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찬야의 각성. 신검합일(身劍合一)(2)
어두운 건물 안, 달빛이 창문을 넘어 수련장을 비추었다.
유라와 찬야는 서로 마주 본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우선, 경지를 넘은 건 축하해.”
“고맙군.”
“하지만 말이야.”
찬야는 가볍게 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말했다.
“나라고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야. 내 경지를 뛰어넘기 위해, 은왕에게 비무를 청하고 그와 매일같이 대련했어.”
“나도 알아.”
유라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전력으로 덤빌 거야.”
후웅!
유라의 전신에서 노도와도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찬야의 머리카락과 도포 자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그녀의 말대로야.’
유라는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강해진 기운이 피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내가 사매를 이길 수 있을까?’
예전이었다면 조금 건방진 말이지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전력으로 임하지 않으면 당할지도 모른다.
찬야의 표정에서 가벼움이 사라졌다.
그는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잡았다.
그제야 유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무를 시작하지.”
그녀는 검을 들어 매화홍주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 모습을, 남량은 기척을 숨긴 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누구의 승리로 끝날 것인가?
감각을 끌어올리자 서로의 미세한 숨소리와 눈동자의 움직임. 어깨의 흔들림과 칼끝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진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적막한 수련장에 묵직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먼저 움직이는 건 어느 쪽인가.
‘검술의 특성상 찬야는 외곽을 노리며 틈을 파고들 것이고, 유라는 정면으로 돌진해 밀어붙일 터.’
그때, 찬야가 먼저 바닥을 박차고 유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선공은 찬야인가.’
남량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비무를 지켜보았다.
“하압!”
찬야의 검이 화려한 검로를 그리며 유라를 공격해 왔다.
채채채챙!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화려한 검초가 허공을 수놓았다.
잔상이 어지러이 휘날리며 눈을 어지럽힌다. 환상에 사로잡히면 결국 패배하게 된다.
그러나 유라는 표정의 변화 없이 날아드는 공격을 완벽히 방어해 내며 반격을 가했다.
채앵!
유라의 공격을 튕겨 낸 찬야가 거리를 벌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면 서로 인사는 주고받은 셈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유라의 표정을 확인해 보니 진심으로 찬야를 이길 작정인 듯했다.
그럼 찬야는?
마찬가지로 진지한 표정이지만 긴장감도 살짝 엿보인다.
‘찬야. 지금껏 나 말고 너를 넘을 녀석은 없다고 생각했나? 물론 유라는 너보다 재능이 부족할지 몰라도 끈기와 독기를 품고 경지를 넘어섰다. 너에게는 없는 것들 말이다.’
남량은 찬야가 끈기와 독기를 품었을 때 비로소 재능을 완전히 개화하리라 확신했다.
어쩌면 이 대결은 찬야에게 끈기와 독기를 심어 줄 수 있는 그런 대결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유라를 응원해야 하는 건가?’
남량은 속으로 유라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찬야에게는 미안하지만.
“타앗!”
찬야는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공격을 가했다.
채채채챙!
찬야는 점점 더 속도를 올리며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자 유라가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찬야가 내지른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유라가 발로 그의 가슴팍 걷어차는 데 성공했다.
“큭!”
찬야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잠시 유라를 노려보던 그가 재차 초식을 펼쳐 공격해 왔다.
열 합이 지난 다음 열한 번째 합. 유라는 찬야의 검격을 옆으로 흘려보낸 다음 손바닥으로 턱을 가격했다.
신음을 흘리며 거리를 벌린 찬야가 얼얼한 턱을 쓸었다.
‘내 동작이 읽히는 건가.’
검을 수직으로 세운 유라가 툭 던지듯 말했다.
“언제까지 찔러볼 거야? 제대로 덤벼.”
“…….”
찬야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큰 초식이 온다.’
찬야가 검을 휘둘렀다. 검이 부드럽게 허공을 가르며 꽃잎이 휘날리듯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21초식, 화란춘성.”
슈슈슈슈슈슉!
셀 수 없이 많은 검격이 유라를 덮쳐 왔다. 유라는 재빨리 검을 휘두르며 검격을 피해 냈다.
그러나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벼락처럼 짓쳐 든 찬야가 유라의 어깨와 허벅지를 베었다.
“읏!”
유라의 중심이 살짝 무너졌다. 쉴 틈 없이 찬야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쩌엉!
유라는 다급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자세가 완전하지 않아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려 왔다.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찬야는…….’
예상대로 찬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음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22초식, 화우동산(花雨東山).”
화우동산은 꽃잎이 비처럼 떨어져 흩날리는 동산을 뜻한다.
초식명 그대로 찬야가 검을 휘두르자 수련장 전체에 꽃잎이 휘날리는 듯했다.
‘찬야. 정말 봐주지 않고 전력을 다할 생각이군.’
검기의 잔상이 마치 꽃잎이 떨어져 내리듯 유라를 향해 떨어졌다.
쇄애애애액!
유라는 빠르게 검막(劍膜)을 치며 찬야를 향해 쇄도했다.
찬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둘렀다. 칼끝에서 검기가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갔다.
“이십사수매화검법 23초식, 낙화유수(落花流水).”
파파파파팟!
간신히 찬야의 앞으로 도달한 유라에게 또다시 검기의 폭우가 떨어져 내렸다.
누가 봐도 찬야가 압도적으로 유라를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화르륵-!
