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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68화 (68/164)
  • <68화>

    남량의 각성. 환골탈태(換骨奪胎)(4)

    화악-!

    남량은 강렬한 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혈관이 끊어지는 통증도, 배를 찔린 감각도 없다.

    마치 등선(登仙)한 신선처럼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남량은 그 모든 걸 넘어서는 충격을 받았다.

    ‘용(龍)…….’

    온통 새하얀 공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대한 황룡(黃龍) 한 마리가 남량의 앞에 있었다.

    ‘허상인가? 아니다. 이 존재감……. 절대 허상이 아니야.’

    황룡의 붉은 동공을 마주한 순간, 남량은 초월적인 존재를 마주한 충격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듯했다.

    용의 앞에서 남량은 발밑의 개미와도 같은 존재. 한없이 약하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황룡은 잠시 남량을 응시하며 이빨을 드러내더니, 남량의 마음속으로 자신의 말을 전해 왔다.

    -반신(半神)인가…….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부여잡았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정신에 가해지는 충격이 엄청났다.

    ‘인외(人外)의 존재와는 대화를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황룡은 그런 남량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내 뜻을 전했는데도 정신이 온전한 것을 보니 하찮은 미물은 아닐 터. 비록 신격(神格)을 얻지는 못했으나 네 영혼은 그에 가깝구나.

    남량은 그 말의 의미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의 나는 자연경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자연경에 오른다는 것은 곧 신과 같은 절대자의 위치에 오른다는 것. 비록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한없이 가까이 다가갔고, 그럼 천마였던 내 영혼도 신의 정신에 가까워졌다는 뜻인가…….’

    황룡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량을 노려보았다.

    -너에게서 나의 냄새가 나는군. 보아하니 이미 여의주의 힘을 한 번 얻은 모양이야.

    “…….”

    뭔가 남의 물건을 멋대로 훔치다 걸린 기분이다.

    빌어먹을. 자기 여의주 사용했다고 화내는 건가?

    그때, 황룡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허나 지금은 죽어 가고 있구나. 정신과 다르게 육체는 한없이 나약하군그래.

    할 말 없다. 천마 위광의 육체에 비하면 이 몸뚱아리는 종잇장에 불과했으니까.

    남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즉에 여의주의 힘이나 좀 쓰게 해 줬으면 이렇게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망할 용새끼 같으니.’

    물론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어찌하여 새로운 육체에 깃들어 세상을 방황하는가.

    황룡의 물음에, 남량은 솔직히 대답했다.

    “복수를 위해서.”

    -복수라……. 허면 이루었는가?

    황룡은 남량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죽었으니 이루지 못했겠군.

    “…….”

    남량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저 지렁이 새끼가 아까부터 사람을 계속 도발하는군.’

    차마 자존심이 상해 ‘그래.’라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것도 복수할 대상이 아니라 한낱 암살자 따위에게 당했다는 말은 더더욱.

    황룡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여의주를 삼켰으니 내 힘을 사용했다면 이겼을 터. 허나 어떤 방법을 써도 내 힘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미궁에서 잠깐 얻었던 그 힘, 그 힘만 손에 넣었다면 장태정 따위…….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겼을 것이다.

    ‘방법이라도 물어볼까? 그동안 궁금해 죽을 것 같았는데.’

    남량은 용기를 내 황룡에게 질문했다. 황룡은 잠시 침묵했다.

    -방법은 한 가지다. 바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여의주를 손에 쥔 주인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여의주는 위험을 감지하고 일시적으로 힘을 개방한다. 네가 여의주의 힘을 처음 썼을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터.

    “……아!”

    남량은 깨달음의 탄성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왜 그걸 몰랐을까? 처음 힘을 얻었을 때에도 남량은 폭혈기공의 부작용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죽음이 여의주의 힘을 꺼내는 열쇠였단 말인가?

    남량의 두 눈에 희망의 빛이 번쩍였다.

