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무림학관(武林學館)(1)
“이자는 누구지?”
탄영의 물음에, 고개 숙인 노인이 대답했다.
“삼천위의 탄영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인은 모산파(茅山派)에 몸담았던 양옹(楊擁)이라고 합니다.”
“모산파? 그래. 강소성 모산의 문파 말이군. 듣기로 각종 주술에 뛰어났다지? 그런데 무림맹주에 의해 멸문당했다 하지 않았었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윤손이 대신했다.
“모산파는 본래 정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좌도방문(左道傍門)의 술수를 익힌 탓에 사파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척결 대상에 올랐습니다.”
양옹은 분노로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소인은 무림맹주와 정파 무림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여,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탄영 님에게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맡겨 주신다면 백매화를 반드시 처리해 보이겠습니다.”
“흐음.”
잠시 그를 바라보던 탄영이 물었다.
“정말 수라를 봉인할 수 있겠나? 무슨 수로?”
탄영이 흥미를 보이자 양옹이 얼른 대답했다.
“과거 소림의 고승들이 수라를 봉인했을 때, 그들이 사용했던 봉인진이 바로 저희 모산파 선조들이 창안해 낸 진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당시의 진법을 상세히 기록한 진법서 또한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지요.”
탄영이 눈을 번쩍였다.
“진법서를 지금도 가지고 있나?”
윤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법서의 존재는 제가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여기 양옹이 계획대로 수라를 봉인하고 제가 백매화를 상대한다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탄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그녀는 뒤에 시립해 있던 수하에게 물었다.
“백매화의 행적은 파악되었나?”
“이틀 전 호북성 무한(武漢)으로 출발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목적지는 무림학관(武林學館)으로 예상됩니다.”
탄영은 윤손과 양옹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백매화 처리에 대해서는 윤손과 양옹, 두 사람에게 일임하도록 하지. 지금 당장 무림학관으로 가서 놈을 처리하도록. 가능하면 놈의 몸속에 있는 수라의 심장도 가져오고.”
두 사람은 정중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여인의 정체는 바로 검오아 낭연청이었다.
남량에게 패퇴한 이후, 낭연청은 탄영에게 몸을 의탁했다.
효초아가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녀가 자진해서 나서기를 청하자, 궁금해진 탄영이 물었다.
“너는 남량에게 죽을 뻔했는데, 괜찮겠어?”
“그때 당한 수치를, 이번에야말로 씻어 내겠습니다.”
낭연청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던 윤손이 차분히 거들었다.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해 데려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 낭연청. 복수할 기회를 주지. 이번에는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감사합니다. 탄영 님.”
세 명이 방을 나가자, 벽에 기대어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붉은 장포를 걸친, 단정한 외모의 미남자였다.
“그럼 저희는 계획대로 진행하는 겁니까?”
그의 정체는 사흉마의 제1위(位). 도올(檮杌) 사환(史環).
사흉마 중 최강이자 탄영이 가장 신뢰하는 심복이었다.
“그래. 이제 곧 혈마의 힘이 내 것이 된다. 천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힘이 말이야. 바로 그날이 우리가 하늘을 뒤집는 날이 될 거다.”
“곧 천하의 주인이 되시겠군요. 미리 경축드립니다.”
“천하의 주인이라. 그거 듣기 좋군. 호호호!”
탄영의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매화오절은 별 탈 없이 무림학관에 도착했다.
일행을 맞은 사람은 무림학관의 관장 공유(公柳)였다.
공유는 매화오절을 쭉 둘러보며 속으로 감탄을 뱉었다.
‘과연.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구나.’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한 공유는 차를 대접하며 말했다.
“무림학관은 무림맹에서 운영하는 무관(武館)입니다. 맹에서 필요한 비용을 전부 지불하지요. 돈이 없거나 신분이 천한 탓에 무공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 장차 훌륭한 무인으로 키워 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군요.”
그날 저녁, 매화오절은 공유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각자의 거처를 배정받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오늘은 푹 쉬시지요. 자세한 일정을 내일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본격적으로 매화오절의 훈련 지도가 시작되었다.
***
일행은 날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관생들의 훈련을 맡았는데, 첫날은 운휘가 맡게 되었다.
그는 아침부터 관생들에게 커다란 바위를 지게 한 다음, 산을 오르게 했다.
“싸울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체력이다! 체력이 없으면 오래 싸울 수 없어!”
산을 오르던 관생들은 비명을 질러 댔다.
“도, 도장님! 더는……. 더는 못 하겠어요!”
“다리가 도저히……. 움직이지 않아요…….”
운휘는 지쳐 쓰러진 관생들을 향해 말했다.
“요즘 것들은 근성이 부족해……. 나 때는 말이야! 응? 이것보다 더 큰 바위를 지고도 그 험한 화산 길을 매일같이 올랐어!”
“저희는 도장님이랑 달라요! 불가능하다고요!”
“아니야. 누구나 가능하다.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마.”
