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찬야의 각성. 신검합일(身劍合一)(1)
남량과 유라는 나흘 동안 부지런히 움직여 사천성 파중(巴中)에 위치한 낭인회 본부에 도착했다.
세력의 규모가 구파일방에 비견할 정도로 거대함을 증명하듯이, 낭인회 대문은 종남파의 대문을 연상시킬 정도로 크기가 엄청났다.
남량과 유라가 문 앞으로 다가가자 보초 두 명이 앞을 막아섰다.
“이곳은 낭인회의 본부라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신분을 밝혀라.”
남량과 유라는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화산의 일대제자 유라입니다.”
“화산의 일대제자 남량입니다.”
보초는 두 사람이 입고 있는 매화 문양의 도포를 힐끗 쳐다보며 마주 예를 갖추었다.
“낭인회 소속 장규라고 합니다. 화산파의 제자분들을 뵙습니다. 본 회에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동문(同門)을 찾으러 왔습니다. 찬야라고…….”
“찬야? 아아……! 그 호색한…….”
장규는 기억났다는 듯 소리치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호색한. 호색한이라…….
남량은 짐작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수련 열심히 하고 있는 건 맞겠지?’
장규의 반응을 보니 살짝 불안해지는 남량이었다.
유라는 이를 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기서도 화산 망신을 시켜? 이런 개…….”
“진정해. 사저.”
유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킨 남량이 헛기침을 했다.
“네. 저희는 찬야 사형을 데리러 왔습니다. 사형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감사합니다.”
남량과 유라는 장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남량은 넓은 길과 수십 채의 전각을 보며 말했다.
“본부가 생각보다 크군요.”
“네. 낭인회에 등록되어 있는 회원들의 숫자는 대략 삼만 정도입니다. 당연히 건물도 많을 수밖에요.”
유라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파일방인 화산파조차 문도의 숫자가 일만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긴, 강호 무림의 낭인들은 대부분 이곳에 소속되어 있으니 놀랄 만한 일은 아닌가…….’
문득 이 많은 떠돌이 무사들을 통솔하는 수장, 남북 십성의 은왕(隱王)은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지는 유라였다.
“여기입니다.”
장규가 안내한 전각은 매우 크고 넓었는데, 건물 안에는 낭인들이 몰려 인파를 이루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요?”
남량의 물음에, 장규가 웃으며 대답했다.
“낭인들이 수련하는 수련장입니다.”
남량과 유라는 인파를 헤치며 수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련장 중앙에는 두 검객이 서로를 마주 본 채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바로 찬야였다.
“매일 이 시간에 대련을 하지요.”
장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남량은 찬야의 반대편에 선 젊은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내는 누구입니까?”
“참. 외부인이라 모르실 수 있겠군요.”
장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분이 바로 낭인회의 수장이자 남북 십성의 일원이신 은왕, 유서휘(劉恕徽) 회주님이십니다.”
“남북 십성?”
남량은 눈을 빛내며 사내를 집중해서 응시했다. 은왕은 남북 십성 중, 남량이 유일하게 겨뤄 보지 않은 상대였다.
‘은왕이라……. 낭인 출신의 무인.’
확실히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뭐, 남북 십성에 들었다는 것부터 보통 무인은 아니라는 뜻이지만.
“은왕께서는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올해 서른일곱으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상당히 젊은 나이에 남북 십성의 칭호를 얻었다. 과연 실력은 어떨까?
“그런데 왜 찬야가 남북 십성이랑 대련을 하는 겁니까?”
유라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장규는 턱수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대련이 아니라 가르침이라고 해야겠군요. 사실 찬야 도장이 이곳에 온 이후로 회주님께서 직접 무예를 봐주고 계시거든요.”
남량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정말입니까? 남북 십성이 찬야 사형을…….”
“네. 본래 회주님께서는 제자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헌데 찬야 도장을 보시고서는 강호에 드문 재능이라 평하시며 직접 가르침을 제안하셨습니다. 물론 찬야 도장도 기뻐하며 받아들였구요.”
“그랬군요.”
남량은 고개를 돌려 찬야를 응시하며 방긋 웃어 보였다.
‘걱정했는데, 좋은 기회를 잡았구나. 찬야.’
찬야의 재능은 결코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에 뒤처지지 않는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남북 십성에게 직접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그들을 뛰어넘는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한번 보자.’
남량은 기대에 찬 눈으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그럼, 시작!”
때앵-. 종소리를 신호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타앗!”
찬야가 호쾌한 기합 소리와 함께 은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쇄애애액!
찬야의 검술인 이십사수매화검법 특유의 빠르고[快] 변칙적인[幻] 검로가 그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역시. 검기가 한층 더 성장했구나.’
찬야의 검술은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찬야의 검이 은왕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채앵!