    -허나 문제는, 네 육체가 이전보다 죽음에 가까워 있다는 것이다. 여의주의 생력(生力)을 몸에 불어넣어 살리기 위해서는 영혼이 그 힘을 감당해야 한다. 네 몸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생력은 이전의 수십 배는 족히 될 터. 아마 미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일 테지.

    “버티면, 버티면 살 수 있는가?”

    -살 수 있다. 또한 육체가 재구성되어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운명인가? 아니면 벌써 죽지 말라는 염라의 뜻인가?

    또다시 생사의 갈림길에서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남량은 순간 황룡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폭소를 터뜨렸다.

    ‘생명줄 한번 길구나. 징그러울 정도로 길어! 하하.’

    황룡은 그런 남량을 비웃으며 말했다.

    -여의주의 생력을 받아들이는 고통을 우습게 아는군.

    웃음을 거둔 남량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살아서 만나야 될 놈들이 있거든.”

    -좋다.

    황룡은 천천히 아가리를 벌렸다. 직후, 입에서 시야를 가득 채운 휘황찬란한 금빛 섬광이 터졌다.

    섬광은 거대한 해일처럼 남량을 덮쳐 왔다. 남량은 이를 악물며 두 팔을 펼치고 밀려오는 섬광을 받아들였다.

    콰아앙!

    섬광이 남량을 뒤덮으며 눈과 코, 입을 통해 안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남량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피가 모조리 밖으로 빠져나가며 새로운 피가 그 자리를 채웠다. 뼈가 수없이 부러졌다가 다시 붙기를 반복했다.

    여의주의 생력이 기존의 육체를 바꾸며 새롭게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호에 전해지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경지와 비슷했다.

    드드득-!

    태어나길 무골(武骨)로 태어난 천마 위광과 달리, 남량의 육체는 약하기 그지없었다. 몸이 버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위태롭게 요동쳤다.

    그러나 남량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할 수 있다. 고통을 이겨 내고 밀려드는 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거야.’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량의 눈에, 삼천위의 모습과 매화오절의 모습이 겹치며 지나갔다.

    남량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냐. 내 반드시 살아 주마. 나는, 나는…….’

    그 순간, 산산이 조각나며 붕괴된 육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 같던 고통이 사라지고 굳은 의지가 그 자리를 채웠다.

    남량은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달싹였다.

    “나는 천마, 위광이다.”

    ***

    한편, 남량을 처리한 장태정은 검을 집어넣으며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이걸로 네 원수는 갚았다. 장제…….”

    일순, 장태정은 걸음을 멈추며 나직이 신음을 토했다.

    ‘내상이라도 입은 것인가? 어느 틈에?’

    손을 들어 입술을 쓸었다. 손등에 피가 묻어 나왔다.

    장태정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무서운 놈이다. 백매화.’

    절정의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초절정의 검객을 몰아붙인 자.

    약관도 채 안 된 나이에 이 정도 성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적이지만 존경스럽구나.’

    이곳에서 죽지 않았다면 훗날 남북 십성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는 재목이 분명했다.

    장태정은 남량이 묻힌 방향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너 또한 강호에 몸을 담았으니 이런 결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터. 너도 결국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져 버린 수많은 천재들과 같은 운명인 것이다.”

    고개를 돌린 장태정이 대나무 숲을 벗어나려는 때였다.

    숲을 헤치며 장패를 비롯한 용천채의 무리가 장태정의 길을 막고 나섰다.

    장태정은 미간을 좁히며 장패를 향해 말했다.

    “쓰레기들이……. 감히 누구 앞길을 막는 것이냐.”

    “화산의 도사님은 어디 계시느냐!”

    장패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장태정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그놈은 죽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였지.”

    “그렇다면 네놈을 그냥 보내 줄 수 없다.”

    “뭐라고? 저 도사 놈이 죽었는데 네놈들이 무슨 상관이냐?”

