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남량의 각성. 환골탈태(換骨奪胎)(2)
일순 남량과 거한들 사이에 적막이 찾아왔다.
멍한 표정으로 남량을 쳐다보던 장패가 고개를 돌려 부하에게 물었다.
“저놈이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냐?”
“정확히 들었습니다. ‘뭘 봐?’라고…….”
“그렇지? 나한테 한 소리 맞지? 으허허허.”
장패는 실성한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웃음을 그치며 사나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어린놈이 겁이 없구나.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알 게 뭐야.”
장패는 고개를 치켜들며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잘 들어라. 이 몸이 호남 일대의 산을 전부 접수한, 우는 아이도 이름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치게 만든다는 용천채(龍天砦)의 채주, 장패(張敗) 님이시다!”
“녹림도 맞네.”
용천채라. 하여간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산적 따위가 이름은 참 거창하게도 지었다.
남량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용천채고 뭐고, 시끄러우니까 온천에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라. 내가 지금 조용한 분위기를 방해받아서 짜증이 나거든?”
“허? 또 나한테 한 소리냐? 으하하하. 환장하겠구만.”
장패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렇게 무게를 딱 잡고 말하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 하면서 들어줄 것 같더냐?”
아니. 한눈에 봐도 말귀 못 알아 처먹게 생기긴 했다.
남량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간만에 조용히 좀 쉬나 했는데……. 빌어먹을.”
남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덤빌 거야? 덤빌 거면 빨리 덤비고.”
거한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으로 남량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들의 눈에는 여리여리하게 생긴 사내놈 한 명이 제발 좀 죽여 달라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장패는 당황한 표정으로 용천채 부두목, 우(憂)를 향해 말했다.
“우야.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 그냥 죽여 버려?”
우는 고개를 저으며 장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냥 좀 미친 아이 같은데, 적당히 기절시켜서 밖에 던질까요? 얼굴에서 귀티가 나는 걸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명문자제 같은데, 괜히 뒤탈이 생길 수도 있고…….”
“그래라. 내 산적 인생 수십 년 만에 저런 미친놈은 처음 본다. 아, 갑자기 두통이 막 밀려와…….”
우는 턱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들었지? 적당히 혼내 주고 던져 놔.”
수하들은 주먹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남량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중 한 놈이 남량의 앞에 서서 씨익 웃어 보였다.
“허, 참. 이걸 대체 어딜 때려야 해? 한 대만 맞아도 바로 죽겠구만. 힘 조절하기 힘든데…….”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걸 어딜 때려야 안 죽으려나…….”
“이건 또 무슨…….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맞아라 새끼야!”
답답해진 거한이 다짜고짜 남량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직후, 남량의 손이 벼락처럼 뻗어 나와 거한의 가슴팍을 슬쩍 때렸다.
터엉! 남량의 손끝에서 충격파가 터지며 거한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끄억!”
한참을 날아 바닥에 떨어진 거한은 입에서 거품을 문 채 부르르 떨다 쓰러졌다.
그 모습을 굳은 얼굴로 쳐다보던 장패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우야?”
“삼식이가 붕- 하고 날아가서 떨어졌습니다요. 두목.”
“내가 지금 그걸 묻냐? 나도 눈 있어 이 새끼야!”
우는 입술을 깨물며 다급히 장패의 팔을 붙잡았다.
“두목. 저놈 혹시……. 무림인 아닐까요? 아니 왜, 무림에는 새파랗게 어린 놈도 하늘 붕붕 날아다니고 그러잖수!”
“그건 다 지어낸 이야기지! 요즘 같은 시대에 어린 고수가 어디 있어? 다 우연이야! 겁먹지 말고 덤벼!”
산적들이 남량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남량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멍청한 거야, 충심이 대단한 거야? 동료가 날아가 쓰러졌으면 적어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이것들은 진짜……. 하여간 머리가 무식하면 몸이 고생이야.”
남량은 산적들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그들의 팔을 붙잡고 가볍게 던져 버렸다.
산적들은 허공에 몸이 떠오른 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버둥거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뭐,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장패는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는 겁에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무림인 같다고!”
“나도 진짜인 줄은 몰랐지!”
장패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칠 기회를 노렸다. 그때 남량이 거한 한 명을 걷어차며 말했다.
“도망쳐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다. 포기해.”
“……네.”
장패는 울상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스무 명가량 되는 산적들을 전부 집어 던진 남량은 장패의 앞으로 다가왔다.
“뭐 해? 넌 안 덤빌 거냐?”
“……그, 그게 말입니다.”
장패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때, 우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두목. 그럼 저는 두목만 믿고 물러나겠습니다.”
“우야. 야 인마……! 그냥 가면 난 어떡하라고!”
홀로 남은 장패는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대협. 저희가 미처 대협을 몰라 뵙고 실수를 그만……. 하하하. 넓은 도량으로 한 번만 용서를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남량은 화양검을 챙기며 검집으로 장패의 머리를 때렸다.
“기회는 한 번이다. 내일부터 내 눈에 띄면 죽을 줄 알아.”
“네! 물론입니다! 분부대로 하고말고요!”
장패는 얼얼한 머리를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쯧. 오늘 온천은 다했네.’
남량은 혀를 차며 객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며칠 뒤, 남량은 짐을 챙겨 객방을 나왔다.
‘화산에 도착하면 무림대회 전까지 수련에 매진해야지.’
당장의 목표는 초절정에 들어가는 것.
은영단주 흑표. 순찰당주 양봉. 잔혈검객 장제 등, 다양한 초절정의 고수들을 상대로 이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양신경의 능력과 폭혈기공이라는 비기 덕분이었다.
‘언제까지 그 능력들에 의존할 수는 없어.’
