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화산 전투(3)
화산의 도사들이 각자 칠령귀와 전투를 시작했을 때.
유우화가 비척거리며 도착한 곳은 자신의 침실이었다.
그는 구석에 놓인 목함을 열고 안에 든 연화검을 꺼냈다.
‘다시는 만지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우화는 서신 한 장을 꺼내 펼쳤다.
구풍의 필체로 적힌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유 대인의 검입니다. 대인의 곁에 있는 걸 연화도 바라고 있을 겁니다.
유우화는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검을 뽑았다.
매화 문양이 새겨진 칼날을 본 순간, 가슴이 격동했다.
‘연화……. 나의 오랜 벗이여.’
유우화는 연화의 검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나와 마지막으로 같이 싸우겠는가.”
우웅! 연화검이 물음에 답하듯 나직이 검명(劍鳴)을 냈다.
유우화는 미소를 지으며 연화검을 들고 침실을 나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야?”
효초아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유우화가 아니라 수라였다.
“놈의 진원(眞元)을 담고 있던 그릇이 깨졌다.”
효초아의 입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나오자, 유우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수라와 동화된 모양이군.’
수라의 말에 효초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원이라.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사용해 힘을 되찾은 건가?”
선천진기란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가진 원기를 말했다.
사람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자, 순수하며 강력한 힘.
보통은 평생에 걸쳐 천천히 소모해야 될 힘을, 유우화는 자신의 의지로 한 번에 끌어냈다.
그 대가는 당연하게도 죽음이었다.
효초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건가? 대체 왜?”
유우화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같이 주인을 배신한 마물은 평생토록 이해할 수 없겠지. 목숨과 맞바꾸어 내 사형제를, 가족과 같은 동료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자세를 취했다.
바로 매화천수검의 기수식이었다.
‘오랜만이로군. 매화천수검을 펼치는 것은.’
파지직. 효초아의 전신에서 자색 번개가 일어났다.
“선천진기를 끌어내 썼다 한들, 네놈이 나를 이길 것 같아? 과거 마교대전 당시에도 내가 두려워했던 건 명왕과 검성, 불제뿐이었다고! 너 따위는 언제든 이길 수 있었어!”
콰르릉!
효초아가 손을 뻗자 자색 벼락이 유우화를 향해 떨어졌다.
그 순간, 유우화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천마조차도 인정했다고 알려진 최고의 경공. 월인비가 펼쳐진 것이다.
효초아는 혀를 차며 주변에 닥치는 대로 뇌전을 쏘아 보냈다.
우우화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효초아의 등 뒤였다.
“거기냐!”
효초아는 몸을 돌리며 번개로 이루어진 창을 생성해 던졌다.
자전마공의 절기 중 하나인 뇌신창(雷神槍)이었다.
콰아앙! 번개의 창이 유우화가 있던 자리에 작렬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섬뜩한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전해져 왔다.
그가 다급히 고개를 들자, 유우화가 그곳에 있었다.
유우화는 매화천수검 뇌전포화 초식으로 검을 내리쳤다.
콰르릉! 뇌성이 울리며 검격을 막은 효초아가 나가떨어졌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효초아에게, 유우하가 말했다.
“착각이 지나치군. 효초아. 지월이나 탄영이라면 몰라도 네놈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나를 이기려면 그 잘난 수라의 힘이라도 끌어다 써야 할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효초아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건방진 놈.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
위지혁은 고통을 무릅쓰고 혁련위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관로는 비웃음을 흘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숙…….’
위지혁은 떨리는 손으로 혁련위의 뺨을 쓸었다.
생기를 잃은 뺨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건이 그의 아버지와 같았다면 혁련위는 친형과 같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
위지혁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절규했다.
“으아아아!”
정신을 차린 운휘는 위지혁의 절규를 듣고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아픔을, 어찌 모르겠는가.
가서 위로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관로가 위지혁을 향해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운휘는 눈을 부릅뜨며 위지혁을 향해 소리쳤다.
“피해! 위지혁! 어서 피하라고!”
처억. 위지혁의 앞에 선 관로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슬퍼할 것 없다. 너도 곧 이놈의 곁으로 보내 주마.”
관로가 위지혁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쩌엉!
갑자기 충격이 불어닥치며 그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꺼억?”
관로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나무를 부수고 처박혔다.
놀란 운휘가 고개를 돌리자, 한 사내가 마당에 서 있었다.
단정한 외모에 옥빛 도포를 입고 손에는 장검을 든 채였다.
‘칠령귀 관로를……. 일검에 날려 버렸다고? 대체 누구지?’
사내는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운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운휘의 등에 손을 얹고 내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기가 역류하고 있군, 금방 풀어 줄 테니 걱정 마시게.”
우우웅.
사내는 운휘에게 활공을 행해 역류하던 내력을 진정시켰다.
“어,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운휘의 물음에, 사내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유선. 청성파의 장문인이라네.”
사내의 말에 운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북 십성의 용제! 용제가 이곳에 왔구나!’
과연, 남북 십성이라면 관로를 날려 버린 것도 이해가 되었다.
유선은 위지혁에게 다가가 그에게도 활공을 해 주었다.
그때, 처박혀 있던 관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단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어떤 새끼가 감히 나를……. 죽여 버리겠다.”
분노에 찬 관로의 시선이 유선에게 가 닿았다.
그는 유선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최강의 절기를 날렸다.