    “상관? 없었지. 그런데 조금 전에 생겼어.”

    장패는 큼지막한 박도를 집어 들며 이를 갈았다.

    “그분은 한낱 녹림 무리의 목숨을 살려 주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한때 흑도였던 우리들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었다고! 그런 분을, 방금 네놈이 죽인 것이다. 알겠느냐?”

    “허! 그래서, 지금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찮은 개미 새끼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정도가 있지…….”

    장태정이 짙은 살기를 퍼뜨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오냐. 내 그 용기를 높이 사, 네놈들을 이 손으로 직접 토막 내어 숲 곳곳에 뿌려 주마.”

    초절정의 고수가 내뿜는 살기에도 장패를 비롯한 용천채의 산적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죽어라.”

    장태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패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장패는 검이 지척까지 다가오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채앵! 하고, 금속의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목을 가르는 소리가 아니다. 다음 순간, 장태정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어느새 장패의 앞을 남량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남량이 손을 들어 장태정의 칼날을 붙잡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남량은 장태정의 표정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왜,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아?”

    남량의 전신이 황금빛의 불꽃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세였다.

    “달라졌지? 환골탈태는 오랜만이라 적응이 좀 안 되네. 덕분에 경지도 초절정으로 올라온 것 같아. 그러니 네게 감사 인사를 꼭 전해야 할 것 같군.”

    “뭐, 뭐라고? 지금 장난하는 거냐?”

    “장난으로 들렸다면 심히 유감이군. 난 지금 한없이 진지한데 말이야.”

    남량은 천천히 장태정의 칼날을 옆으로 밀어냈다. 장태정은 두 손으로 검을 쥐며 온 힘을 쥐어짰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봐, 너 원래 이렇게 약했나?”

    “으아아아!”

    “확실히 경지의 차이가 크긴 해. 절정의 경지에 있을 때는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데, 같은 자리에 서서 보니 그냥 그런 놈이었잖아?”

    “입 닥쳐라!”

    장태정은 검을 버리고 남량의 얼굴을 향해 권격을 날렸다.

    남량은 날아오는 주먹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 냈다.

    쩌엉! 장태정의 주먹이 황금빛 불꽃에 튕겨 나오며 오히려 그의 손에 화상을 입혔다.

    장태정은 자신의 손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괴성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 있어. 지금부터 보여 줄게.”

    남량은 쥐고 있던 검을 장태정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지금 막 경지를 넘은 참이라 가볍게 몸을 좀 풀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연습 상대 좀 해 줘야겠다.”

    “이, 이놈이 감히-!”

    장태정의 두 눈에 실핏줄이 돋았다. 그는 전신에서 검은 기세를 미친 듯이 뿜어내며 외쳤다.

    “겨우 그따위 기세로 나를! 감히 이 폭혈검객 장태정을 이길 수 있을 성싶더냐! 이번에야말로 전력을 다해 죽여 버리겠다. 내 손으로 네놈을 직접 저승 가장 밑바닥에 파묻어 주지!”

    “아주 좋아. 그런 자세. 부탁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라.”

    남량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화양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멍하니 서 있던 장패가 남량을 향해 말했다.

    “도, 도사님……. 정말 살아 계신 겁니까?”

    “아, 그래. 너희들이 있었지.”

    남량은 고개를 돌리며 장패를 향해 웃어 보였다.

    “방금 한 말, 멋있었다. 더 마음에 들어.”

    “아…….”

    “나는 의리 있는 사내를 좋아하지. 강한 사내보다 더 말이야. 저놈만 금방 해치우고 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장패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위험할 수 있으니 조금 떨어져 있거라.”

    장패가 멀찍이 떨어지자 남량은 미소를 지으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장태정을 향해 말했다.

    “뭐 하나? 안 덤비고.”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보자!”

    터엉! 바닥을 박찬 장태정이 유성처럼 쇄도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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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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