하! 저자는 마교의 수장입니다! 안 됩니다!”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는가!”
태감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탄영이 말한 거창한 계획이 이것을 뜻하는 것이었나?’
남량은 이를 악물었다. 지월은 황제의 옆에 서서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남북 십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천은 침착하게 말했다.
“폐하. 사도(邪道)의 무리를 이끌던 자입니다. 헌데 그런 자로 하여금 무림을 관리하게 하시다니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남궁 가주.”
지월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는 더 이상 마교의 교도(敎徒)가 아닙니다.”
황제가 지월의 말을 받았다.
“지월이 한때 사교에 몸담았다는 사실은 짐도 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짐의 수하다.”
“폐하. 저자를 믿으시면 안 됩니다!”
남궁천의 외침에, 황제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만! 지금 믿을 수 없는 건 바로 그대들이야! 지월은 수년간 묵묵히 짐의 수족이 되어 주었다. 그동안 그대들은 짐에게 무엇을 해 주었지?”
그 말을 들은 남량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부터 황제를 이용할 속셈이었나?
지월이 수년간 공을 들여 얻고자 했던 것은 수라의 심장도, 혈마의 돌도 아니었다. 바로-.
‘황제의 힘.’
황제로 하여금 무림을 통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 계획이 성공하여, 황제는 지월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대로 있으면 무림은 지월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차라리 지금 지월을 공격해서 죽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남량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놈을 죽이면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니 반역이다.
반역의 죄는 가장 무겁게 다루는 중죄였다.
자신을 포함한 무림 전체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결국 남량은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손을 쓸 수 없었다.
‘놈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당당하게 나타난 거야.’
손을 쓸 수 없는 건 다른 남북 십성도 마찬가지라, 이만 부득 갈았다.
지월은 황제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저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오랜 시간 적대하던 사이인데, 그 감정이 어찌 하루아침에 풀리겠습니까? 소신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황제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짐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거늘,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비록 아둔하여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하나, 저들도 폐하의 백성입니다. ‘무위이화(無爲而化)’라 하였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스스로 감화되어(我無爲 而民自化) 폐하를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듣고 있던 남북 십성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황제는 마음이 풀렸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속은 참으로 깊구나.”
“황송하옵니다.”
“좋다. 이 일은 그대에게 일임하도록 하지.”
지월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외쳤다.
“소신, 폐하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나이다.”
황제의 흐뭇한 미소를 보니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남북 십성은 굳은 표정으로 편전을 나왔다.
말없이 걷던 도중, 멀리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떨어진 연무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한 명의 청년이 여섯 명의 사내를 상대하고 있었다.
파파파팟! 청년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정확한 동작으로 봉을 내질러 사내들을 쓰러뜨렸다.
지켜보던 남량은 나직이 감탄했다.
‘젊은 나이에 실력이 제법이군.’
그때, 청년과 남량의 눈이 마주쳤다.
남량은 청년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남량을 응시하던 청년이 손짓으로 내관을 불렀다.
“김 내관. 저기 가는 저자들은 누구인가?”
내관은 청년의 몸에 적색 장포를 덮어 주며 대답했다.
“남북 십성이라 불리는 무인들입니다.”
“아! 저자들이 바로 그…….”
청년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한다. 그리고, 황 대장!”
황 대장이라 불린 사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근위대 수 명만 추려라. 당장 황궁을 나갈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황 대장은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전하.”
***
그날 밤, 남북 십성은 북경에서 조금 떨어진 객잔에 모였다.
객잔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초상집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무림인을 군관으로 만들겠다니!”
팽인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나무로 만든 탁자는 주먹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지월이 곁에서 계속 폐하를 부추긴 것이겠지…….”
유종학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황제의 명이 떨어진 이상, 거역하면 역도가 됩니다.”
유선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개방의 거지 한 명이 들어왔다.
“누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침 남량도 기척을 감지했다. 눈을 감은 그가 말했다.
“말 스무 필……. 최소 절정 이상의 기운을 가지고 있군요.”
개방 방주 노학개가 거지에게 말했다.
“일단 데려와라.”
이내 문이 열리며 피풍의를 두르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 들어왔다.
‘자연히 한 명을 보호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군. 가운데 있는 저자가 일행의 머리인가.’
그들을 살피던 남량이 물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어디서 왔지?”
가운데 선 남자가 두건을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잘생긴 외모에 기품이 흐르는 청년이었다.
‘저 청년은 연무장에서 봤던…….’
그때, 청년의 옆에 있던 사내가 버럭 소리쳤다.
“무엄한 놈들 같으니! 어서 예를 갖추지 못할까! 이분은 황태자 전하이시다!”
남량을 비롯한 남북 십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황태자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전하.”
그들은 다급히 청년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네. 고개를 들게.”
남량은 경계의 눈빛으로 물었다.
“헌데 태자 전하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황태자는 남량을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지월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자네들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네.”
“할 말이라 하심은?”
“지월이라는 자에 대해서일세.”
황태자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다들 앉으시게.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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