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북해의 암운(1)
남량과 은왕은 북림(北林)이라는 글자가 적힌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먼저 도착한 조사대가 머무르던 객잔이었다.
두 사람은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파마대는 조금 떨어진 곳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남량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 달이나 이곳에 머물렀다면 객잔 주인이나 점소이들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은왕이 짐 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내가 가지고 있네.”
“잘되었군요. 그럼 저기 오는 점소이에게 물어보지요.”
중원 사람으로 보이는 점소이가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으로 드릴까요? 저희 객잔은…….”
“주문은 나중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은왕이 두루마리 속 초상화를 점소이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이 사람을 본 적 있소? 며칠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인데.”
“어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점소이가 일순 알았다는 듯 말했다.
“맞다! 맞아! 그때 군사들에게 끌려갔던 무사님이구만!”
남량과 은왕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군사들에게 끌려갔다니?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그게 말입니다. 이분은 며칠 전에 빙궁에서 온 군사들에게 끌려갔습니다. 평소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셨는데 잠깐 벗은 얼굴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틀림없습니다.”
“이 사내가 혼자였소?”
“동료로 보이는 분들이 몇 있었습니다.”
“빙궁에서 왜 이들을 끌고 간 것이오?”
“그건 저도 모르지요. 대체 무슨 이유인지…….”
“으음.”
은왕이 침음을 삼켰다. 남량은 주문을 마치고 점소이를 보낸 뒤 은왕에게 말했다.
“오늘 밤 당장 빙궁으로 숨어 들어가지요. 조사대를 구출하고 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야겠습니다.”
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밤이 깊어지자 준비를 마친 남량이 객잔을 나왔다.
그의 옆으로 은왕과 파마대가 은밀히 합류했다.
그들은 기척을 숨긴 채 빙궁으로 내달렸다.
“남량 도장. 만약 효초아를 만나게 되면 절대 상대하지 말고 물러나게. 마교의 간부를 마주쳐도 마찬가지일세.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빙궁의 성벽이 나타났다.
“높군. 조심해서 따라오게.”
은왕은 가볍게 몸을 날려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높은 성벽이라도 남북 십성에게는 담장과 비슷했다.
파파팟!
단숨에 성벽을 오른 은왕이 성벽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잘 따라오고 있나?’
직후, 남량이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가볍게 착지했다.
월인비를 펼쳐 순식간에 성벽을 오른 것이다.
남량은 주변을 둘러보며 은왕에게 말했다.
“다행히 경계가 삼엄하지는 않군요.”
괜히 머쓱해진 은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마대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던 도중, 남량이 성내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남량은 깜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그가 다급히 은왕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남량을 따라 시선을 내린 은왕이 입을 살짝 벌렸다.
빙제가 기거하는 중앙전(中央殿) 주변에, 엄청난 숫자의 군대가 집결해 있었다.
그 숫자는 대략 세어 봐도 오천이 넘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출병할 듯 단단히 무장한 채였다.
남량은 거대한 군집(群集)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빙궁은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은왕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예상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
남량은 천양신경의 능력인 통찰안(洞察眼)을 사용해 조사대가 갇힌 곳을 찾아냈다.
‘조사대는 중앙전 지하에 갇혀 있구나.’
마침 파마대가 전부 올라왔다. 남량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중앙전으로 가지요. 그곳 지하에 조사대가 갇혀 있습니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은왕은 순간 남량의 두 눈이 푸른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그건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말하는 남량의 눈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들 기척을 죽이고 조심히 이동한다.”
“존명.”
남량과 은왕, 파마대는 천천히 중앙전으로 접근했다.
중앙전 내부는 비교적 조용했다.
침투에 성공한 일행은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왔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보초병이 있군.”
“제가 처리하지요.”
바람처럼 몸을 날린 남량이 수도(手刀)를 세워 보초병의 뒷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가격했다.
기절한 보초병을 구석에 눕힌 일행은 소리 없이 복도를 달렸다. 한참을 달리자 복도의 끝이 나타났다.
‘창살? 감옥인가?’
감옥 앞에서 걸음을 멈춘 남량이 내력으로 손가락 끝에 불꽃을 일으켰다.
주변이 환해지며 창살 너머의 풍경을 비추었다.
그곳에는 수십 명가량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이 불빛에 이끌려 하나둘씩 창살 쪽으로 다가왔다.
“누, 누구시오?”
북해 사람으로 보이는 사내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은왕이 남량의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혹시 여기 중원 사람이 갇혀 있지 않습니까?”
그때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회주님!”
사내의 얼굴은 초상화에 그려진 것과 똑같았다.
다만 고생을 겪은 탓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은왕은 반색하며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사내를 붙잡았다.
“지운(志雲)! 무사했구나!”
지운이라 불린 사내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 말 말거라. 무사해서 천만다행이다.”
감옥 안에는 임무를 받은 조사대원 전부가 갇혀 있었다.
그들은 남북 십성이 왔다는 말에 안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이게 전부 무슨 일이더냐. 밖의 군대는 무엇이고?”
은왕의 물음에 지운이 한 사람을 데려왔다.
“자세한 설명은 이분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빙궁 특유의 복색을 갖춘 노인이 불빛 안으로 걸어왔다.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노인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왕야(王爺)를 보살피는 대신 중 한 명이었습니다.”
