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유라의 각성. 삼매진화(三昧眞火)(2)
남량은 이틀을 달려 해가 질 무렵 종남파에 도착했다.
종남산 너머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남량이 정문 앞에 서서 사람을 불렀다.
“화산에서 객(客)이 찾아왔으니 문을 열어 주십시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종남파의 상징, 월계화가 수놓인 검은 무복 차림의 남자가 나왔다. 그는 남량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화산에서 오셨습니까?”
“네. 화산파의 일대제자, 남량입니다.”
“음! 도장께서 소문의…….”
남량의 소문은 이미 전 강호에 퍼져 있었다. 백매화 남량. 혜성처럼 등장해 은영단 사건을 해결한 뒤 투연회에서 우승. 무림맹 간자들을 색출해 내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얼마 전에는 사파의 대거두 중 한 명인 폭혈검객 장태정을 단신으로 쓰러뜨렸다.
당금 강호에서 가장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인물을 말하라면 단연 백매화 남량을 꼽을 것이다.
‘아름다운 외모에 새하얀 머리카락. 그리고 화산의 도복까지……. 소문과 똑같군.’
사내는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신다는 서신을 미리 받았습니다. 해가 저무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남량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내가 말했다.
“장문인께서 백매화 도장이 오시면 곧바로 모셔 오라 지시하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네.”
고개를 끄덕인 남량은 사내의 뒤를 따랐다.
종남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은하궁(銀河宮).
화산의 상궁과 비교하면 조금 작지만, 나름대로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종남의 장로로 보이는 도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량은 그들을 향해 먼저 예를 갖추었다.
“화산의 일대제자, 남량입니다.”
“반갑네. 종남의 일 장로 공문(空雯)일세.”
공문은 남량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곧 오실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게.”
“예.”
남량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도군(刀君)을 기다렸다.
도군(刀君) 유종학(劉從鶴).
남북 십성의 일원이자 종남파의 장문인.
남북 십성 중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서열이 나누어져 있는데, 먼저 무림맹주 명왕과 남궁세가의 검성, 무당의 검제, 소림의 불제(佛帝) 등이 상위에 속해 있었고, 도군을 비롯한 당가의 독왕. 팽가의 도제(刀帝). 그리고 지금은 전(前)이지만 화산의 검선이 중위에 속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위에는 청성의 용제. 개방의 금왕(金王). 마지막으로 매화검선 은퇴 이후 새로 남북 십성에 오른 낭인회의 수장, 은왕(隱王)이 하위에 속해 있었다.
남량이 기억하는 종남의 도군은 매우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작자였다.
싸우는 도중에도 ‘너 같은 인재가 마도(魔道)를 걸어 아쉽다.’라거나, ‘너를 죽음으로써 단죄시켜 주마.’라며 어지간히 귀찮게 굴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남량 특유의 촌철살인 입담으로 뒤통수를 부여잡게 만들어 줬지만.
‘기본적으로 검파(劍派)인 줄 알고 있었던 종남에 도(刀)를 쓰는 자가 나왔던 것도 제법 흥미로웠고.’
마침 대전의 문이 열리고 도군 유종학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검은 도복을 펄럭이며 한 손에 장도(長刀)를 들고 다가오는 그는 매우 진중하고 무게가 있었다. 또한 옆에 한 명의 젊은 도사를 대동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남량은 일단 도군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화산의 일대제자 남량이 종남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유종학이 남량을 유심히 살폈다. 옆에 있던 젊은 도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량이 고개를 돌려 젊은 도사와 눈을 마주쳤다. 남량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한 젊은 도사가 살짝 움찔거렸다.
“자네가 매화검선의 후계자라고?”
“그분의 검을 이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후계자라 불리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화산의 제자로 환생한 이후로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이제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나 적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 정도는 익숙해진 남량이었다.
물론 아직도 짜증이 나긴 하지만.
유종학은 남량의 겸손한 자세가 마음에 드는 듯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겸손은 도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미덕이지. 스승이 잘 가르친 모양이군.”
“과찬이십니다.”
유종학은 젊은 도사를 불렀다.
“이쪽은 내 후계자인 포훈(鮑勳)이다. 포훈.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하거라. 스승의 벗이었던 매화검선의 제자이니라.”
남량의 시선이 젊은 도사를 향했다.
‘역시 후계자였나.’
장문인이 유일하게 곁에 데리고 올 정도면 당연히 후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보자……. 제법 재능도 있고 수련도 열심히 한 것 같다. 찬야랑 붙여 보면 좋은 승부가 될 듯했다.
포훈이라 불린 도사는 박력이 넘치는 동작으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종남파의 일대제자, 포훈입니다.”
“화산의 일대제자, 남량입니다.”
“백매화 남량 도장. 도장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활약이 아주 대단하시더군요. 특히 은영단 자객들과 100 대 1로 혈전을 치른 이야기는 아직도 저희 제자들 사이에서 화젯거리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포훈은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종남에 계시는 동안은 지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제가 신경 쓰겠습니다.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마십시오. 그저 도장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싶은 마음일 뿐입니다. 저희는 남들과 다른 ‘선택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네?”
남량의 눈썹이 살짝 씰룩거렸다. 느낌이 어째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냄새가 나는데…….