“흑풍. 흑천광풍(黑天狂風).”
관로가 일으킨 검은 회오리바람이 그대로 유선을 덮쳤다.
콰콰콰콰콱! 유선은 저항하지 못하고 회오리에 휩쓸렸다.
“멍청한 놈. 방심을 하다니! 내 승리다!”
관로가 폭소를 터뜨리는 그때였다.
“방심은 네 쪽이 한 것 같은데.”
등 뒤에서 유선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로는 몸을 빙글 돌리며 수도(手刀)를 세워 휘둘렀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직후, 섬광이 번쩍이며 관로의 팔 한쪽이 잘려 나갔다.
잘린 팔의 단면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보며, 관로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관로는 고통에 몸서리치면서도 유선을 향해 흑풍을 쏘았다.
쾅! 콰앙! 유선은 호신강기를 펼쳐 관로의 공격을 튕겨 냈다.
“칠령귀 관로. 청성파 장문인이자 남북 십성 용제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차갑게 내뱉은 유선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그었다.
청운적하검의 운파월래(雲破月來) 초식이었다.
관로는 하늘이 둘로 갈라지는 광경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시발. 매화검선은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는데…….”
쩌억! 관로의 몸뚱이가 깨끗하게 둘로 쪼개졌다.
관로를 처리한 유선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몸을 일으킨 운휘는 비틀거리며 위지혁에게 다가갔다.
“위지혁…….”
운휘는 위지혁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위지혁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흘렸다.
유선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찬야는 마휘란이 눈앞에 서 있음에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쓰러져 있는 노백에게 가 있었다.
“할아버지…….”
찬야는 노백의 상처를 두 손으로 막으며 그를 불렀다.
노백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찬야. 너는 나의 자랑이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거라…….”
“안 돼요. 할아버지.”
“반드시 살거라. 살아서 너의 길을 걸어가거라…….”
“할아버지……. 할아버지!”
찬야의 간절한 외침에도 노백은 결국 눈을 감았다.
“으아아아아!”
찬야는 노백의 손을 붙잡고 괴성을 내질렀다.
마휘란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찬야의 목을 노렸다.
“죽어라.”
검이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 벽을 부수며 붉은 도강(刀罡)이 마휘란을 향해 날아들었다.
쩌엉! 검을 회수해 도강을 막은 마휘란이 뒤로 물러났다.
“누구냐.”
그의 물음에, 건물 안으로 들어온 노도인이 대답했다.
“곧 죽을 놈이 그건 알아서 뭐 하느냐.”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 벽에 기대어 있던 이화정은 노도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떴다.
‘도군(刀君)!’
도인의 정체는 바로 종남파의 장문인이자 남북 십성의 도군, 유종학이었다.
유종학의 기운을 감지한 마휘란이 처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 남북 십성인가.”
유종학은 주변의 참상을 힐끗 쳐다본 다음, 입을 열었다.
“잘도 저질렀구나. 이 망할 살인귀 자식아.”
쇄애액! 위기감을 느낀 마휘란이 먼저 공격을 해 왔다.
유종학은 슬쩍 몸을 돌려 마휘란의 검격을 피해 냈다.
‘내 검격을 저렇게 쉽게 피한다고?’
눈살을 찌푸린 마휘란이 또 한 차례 검을 휘둘렀다.
쇄애액! 유종학은 이번에도 최소한의 동작으로 검을 피했다.
마휘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유종학이 말했다.
“보아하니 자기 검술에 제법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그따위 검술로도 자신감을 가지다니, 기가 차는군.”
“……!”
마휘란이 눈을 치켜떴다. 그의 기세가 흉폭해졌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보자.”
마휘란은 두 손으로 자루를 붙잡고 검을 수평으로 세웠다.
일전에 그를 상대한 적이 있는 이화정이 침을 꿀꺽 삼켰다.
‘놈이 절기를 펼치려고 하는구나.’
마광유영검의 절기, 멸절대참(滅絶大斬).
그 위력과 속도는, 낭연청의 흑살검을 뛰어넘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남북 십성이라고 해도 저 일격을 무사히 받아 낼 수 있을까?’
이화정은 걱정에 찬 눈빛으로 유종학을 응시했다.
유종학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덤덤히 말했다.
“흥. 어디 재주를 부려 보거라.”
슈왁-! 마휘란이 검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검격이 유종학의 목을 노렸다.
절기를 날린 순간 마휘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멸절대참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피하면 늦는다. 넌 끝이야.’
마휘란이 유종학의 목을 베었다고 확신한 바로 그때였다.
푸슉! 마휘란은 울컥 피를 내뿜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장도의 칼끝이, 명치 위로 비스듬히 튀어나와 있었다.
등 뒤에서 도를 찌른 유종학이 말했다.
“내가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어, 어떻게…….”
“네놈은 자신의 실력에 너무 자만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줄도 모르고……. 쯧쯧.”
마휘란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유종학이 도를 뽑아 든 다음 마무리를 지으려는 순간.
벼락처럼 달려든 찬야가 검을 휘둘러 마휘란의 목을 쳐 버렸다. 머리를 풀어헤친 그는 마치 야차와도 같았다.
“내 가족의 원수.”
잘린 마휘란의 목이 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검을 떨어뜨린 찬야는 긴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디 편히 쉬세요…….”
찬야는 피에 젖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오열을 토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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