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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126화 (126/164)
  • <126화>

    남만의 침략자들(1)

    1년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화산파의 새로운 장문인 공월 지인은 청성파(靑城派)에서 보내온 서신을 읽고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서 차를 마시던 매화검수 이화정이 말했다.

    “표정이 심각해 보입니다, 장문인. 혹시 마교가 움직인 건…….”

    “그럼 흑영대가 먼저 서신을 보내왔겠지. 이번에 움직인 건 다른 세력이다.”

    “다른 세력이라 하심은?”

    “야수문(野獸門)이 날뛰고 있는 모양이다.”

    “야수문이라면 남만(南蠻)의…….”

    남만야수문.

    북해빙궁과 마찬가지로 새외(塞外)의 세력 중 하나였다.

    남만에 터를 잡고 성장한 그들은 종종 중원을 침략해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에 무림맹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최근에 잠잠하다 싶었는데, 다시 활동을 재개한 모양이었다.

    공월 진인이 다 읽은 서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청성파에서 지원을 요청했다.”

    “남북 십성이 있는데 지원을 요청했단 말입니까? 놈들의 저력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요.”

    “야수문의 문주 철타(鐵打)의 경지가 남북 십성에 준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 남만의 무공은 알려진 바가 없어서 상대하기 까다롭기도 하고. 그리고 이번에는 철타가 제법 강한 고수들을 데려온 것 같다. 용제의 힘으로도 벅찰 정도면…….”

    공월 진인이 수염을 쓸며 말했다.

    “요청에는 당연히 응할 생각이다.”

    “매화검수들을 보내야겠군요.”

    “누가 가장 적임일 것 같으냐.”

    잠시 고민하던 이화정이 대답했다.

    “장문인. 그 아이들을 보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매화검수가 된 지 이제 겨우 열흘인데, 괜찮겠나?”

    “화산파 최고의 기재들입니다. 마침 수련의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는 듯하니 믿고 보내시지요.”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맡겨 보도록 하지.”

    일어서는 이화정에게, 공월 진인이 물었다.

    “남량, 그 아이는 아직 폐관 수련중인가?”

    “이제 곧 나올 겁니다.”

    싱긋 웃어 보인 이화정이 방을 나갔다.

    ***

    사천에서 벌어진 남만야수문과 청성파의 싸움은 벌써 한 달을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저문 밤, 청성파의 도사들은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머무르는 객잔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청성파 난화검수(蘭花劍手)의 수장, 장소염(張小琰)은 침통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난화검수는 화산파의 매화검수와 마찬가지로 청성파의 최정예 검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장소염의 말에 청성파의 장문인이자 남북 십성, 용제(龍帝) 유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하다니, 뭐가 말이냐?”

    “앞선 네 차례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저희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난화검수의 명성에 먹칠을 했으니…….”

    “그런 말 마라. 철타가 그런 강력한 고수들을 키웠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너희는 충분히 잘해 주고 있다.”

    유선은 좋은 말로 장소염과 난화검수들을 다독였다.

    장소염은 자신들을 사천왕(四天王)이라 칭한 네 명의 고수들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야수문의 정예로, 네 명 모두 초절정의 고수였다.

    분하지만 그들의 기량은 자신들, 난화검수보다 한 수 위였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신경 쓰느라 장문인께서 철타와의 전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결판을 내셨을 텐데…….’

    장소염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첫 번째 전투에서 세 명이 부상을 당했고, 두 번째 전투에서 다섯 명이 더 다쳤다. 세 번째 전투에서는 두 명이 죽었고, 네 번째 전투에서 한 명이 더 죽었다.

    이대로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난화검수 중 한 명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원은 언제쯤 도착하련지 모르겠군.”

    “사흘 전에 요청했으니 곧 올 겁니다. 아미파, 공동파, 종남파, 무당파, 화산파 등에 서신을 보냈으니 가장 가까운 아미파에서 먼저 도착하겠군요.”

    대답한 이는 남북 십성의 후계자, 청랑이었다.

    그는 두 달 전 심사를 거쳐 난화검수의 일원이 되었다.

    “후우. 누가 오든 사천왕을 상대하지 못한다면 피해만 늘어날 뿐이다.”

    장소염이 한숨을 내쉬며 말할 때였다.

    “저희가 한번 상대해 보겠습니다.”

    “누, 누구냐!”

    낯선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난화검수들이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객잔 입구에 네 명의 도사가 서 있었다.

    새하얀 도복에 장포를 걸친 그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했다.

    콧등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

    검붉은 장발을 뒤로 묶은, 훤칠한 외모의 사내.

    귀족 자제처럼 은은한 기품을 풍기는 사내.

    큰 키에 강렬한 눈매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

    하나같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네 명의 면면을 살펴보던 장소염의 시선이, 어느 한 군데에서 멈췄다.

    ‘장포에 새겨진 삼매화(三梅花) 문양……. 매화검수다. 저들은 화산파에서 보낸 사람들이구나.’

    그들은 유선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매화오절이 남북 십성, 용제 대협을 뵙습니다.”

    그 말에 장소염이 가벼운 탄성을 내뱉었다.