유종학은 포훈의 말이 신경에 거슬린 모양인지 표정을 찌푸리며 그를 꾸짖었다.
“네 이놈. 아직도 어쭙잖은 우월감에 젖어 있는 것이냐? 내 그리도 겸손해야 한다고 일렀거늘!”
유종학의 일갈에 움찔한 포훈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자가 실언했습니다.”
“쯔읏.”
유종학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남량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미안하군. 타 문파의 제자가 보는 앞에서 보일 행동은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그래. 장문인이 보낸 서신은 잘 받았다. 자네 사저를 데리러 왔다지?”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네. 저희 사저는 어디 있습니까?”
***
밤이 깊었다. 마침 종남산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량은 우산을 쓴 채 유종학이 알려 준 도관으로 향했다.
한참을 가자 낡은 도관의 모습이 보였다. 남량은 우산을 접은 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도관 내부는 어둡고 음침했다. 남량은 물과 식량이 든 보따리를 내려놓은 다음 꺼진 촛불에 손을 튕겼다. 그러자 불이 타오르며 어두운 도관 내부를 환히 비추었다.
“사저.”
도관의 구석에는 유라가 묵묵히 자신의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그 외에도 온통 붕대투성이였다. 남량의 시선이 유라의 얼굴로 향했다.
유라의 얼굴은 이전보다 말라 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전체적으로 매우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허나 눈빛만큼은 이전보다 더욱 흉흉했다. 마치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보는 듯했다.
유라는 남량의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남량은 도관의 벽을 툭툭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사저. 나야.”
“……!”
그제야 남량의 기척을 확인한 유라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남량은 싱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랜만인데 반응이 그게 뭐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길래 대놓고 들어왔는데도 눈치를 못 채?”
“네가 어떻게 여기를…….”
“무림맹 수련 끝나고 화산에 돌아왔는데 아직 아무도 안 돌아왔다잖아. 그래서 이 몸이 직접 한 명씩 데리러 왔지. 감사한 줄 알아.”
“아무도 안 돌아왔다고?”
“그래. 그런데 그 상처들은?”
유라는 붕대를 입으로 뜯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수련 중에 입은 상처.”
유라는 익숙하게 붕대의 매듭을 감았다.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남량이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몸을 저렇게 혹사시키며 수련한 만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력이 고강해져 있었다.
남량은 그녀에게 물이 담긴 죽통을 건네며 말했다.
“수고했어. 이제 그만 가자.”
“……뭐?”
“뭘 그렇게 놀라? 이제 곧 무림대회가 코앞이야. 나머지 녀석들도 전부 데리고 낙양으로 가야 할 거 아니야. 그럼 평생 여기서 죽치고 있을 생각이었냐?”
“…….”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장문인한테 인사드리러 가자고. 다음은 여기서 가장 가까운…….”
“안 가.”
유라가 남량의 말을 끊으며 물을 벌컥 들이켰다.
남량은 난데없는 유라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저. 방금 뭐라고 했어?”
“지금은 여길 떠날 수 없어.”
“이유가 뭔데.”
유라는 이를 부득 갈았다.
“포훈. 그 개자식을 내 손으로 이기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않을 거다.”
포훈? 포훈이라면……. 아, 유종학의 제자 말인가.
“그자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사저.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남량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다. 유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였어. 내 명성을 들었다며 종남파 일대제자들이 먼저 비무를 청해 오더군. 한 세 명쯤인가? 연속으로 쓰러뜨리고 잠시 쉬려는데 포훈, 그놈이 다가왔어. 자기랑도 한번 붙어 보자고.”
“그런데?”
“놈이 도군의 후계자였다는 사실은 비무 도중에 알았다. 난 그놈에게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철저히 패배했어. 그리고 종남파의 일대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내 머리를 짓밟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너같이 선택받지 못한 것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날 뛰어넘을 수 없다.’라고. 그때 들린 비웃음 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해.”
“…….”
남량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더라니……. 그 새끼, 딱 효초아 같은 부류였군. 자신이 남들보다 우위에 서 있는 것을 즐기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벌레 취급하는 부류.’
유라는 죽통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죽통이 유라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꽉 쥔 주먹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외쳤다.
“난 인정 못 해. 그놈만큼은 내 손으로 기필코 이겨 보이겠어. 그 전까지는 종남산을 나가지 않을 거다.”
“…….”
남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억지로 패서 데려갈 수도 없고…….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는데.’
남량이 살펴본바, 포훈의 경지는 남궁월보다는 한참 떨어지지만 그래도 아직 유라가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남량의 밑에서 계속 수련하면 언젠가는 뛰어넘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무리였다.
‘딱 하나. 이길 방법이 있기는 하지.’
시간은 별로 없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대신,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남량은 유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사저의 마음은 잘 알겠어.”
“건방지게 사저 머리를…….”
투덜거리긴 해도 손을 쳐 내지는 않았다.
손을 뗀 남량의 눈빛이 일순 싸늘해졌다.
‘그건 그렇고……. 이 종남파 새끼들. 감히 누굴 보고 비웃어? 제대로 버릇을 고쳐 놔야겠군.’
다음 날 아침, 남량은 일대제자들이 수련하는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