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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85화 (85/164)
  • <85화>

    운휘의 각성. 금강불괴(金剛不壞)(1)

    남량 일행은 꼬박 보름 동안 말을 달려 하북성의 성도인 직예(直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의 초입에서 시작된 돌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입구에 걸린 현판에는 화려한 필체로 ‘하북팽가(河北彭家)’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으르렁!

    문 너머로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위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왜 범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야?”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찬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위지혁이 눈을 깜빡였다.

    “소문?”

    “응. 팽가의 가주, 남북 십성의 도제(刀帝)가 호랑이를 굴복시켜서 키우고 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취미 한번 고약하군.”

    위지혁은 혀를 내둘렀다.

    저벅저벅.

    계단 아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향했다. 등에 도(刀)를 찬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음?”

    고개를 든 사내는 일행을 발견하고 물었다.

    “손님이신가? 어디서 오셨소?”

    “화산에서 왔습니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화산은 뭐라 해도 당금 강호에서 가장 회자되고 있는 문파였다.

    사내는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팽가의 일 공자인 팽자엽(彭刺燁)입니다. 화산의 도인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호도(飛虎刀) 팽자엽!”

    찬야가 소리쳤다. 팽자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를 아시는군요.”

    “알다마다요.”

    찬야가 살짝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팽 공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남북 십성인 도제의 장남이자 그의 후계자인 하북 제일의 후기지수 아닙니까!”

    유라와 위지혁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남북 십성의 후계자!’

    유라는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화산의 일대제자 유라입니다.”

    “불사검협이시군요. 반갑습니다.”

    팽자엽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팽가의 후계자……. 얼마나 강할까.’

    최근 들어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과 연이어 힘을 겨룬 유라는 자연스레 호승심이 생겼다.

    우웅.

    유라는 암암리에 내력을 모아 팽자엽에게 흘려보냈다. 팽자엽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내력을 가볍게 받아 냈다.

    ‘과연, 대단하군.’

    단단한 바위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강맹하기로 이름난 팽가의 후계자다웠다.

    유라는 내력을 갈무리하며 정중히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별말씀을.”

    팽자엽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도장님들을 직접 마주하니 그동안 강호에 퍼진 매화오절의 활약상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겠군요.”

    팽자엽의 시선이 잠시 남량에게 가 닿았다.

    “백매화 남량 도장이시지요?”

    “그렇습니다만.”

    “언젠가 한 수 배울 수 있으면 좋겠군요.”

    남량은 한순간 팽자엽의 눈에서 불길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군.’

    잠시 남량을 노려보던 팽자엽은 이내 아쉽다는 듯 눈길을 거두었다.

    “말이 많았군요. 자, 안으로 드시지요.”

    일행은 팽자엽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

    “맹호출동(猛虎出動)!”

    “하압!”

    “이봐! 너 자세가 틀리잖아! 똑바로 집중하지 못하나?”

    “죄송합니다!”

    “다시!”

    외원의 마당에서는 서른 명 되는 건장한 사내들이 상의를 벗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강렬한 기세로군요.”

    유라는 감탄한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화산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동작과 다르게 투박하고 거칠지만, 그것이 바로 저희 팽가의 자랑이지요.”

    팽자엽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팽자엽은 일행을 내원의 가주전으로 안내했다.

    마침 대전에서 나오던 팽가의 일 장로 팽윤(彭倫)이 팽자엽과 마주쳤다.

    “오셨군요. 일 공자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장로님. 가주님께선 안에 계십니까?”

    “예. 아침부터 호야(虎冶)와 놀아 주고 계십니다. 하하.”

    껄껄 웃던 팽윤의 시선이 남량 일행에게로 향했다.

    “정순한 도기(道氣)로군요.”

    “화산파에서 오신 도장분들입니다.”

    팽윤은 부드럽게 웃으며 예를 갖추었다.

    “팽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일행은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가주전 내부는 매우 넓었다.

    양쪽 벽에는 온갖 병기들과 명화(名畵)가 걸려 있었는데,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크르렁!

    집채만 한 범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위지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집에서 호랑이를 키우고 있어?”

    놀랄 만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랑이가 고개를 들어 그의 뒤에 앉은 한 중년 사내의 손을 할짝거렸다.

    “호야. 간지럽다.”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우락부락한 체격에 장포 하나만 걸친 사내.

    실로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도제(刀帝) 팽인호(彭刃豪).

    마교와의 전쟁 당시 언제나 선두에 서서 용맹을 떨치며 수많은 협사들의 귀감이 된 사내. 그가 그곳에 있었다.

    ‘이분이 바로 남북 십성의 도제…….’

    찬야는 가볍게 손을 떨었다.

    ‘독왕과 같은 불길함. 검성과 같은 날카로움은 없지만 거대하다. 이분은 거대한 산[山]. 그 자체야.’

    위지혁의 눈이 격동했다.

    ‘세상에는 정말 위대한 무인들이 많구나.’

    유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명왕, 검성, 은왕 등 다양한 강자들을 만나 보았지만 여전히 그들을 마주하면 가슴이 떨려 온다. 일행은 존경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잠시 팽인호를 응시했다.