    ‘매화오절! 저들이 바로 소문의 매화오절인가. 한 명 한 명이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과 비슷한 기량을 지녔다고 알려진 화산의 기재들. 우리 청랑도 무림대회에서 찬야라는 화산의 도사와 겨뤄 패배한 적이 있었지…….’

    유선은 포권의 예에 답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자네들. 우릴 도우러 와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1년 전, 용제 대협께서 저희 문파를 구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불사검협으로 불리는 여도사, 유라가 대답했다.

    그들과 친분이 있는 청랑은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찬야 도장! 이게 얼마만입니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무림대회 이후로 처음이네요.”

    운휘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맛있는 냄새. 배고프다.”

    옆에 서 있던 위지혁은 나직이 헛웃음을 흘렸다.

    “걸신들렸냐? 한 시진 전에 만두 세 판을 먹어 치운 놈이…….”

    매화오절은 간단히 식사를 마친 다음 청성파 도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장소염은 조금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슬쩍 던졌다.

    “그런데 백매화 남량 도장께서는 어디 계시는지요?”

    찬야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 사제는 폐관 수련이 끝나지 않아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장소염은 헛기침을 하며 실망한 기색을 감추었다.

    남량이 단신으로 마교의 수장 중 한 명인 효초아를 죽였다는 소식이 강호 전체에 퍼진 이후, 그의 명성은 남북 십성에 필적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효초아를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면 사천왕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터인데…….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불만을 표할 수는 없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구나.’

    대화를 나누며 전황을 대충 파악한 유라가 말했다.

    “사천왕이라는 자들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청랑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 도왕(刀王), 창왕(槍王), 권왕(拳王), 각왕(脚王)이라는 별명을 쓰며, 경지는 칠령귀의 흑귀, 태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칠령귀라는 단어에 매화오절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먼저 도왕은 두 자루의 박도(朴刀)를 사용하며 신법에 능하고 주변의 지형을 잘 활용합니다. 창왕은 투창(投槍)으로 공격을 하는데 한 번 던지는 창의 위력이 포탄처럼 강력합니다. 그리고 권왕은 외공을 익혀…….”

    청랑이 자세한 설명을 마치자 유라가 말했다.

    “권왕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찬야는 신법에 능한 도왕을, 운휘는 창왕을, 위지혁은 각왕을 맡으면 되겠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장소염이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지금 그들을 각자 한 명씩 맡아서 상대하겠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유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장소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만만하군. 우리가 고전을 면치 못한 사천왕을, 자신들은 간단히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이래서 젊은 것들이란.’

    장소염은 고개를 돌려 유선에게 말했다.

    “장문인. 그건 위험합니다. 사흘 정도 기다리며 다른 문파의 지원이 모두 도착한 다음 싸우는 편이 낫습니다.”

    눈을 감고 있던 유선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럼 사천왕은 자네들의 손에 맡기겠네. 부탁함세.”

    “장문인……!”

    장소염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은 정말 저들이 사천왕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장소염은 고개를 돌려 매화오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이겨 보이겠습니다.”

    ***

    다음 날, 야수문은 먼저 청성파를 공격해 왔다.

    앞선 네 번으로 전투로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사천왕의 일원 도왕은 청성파의 제자들을 향해 도를 휘두르며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이게 네놈들의 전력이냐? 구파일방도 별것 없군.”

    이를 악문 채 도왕을 노려보던 청성파 제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새하얀 도복을 펄럭이며 청년 도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검을 늘어뜨린 채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도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내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처음 보는 자로군. 정체를 밝혀라.”

    사내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야만인 주제에 지금 무인 흉내를 내는 거냐? 하하하.”

    사내, 찬야는 일순 웃음을 그치며 싸늘히 내뱉었다.

    “너 같은 놈한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어서 덤벼.”

    “건방진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직후,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지켜보던 장소염은 이를 악물었다.

    ‘똑같은 전법이군.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 몸을 숨기며 허점을 노리는 방식의…….’

    그는 고개를 돌려 찬야를 응시했다. 찬야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저러다 당하겠어!’

    파팟! 찬야의 등 뒤에 나타난 도왕이 그대로 도를 내리쳤다.

    신음을 흘린 장소염이 찬야를 돕기 위해 몸을 날리는 때였다.

    찬야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수련의 성과가 있군. 예전 같았으면 기척을 파악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을 거야.”

    휘익! 찬야는 몸을 틀어 떨어지는 도를 피했다.

    ‘내 도격을 피해?’

    자존심이 상한 도왕이 표정을 찌푸리며 연격을 가했다.

    찬야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도왕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보냈다. 도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도대체 왜 도가 닿지 않는 거냐!’

    그의 호흡이 마침내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찬야는 차가운 안광을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의 9초식, 고목생화(枯木生花)였다.

    스걱-! 섬전과 같은 일검이 도왕의 목을 갈랐다.

    목을 잃은 몸뚱이가 천천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검을 허공에 휘둘러 피를 털어 낸 찬야가 말했다.

    “칠령귀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실력이군. 쯧.”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청성파 제자들이 일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찬야 도장이 도왕을 베었다!”

    반대로 야수문의 문도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장소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화산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괴물이 있는 거지?”

    찬야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할아버지. 저는 더 강해질 겁니다. 더는 누구도 잃지 않기 위해…….’

    1년간의 고된 수련을 마치고 재능을 개화한 그가, 처음 실력을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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