“헌데 어찌 감옥에 갇혀 계시는지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세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 달 전, 빙궁으로 한 사내가 찾아왔었습니다. 붕대로 얼굴을 가린, 용모가 매우 특이하게 생긴 자였는데 그가 나타난 이후로 왕야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남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굴에 붕대를 감았다고? 설마…….’
은왕이 계속 물었다.
“태도가 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이지요?”
“저희 왕야는 부족민들을 자식처럼 보살피고 선정을 펼쳐 타 부족들 가운데서도 존경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헌데 그자가 나타난 이후 왕야의 성정이 눈에 띄게 난폭해진 겁니다. 심지어는 중원을 침략해 지배하겠다며 부족들을 소집하기까지 했습니다. 중원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교역로까지 여셨던 분이 말입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대신들이 간곡히 말렸으나 일부가 처형당하고 나머지는 보다시피 감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남량이 노인에게 물었다.
“그 사내의 이름을 들은 적 있습니까?”
“백야(白夜)라 하더이다.”
‘백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남량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그놈이었군. 칠령귀의 환귀(幻鬼), 백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이제 대충 짐작이 간다.’
환귀 백야의 특기는 바로 환술(幻術)이었다.
그의 환술은 매우 강력해서, 환술에 걸린 자는 백야의 말을 천명(天命:하늘의 명령)처럼 따르게 된다.
빙제를 조종해 이민족들로 하여금 중원을 침공하게 하는 것. 그것이 효초아의 다음 계획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계획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절대 그렇게 두지는 않는다.’
남량이 고개를 돌려 은왕에게 말했다.
“빙제를 조종하는 그자는 마교의 간부가 분명합니다. 그를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
노인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제발 왕야를, 우리 빙궁을 구해 주십시오. 전쟁이 일어나면 필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리할 것입니다.”
은왕은 검지와 중지를 세워 허공에 대고 그었다.
그러자 쇠창살이 나뭇가지마냥 쉽게 잘려 나갔다.
남량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무검(無劍)의 경지라. 과연 남북 십성인가.’
일행은 감옥에 갇힌 이들을 구출해 계단을 올라갔다.
지상에 도착하자, 주변에서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런! 발각된 건가.’
은왕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지풍(指風)을 날렸다.
지풍을 맞은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남량 또한 장풍을 날려 군사들을 벽으로 밀어냈다.
“이들을 멈추게 하려면 빙제를 데려와야 합니다.”
중앙전은 이미 오천 명의 군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도망칠 곳은 없다. 은왕은 복도를 내달리며 말했다.
“이렇게 하지. 나와 남량 도장이 중앙전에 있는 마교의 간부를 처리하고 빙제를 원래대로 돌려놓겠다. 그동안 파마대는 군사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중앙전의 입구를 막아라.”
“존명.”
“남량 도장. 가세.”
“알겠습니다.”
남량과 은왕은 파마대가 입구를 막는 동안, 환귀 백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궁전의 최상층으로 올라가던 두 사람은, 거대한 기운을 마주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뼛속까지 저리는 차가운 한기……. 이건 빙제의 기운인가.’
쿵! 쿵! 쿵!
복도 저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수염과 강렬한 눈매. 구풍과 비슷한 정도의 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손에는 큼지막한 대도(大刀)를 들고 있었다.
그가 바로 빙궁의 지배자인 빙제(氷帝)였다.
“그자는 없는 건가?”
남량은 통찰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붕 위에 있군요.”
빙제는 남량과 은왕,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중원에서 보낸 자객들이냐?”
“자객이 아니오. 본인은 낭인회의 수장인 유서휘라고 하오.”
“오호라. 네놈이 명성 자자한 남북 십성이로구나. 그래. 나를 암살하기 위해 온 것인가? 허나 소용없다.”
“내가 왜 당신을 암살한단 말이오?”
남량이 은왕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환술에 걸린 상태이니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빙제가 대도를 치켜들며 이를 갈았다.
“백야가 말했다. 중원 놈들은 우릴 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있다고. 내가 순순히 당해 줄 듯싶더냐? 죽어라!”
빙제가 괴성을 지르며 대도를 내리쳤다.
대도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남량과 은왕은 다급히 양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폭음이 울리며 바닥이 움푹 파였다.
“도망쳐 봐야 소용없다!”
빙제가 재차 도를 휘둘렀다.
쩌엉! 검으로 그의 도격을 막아 낸 은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북 십성에 준하는 강자라더니……. 사실이었군.’
남량은 천장 위를 올려다보며 은왕에게 말했다.
“회주님. 잠시만 여기서 빙제를 막아 주십시오. 제가 놈을 쓰러뜨리고 오겠습니다.”
“자네 혼자 가능하겠는가? 상대는 마교의 간부일세.”
“저를 믿으십시오. 덕분에 매화천수검의 비기를 완성했으니, 반드시 이깁니다.”
은왕은 남량이 걱정되었으나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채앵! 검을 휘둘러 빙제의 도를 쳐 낸 은왕이 말했다.
“알겠네. 부디 조심하게.”
파파팟!
남량은 은왕이 빙제를 막는 틈을 타 중앙전 지붕 위로 올라갔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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