“어, 어떻게?”
묻는 관생들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졌다.
어느새 운휘의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누구든 일으켜 세울 수 있지. 흐흐.”
“…….”
관생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지옥과 같던 첫째 날 훈련은 끝이 났다.
관생들은 더 이상 산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더 끔찍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둘째 날 훈련을 맡은 유라가 말했다.
“모든 초식은 막고, 찌르고, 베는 기초적인 동작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기초 동작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펼치는 초식은 한낱 무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 훈련은 검술의 기초를 차근차근 다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시작하지.”
유라는 관생들에게 일반 목검보다 무거운 철검(鐵劍)을 쥐고 휘두르게 했다.
“가장 먼저 내려치기 천 번이다.”
“처처처처……. 천 번이나요?”
“불만인가? 그럼 이천 번으로 하지.”
“아, 아닙니다! 천 번으로 하겠습니다!”
관생들은 입술을 꽉 깨물며 검을 휘둘렀다. 일다경이 지나자 검이 무거워지고 팔이 덜덜 떨렸다.
유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숫자를 세었다.
“오백사십이……. 오백사십삼……. 속도가 느리다.”
관생들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인간들 같으니! 우릴 죽이려고 작정했나?’
‘빌어먹을! 화산의 도사들은 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렇게 둘째 날 훈련도 지나갔다.
셋째 날 훈련을 맡은 찬야는 거지꼴이 된 관생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힘들지? 내 훈련은 그렇게 무식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렴.”
“저, 정말인가요?”
“그럼! 돌아가면서 검술을 교정해 줄게. 누가 먼저 할래?”
찬야의 훈련은 다른 의미로 관생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펼치는 초식을 가만히 바라보던 찬야가 말했다.
“잠깐만. 그 초식 말이야. 얼마나 수련한 거야?”
“대략 보름 정도 수련한 것 같은데…….”
“그런 쉬운 동작을 왜 보름씩이나? 이해가 안 가네.”
“…….”
관생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찬야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넷째 날 훈련을 맡은 위지혁은 관생들을 세워 두고 말했다.
“인간은 죽을 위기에 직면했을 때 보다 강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나는 오늘, 너희들이 가진 능력의 한계치를 꺼내 줄 것이다. 나에게 감사해하도록.”
관생들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인간은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슬프게도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끄아악! 끄아아아악!”
위지혁은 초식을 틀린 관생을 묶어 두고 독으로 위협했다.
“어때, 이제 틀리지 않을 것 같지?”
“안 틀리겠습니다!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 제발 풀어 주세요오! 끄아아아악! 누가 나 좀 살려 줘어어어!”
관생들의 처절한 외침이 학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날.
남량은 관생들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녀석들이 제대로 굴린 모양이군.’
나흘을 죽어라 수련했으니 하루 정도는 휴식이 필요했다.
벽에 등을 기댄 남량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오늘 수련은 없다. 편히 쉬어라.”
“그 말, 믿어도 되는 겁니까?”
“눈에 불신이 가득한 걸 보니 꽤나 속은 모양이네. 정말이야.”
“크흡! 감사합니다.”
관생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반 시진 동안, 그들은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문득 관생 한 명이 손을 들며 물었다.
“도장님.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봐도 됩니까?”
“물어봐.”
“진정한 강함이란 무엇입니까?”
남량은 당금 무림계에서 남북 십성과 함께 최강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강함’은 과연 무엇일까?
관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남량을 응시했다.
뭔가 거창한 대답을 기대하는 듯했다.
“진정한 강함이라…….”
잠시 생각하던 남량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끝까지 살아남는 것.”
수련장 내부는 일순 조용해졌다.
그날 밤, 남량은 목욕을 마치고 거처로 향했다.
‘흑영대가 움직이고 있으니 곧 탄영의 위치를 알아낼 것이다. 혈마의 돌을 완전히 흡수하기 전에 찾아 죽여야 하는데…….’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거지 한 명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긴 죽장(竹杖)을 잡은 채였고, 다른 한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그를 발견한 남량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거지는 남량을 무시하듯 스윽 지나쳤다.
고개를 돌린 남량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이군. 남북 십성의 금왕(金王).’
***
모두가 잠든 시각, 무림학관 뒤쪽 언덕에서 세 인영(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흉마 윤손과 검오아 낭연청. 그리고 모산파의 양옹이었다.
“이곳에 백매화가 있는 것이 확실한가?”
윤손의 물음에, 그들을 따라온 수하가 대답했다.
“닷새 전에 도착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양옹은 보따리에 든 물건들을 꺼내며 말했다.
“소인은 이곳에 봉인진을 펼쳐 놓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백매화를 이곳으로 유인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하지.”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윤손이 품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마연항(魔煙缸)인가?”
낭연청의 물음에, 윤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백매화를 유인하는 데 충분할 겁니다.”
윤손은 항아리의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며 바람을 타고 무림학관 쪽으로 향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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