무림맹 칠검대 대주들과의 대련. 그리고 무림맹주 고경홍과의 대련. 그것만으로 남량은 수개월 동안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량은 한없이 초조하고 답답했다.
‘효초아. 이제 나도 놈의 표적 중 하나일 것이다. 언제 내 목숨을 노려 와도 이상하지 않아. 당장 지금 날 공격해 올 수도 있다. 만약 놈이 장제와 비슷한 경지의 초절정 세 명을 보낸다면, 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강해질 시간이 부족했다.’, ‘조금만 더 일찍 환생시켜 주지 그랬냐.’, ‘아니면 날 좀 도와줘야지.’라고 염라의 앞에 가서 변명할 것인가?
강해져야 한다. 놈들을 쓰러뜨리기 전에 적어도 내 몸 하나는 완벽하게 지킬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가져야 한다.
‘여의주의 힘만 쓸 수 있었어도…….’
지하미궁을 나온 이후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 여의주의 힘을 깨우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지하미궁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천양신경으로 만족해야 해?’
제발 누군가 방법을 좀 알려 줬으면…….
남량은 한숨을 내쉬며 대나무 숲을 지나쳤다.
그때, 숲속에서 검은 그림자 무리가 튀어나와 남량의 앞길을 막아섰다. 누군가 했더니 며칠 전 남량과 부딪쳤던 녹림도 일당이었다.
‘이름이 용천채라고 했던가?’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춘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보복이라도 하러 온 거냐? 내가 분명 알아듣게 경고했을 텐데. 기회는 한 번 뿐이라고.”
“도사님!”
장패가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 아프게 소리를 지르고……. 빨리 덤벼.”
남량은 말에서 내리며 주먹을 풀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패를 비롯한 산적 무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남량은 날리려던 주먹을 멈추고 물었다.
“너희들 지금…… 뭐 하냐?”
방심하게 만들고 기습하기. 뭐 그런 건가?
장패는 한술 더 떠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도사님. 저희를 부하로 받아 주십시오!”
“……뭐?”
“저희는 한때 흑도 문파에 속해 있었지만 악행을 참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놈들입니다. 허나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칼 쓰는 것밖에 없어 산적질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도사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이 한 목숨, 이번에야말로 뜻 깊은 일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부디 저희를 데려가 주십시오!”
남량은 주먹을 내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개 들어 봐.”
“네?”
“나 한 번 쳐다보라고.”
장패는 고개를 들어 남량을 응시했다. 남량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거짓을 말하는 눈동자는 아니다. 하지만 흑도에 몸을 담고 있던 놈들을 화산파로 무작정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 이렇게 해야겠군.
“나는 쓸모없는 자는 데려가지 않아.”
“도사님!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분명 쓸 곳이…….”
“화산파에는 여러 속가 문파가 있다. 일단 그곳에 제자로 들어가서 몇 년 동안 수련해. 제법 자질이 보인다 싶으면 내 너희들을 거두겠다. 진심으로 바뀌고 싶으면 내 마음에 들도록 열심히 수련해. 알겠나?”
남량은 끝으로 인상을 쓰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만약 문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문제 될 만한 짓을 했다는 소식이 내 귀에 들리기만 해 봐라……. 중원 끝까지 찾아가서 내 손으로 직접 아작을 내 버릴 테니까.”
“무, 물론입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량은 장패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근골도 제법 발달해 있고 근성도 있어 보인다. 제대로 수련하면 운휘까지야 무리더라도 그럭저럭 쓸 만할 것 같다.
“좋아. 이제 그만 가 봐…….”
손을 내저으며 몸을 돌린 남량이,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대나무 숲 건너편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인기척이 없었는데…….’
검고 긴 장발에 시커먼 흑의(黑衣). 손에는 기다란 장검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남량을 가만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남량이냐?”
“그런데. 네놈은 누구지?”
“내 이름은 장태정(張兌情).”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남자, 장태정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또 다른 검 한 자루를 뽑아 남량의 앞으로 던졌다.
남량은 자신의 발 앞에 정확히 박힌 검을 바라보았다.
“이 검, 낯설지 않겠지?”
남량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내 손에 죽은 놈들이 한두 명이어야지.”
장태정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잔혈검객 장제. 그놈을 기억하느냐?”
“장제? 아……. 낙양상단 단주 하추의 호위로 있던 그놈 말이군. 그래. 기억한다. 제법 애를 먹었던 상대였거든. 그런데 이 검을 왜 네놈이 가지고 있는 거지?”
“당연하지. 내가 그 장제의 아버지니까.”
장태정이 서슬 퍼런 눈으로 남량을 쳐다보았다.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 간 남량, 네놈을 찾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것이다.”
“자식의 복수인가?”
남량은 말을 한 곳으로 보내며 화양검을 집어 들었다.
용천채의 산적들은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슬슬 물러났다.
스릉. 장태정은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은원(恩怨)은 반드시 갚는 것이 이 강호의 도리.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는 원수를 갚겠다.”
장태정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네놈,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냐?”
남량의 날카로운 질문에 장태정이 순간 멈칫했다.
남량은 피식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누가 배후인지 대충 알 것 같군. 아들의 복수를 원하는 아버지라. 암살자로 쓰기 딱 적당하겠어.”
빌어먹을. 온천이고 뭐고 그냥 바로 갔어야 했나.
‘효초아. 이 발 빠른 새끼…….’
남량은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정신 차려라. 상대는 장제와 비교도 안 되는 고수다. 자칫하면……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겠군.’
장태정은 짙은 살기를 퍼뜨리며 칼날을 세웠다.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죽여서 내 아들 곁으로 보내 주마.”
“미안한데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은 몸이라.”
남량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다. 와라.”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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