은왕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찬야의 검격을 막아 냈다. 찬야는 화려한 동작으로 자세를 바꾸며 연격을 가했다.
채채채채챙!
두 검이 부딪치며 허공에 불똥이 튀었다. 은왕은 여전히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검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집중해서 지켜보던 유라가 헉!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말도 안 돼! 저렇게 쉽게 막아 내다니!’
찬야는 한 차례 검격을 퍼붓고는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거리를 벌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은왕이 몸을 날려 찬야의 미간을 향해 검을 뻗었다.
슈육-!
마치 축지(縮地)를 쓴 것처럼 은왕의 신형이 순식간에 찬야의 앞에 도달했다. 남량은 나직이 감탄했다.
‘검을 찌르는 동작에 낭비가 없고 정확하다.’
찬야는 다급히 고개를 틀어 검을 피했다. 그의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큭!”
찬야는 이를 악물고 이십사수매화검법 21초식, 화란춘성 초식을 펼쳐 은왕을 공격해 왔다. 수십이 넘는 검의 잔상이 허공을 수놓으며 은왕의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바로 그 순간, 은왕의 검이 번득였다.
파파파파팟!
은왕의 검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자 잔상이 빠르게 흩어졌다. 초식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찬야가 기합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촤앙-!
두 검객이 서로 교차하며 검을 휘둘렀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결과를 기다렸다.
“찬야의 검이 은왕의 어깨를 스쳤어.”
유라가 중얼거렸다. 남량은 그녀의 눈이 더욱 예리해졌음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은왕의 검은 찬야의 허리를 정확히 베었지.”
남량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찬야의 요대(腰帶:허리띠)가 잘려 나갔다.
찬야는 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서 포권을 취했다. 은왕 역시 마주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낭인들이 두 사람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그때 남량이 툭 던지듯 말했다.
“두 사람의 검술은 많이 닮았어.”
“은왕과 찬야의 검술이?”
유라의 물음에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빠르고 변칙적인 검술. 물론 두 사람의 경지는 아직 하늘과 땅처럼 멀지만. 찬야가 은왕과 매일 대련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상대가 남북 십성인 이유뿐 아니라 그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먼저 올라서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마침 찬야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가 닿았다. 찬야는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남량은 피식 웃으며 똑같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유라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찬야는 나처럼 자신의 경지를 넘어섰을까?”
“아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유라는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럼 만약에, 지금 나와 찬야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 같아?”
“…….”
남량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유라는 고개를 돌려 남량을 말없이 응시했다.
잠시 고민하던 남량이 나직이 대답했다.
“모르겠군.”
***
남량은 찬야에게 사흘 뒤, 위지혁이 있는 당가로 떠나자고 말했고 찬야는 군말 없이 수락했다.
그날 밤,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끈 찬야의 방에, 누군가 찾아왔다.
한밤의 방문자는 다름 아닌 유라였다.
아무리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동문이라 해도 여인이다. 심지어 야심한 밤에 여인 홀로 사내의 방을 찾아오다니.
찬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사, 사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호, 혹시…….”
유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그런 거 아니니까.”
“아, 그렇구나. 그렇지? 하하.”
찬야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럼 왜 왔는데?”
찬야의 물음에 유라는 검을 들어 올렸다.
“비무.”
“응?”
“비무 한번 하자.”
“갑자기? 이 시간에?”
“그래. 너랑 한판 붙고 싶어졌어.”
“왜 나랑 붙으려고? 남 사제도 있는데…….”
유라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찬야를 응시했다.
“찬야.”
“응.”
“넌 남량을 제외하면 화산의 제자들 중, 누구보다 강했지. 타고난 재능과 폐관 수련으로 인해 나머지 제자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자랑했어. 나 역시 널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데?”
“며칠 전, 남 사제의 도움으로 내 경지를 넘을 수 있었어.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아직 찬야보다 약할까?’ 하는 생각이 말이야. 남량 그놈은 원체 상식을 벗어나는 놈이지만……. 넌 아니잖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범위에 속해 있거든.”
“…….”
그 순간 유라는 보았다. 찬야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화산의 제자들은 눈치채고 있는 사실이지만, 찬야는 원래 자존심이 꽤나 강한 편에 속했다. 처음 남량의 일격에 기절했을 때도 곧장 달려와 비무를 청하지 않았던가.
지금 찬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건 유라가 의도한 바였다.
유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널 찾아온 거야. 누가 남량을 제외하고 제일검인지, 가려 보자고.”
“……재미있네.”
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끼리는 진심으로 싸워 본 적이 없었지. 항상 남 사제의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그건 그렇지.”
“사매의 말을 들으니 나도 궁금해졌어.”
찬야는 금방 무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검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겨뤄 보자. 진심으로.”
“좋아.”
“수련장으로 가자.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을 거야.”
유라는 찬야의 뒤를 따라 수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붕 위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남량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겠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구경 가야겠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