유라를 덮은 검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 사이로 염화(炎火)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워. 이건 설마……!’
거대한 불덩어리를 정면으로 마주한 찬야가 경악하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이제 반격의 시작이다.’
유라는 전신을 불꽃으로 감싼 채 바닥을 박차고 찬야를 향해 질주했다. 찬야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것이 유 사매의 새로운 경지인가.’
강렬하다. 그리고 뜨겁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그대로 타서 죽어 버릴 것 같다.
결국 찬야는 외곽으로 우회하여 허점을 노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라는 이미 찬야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매화홍주검 7초, 석화광음(石火光陰).”
유라의 검이 일순 번쩍이며 찬야의 어깨를 정확히 베고 지나갔다.
‘빠르다……! 어서 막아야…….’
찬야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지켜보던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멍청한…….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자신의 장점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유리한 싸움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속도라면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앞선다. 그러나 반대로 정면에서 부딪치는 싸움이라면 매화홍주검이 한 수 위였다.
채채채챙!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며 찬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크윽!”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뚫릴 것이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한다.’
찬야는 다급히 검기를 쏘아 유라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유라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기를 쳐 내며 계속해서 돌진해 왔다. 그 모습이 마치 아수라를 연상케 했다.
채앵!
거친 쇳소리와 함께 찬야의 검이 손에서 빠져나와 허공으로 날아갔다.
찬야는 유라의 검이 날아드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강해졌구나. 사매…….’
화악-.
유라의 검이 찬야의 목에서 한 치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끝났군.’
비무는 유라의 승리였다.
유라가 검을 내리자 찬야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철컥.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유라가 손을 내밀었다.
“좋은 비무였다. 찬야.”
“…….”
그녀의 손을 붙잡은 찬야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에서 온갖 복잡한 감정을 읽은 유라가 몸을 돌려 그대로 수련장을 나갔다.
남량은 홀로 수련장에 남은 찬야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억울하고 분하겠지. 자신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한 유라에게 보기 좋게 당했으니. 찬야. 목숨을 건 노력이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구나.’
남량은 이 순간이 찬야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확신했다. 성장하는 데 패배의 기억만큼 훌륭한 원동력도 없는 법이다.
‘오늘의 비무를 잊지 마라.’
남량은 멍하니 서 있는 찬야를 뒤로한 채 수련장을 나왔다.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남량에게 찬야가 찾아왔다.
찬야는 어제 비무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다 알고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척 물었다.
“남 사제. 나, 어젯밤에 유 사매와 비무를 했어.”
찬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결과는…….”
“졌군. 표정에 다 써 있네.”
“…….”
잠깐 침묵하던 찬야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졌어. 그것도 처참하게.”
“그래서?”
“여기 오기 전에 유 사매한테 찾아가서 물었어.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경지를 넘어설 수 있었느냐고. 그랬더니 유 사매는 남 사제가 도와줬다고 하던데.”
“…….”
“어떻게 한 거야?”
남량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목숨을 건 도박을 했지.”
“목숨을 건 도박?”
“말 그대로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내 공격을 받아서 깨달음을 얻었어.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더 높은데도 내게 부탁까지 하면서.”
찬야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유 사매는 그만큼 경지를 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건가…….”
“그래. 필사적이었어.”
“그래서 내가 졌던 거구나.”
찬야는 허공을 쳐다보며 뭔가를 다짐하듯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남량을 향해 말했다.
“남 사제. 결심했어.”
“뭐를?”
“나도 목숨을 걸어 볼게.”
남량을 바라보는 찬야의 눈에 처음 보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독기마저 느껴지는 간절함이 말이다.
남량의 바람대로, 찬야는 유라와의 비무를 통해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을 손에 넣었다.
‘이것만으로도 사실 충분한 이득을 본 셈이지만…….’
남량은 찬야의 눈을 마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도박은 할 게 못 돼.”
“응?”
“정말 자신 있어? 목숨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남량이 표정을 바꾸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유라는 그만큼 절박했어. 자신의 노력을 짓밟고 무시하는 자에게 노력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지. 지금 네가 목숨을 걸게 하는 동기는 뭐지? 너는 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건데?”
“부끄러워서!”
찬야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별것 아닌 재능만 믿고 설쳤던 내가 부끄러워서! 그걸 견디지 못하겠어서 찾아온 거야.”
“그래? 그럼 정말 죽여도 나 원망 안 할 거지?”
“그, 그건…….”
순간 움찔한 찬야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솔직히 원망은 할 것 같은데…….”
“……야 인마.”
“그래도 부탁할게. 이대로 있으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서 검을 들지 못할 것 같아.”
찬야의 눈에서 평소의 장난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좋아.”
남량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출발은 예정대로 이틀 뒤. 그 전에 네가 경지를 넘을 수 있을지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나도 사매랑 똑같은 방법을 쓸 거야?”
“아니. 너랑 유라는 걷는 무도(武道)가 다른데 당연히 방식도 다르지. 네가 가야 할 길은 따로 있어.”
남량은 봇짐에서 작은 목함을 꺼내 들었다.
“일단 내력부터 키운 다음 시작해 보자고.”
“남 사제. 내가 가야 할 길이 대체 어디지?”
“너도 대충 짐작하고 있잖아?”
남량은 목함에서 매화단 한 알을 꺼내며 말했다.
“검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身劍合一).”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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