    “흐음.”

    팽인호는 팽자엽이 소개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화산의 제자들인가?”

    남량 일행은 팽인호를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매화오절이 팽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팽인호는 일행을 쭉 둘러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검선이 은퇴한 뒤로 줄곧 겨울이었던 화산에 봄이 왔구나. 제법 멋진 매화들이 핀 것을 보니.”

    칭찬을 들은 찬야와 유라, 위지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팽인호는 길게 하품을 하며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야. 잠시 낮잠이나 자고 있거라.”

    호야라는 이름의 호랑이는 그르렁, 하고 나직이 울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웃차.”

    팽인호는 신음을 흘리며 거구의 몸을 일으켰다. 순간이지만 마치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술이나 한잔해야겠군.”

    남량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응시하며 피식 웃었다.

    ‘손님에게 차가 아닌 술을 대접하다니.’

    그것도 벌건 대낮에 말이다.

    꿀꺽꿀꺽.

    술을 병째로 들이켠 팽인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역시 술은 낮에 먹는 술이 가장 맛난 법이지.”

    한 병을 단숨에 비워 버린 그가 일행에게 물었다.

    “운휘를 데리러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남량이 물었다.

    “운휘는 지금 어디에 묵고 있습니까?”

    “객청에 가도 녀석은 없을 것이다.”

    팽인호가 끌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녀석은 매일 미시(未時:13∼15시)에 대련을 하거든.”

    “대련이라면 누구와?”

    “내 후계자.”

    팽인호의 대답에 일행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운휘가 팽 공자와 매일 대련을 한다는 말인가요?”

    찬야의 물음에 팽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재미있는 구경거리인데, 따라오너라.”

    ***

    남량 일행은 팽인호를 따라 누각으로 향했다.

    누각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자 청석이 깔린 비무대 위에 홀로 서 있는 팽자엽이 보였다.

    남량은 팔짱을 낀 채 비무대를 응시했다.

    ‘팽자엽과의 대련이라.’

    팽가의 도법(刀法)은 호쾌하고 강맹했다. 이는 운휘의 칠절매화검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무인과의 대련. 자신보다 몇 수 위의 상대와 하는 대련이라면 성장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운휘. 너도 강해지기 위해 착실하게 노력하고 있구나.’

    그동안 얼마나 강해져 있을까?

    남량은 어서 운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운휘가 낡은 도포를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운휘…….”

    검을 손에 든 채 걸어오는 운휘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맹수를 보는 듯했다. 어딘가 어설퍼 보이던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훌륭한 투기다.”

    유라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찬야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거지?’

    위지혁은 달라진 운휘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다.

    “무사로서 운휘의 나이는 한창 재능이 개화할 시기.”

    남량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 녀석은 폭발적인 기세로 성장할 거다.”

    파팟.

    운휘는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라 비무대 위에 착지했다. 기다리던 팽자엽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운휘 도장이 조금 늦었소.”

    “측간을 좀 다녀오느라.”

    운휘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사이로 한 차례 바람이 불어왔다. 운휘와 팽자엽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거칠게 펄럭거렸다.

    팽자엽은 도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제 슬슬 도장과의 비무도 끝이 나겠구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

    “내 이제 와 말하지만, 솔직히 그동안 즐거웠소.”

    팽자엽이 싱긋 웃으며 운휘를 응시했다.

    “냉정히 말해 도장의 검술은 내 도술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십, 수백 번을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 덤벼드는 도장의 근성은 진심으로 존경하오.”

    스릉.

    팽자엽은 박력 있는 동작으로 도를 뽑아 들었다.

    “마지막까지 서로 진심을 다해 겨뤄 봅시다. 도장.”

    운휘 역시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거다.”

    운휘의 말에 팽자엽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도장. 그동안 도장과 내가 몇 번 대련한 줄 아시오?”

    “삼백스물두 번.”

    운휘가 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부 네가 이겼지.”

    “그런데 아직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보시오?”

    “응.”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팽자엽의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운휘는 증명해 보려는 듯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첫 대련에서 삼십삼 초 만에 내가 패배.”

    “……그걸 기억하고 계셨소?”

    “열 번째 대련에서 오십이 초 만에 내가 패배.”

    운휘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예순두 번째 대련에서 백삼십 초 만에 내가 패배.”

    “…….”

    “백 번째 대련에서 이백이십사 초 만에 내가 패배.”

    팽자엽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반대로 운휘는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백쉰세 번째 대련에서 내가 처음으로 네 어깨에 상처를 입혔고.”

    “…….”

    “이백다섯 번째 대련에서 네 허벅지와 팔목에 상처를 입혔어.”

    운휘는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하며 말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네 몸에 상처를 냈어. 그리고 삼백스무 번째 대련에서는 네가 절기를 쓰게 만들기까지 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팽자엽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대련을 할수록 운휘는 성장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을 정도로 말이다.

    콰아아-.

    운휘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내 목표는 형님의 옆에서 그분을 지키는 검이 되는 것.”

    운휘는 시퍼런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너도 결국 내가 넘을 벽에 불과해.”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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