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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61화 (61/164)
  • <61화>

    복마전(伏魔殿). 금적금왕(擒賊擒王)(2)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웃으며 말하는 장제를 노려보며, 남량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 이자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하추를 놓치고 만다.’

    남량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어중간한 각오로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 전력을 다해, 단숨에 승부를 내야만 한다.

    ‘놈과 나의 경지. 그 차이를 내가 가진 모든 패를 써서 따라잡는다.’

    화르륵-!

    남량의 전신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거리며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터져 나왔다. 매화검선의 비기(秘技)인 폭혈기공을 펼친 것이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기세에 장제가 눈살을 찡그렸다.

    ‘죽을 각오로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연 것인가? 아니다. 그것과는 달라……. 대체 무슨 사술을 쓴 것이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몸이 경고하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장제의 표정에서 긴장하는 기색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하압!”

    남량이 기합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쩡쩡쩡! 쩌엉!

    검과 검이 부딪치는데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남량과 장제의 격돌은 호각(互角).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내공의 이야기. 내공이 비슷해진 이상, 싸움을 결정짓는 요소는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경험-.

    남량은 검으로 장제의 목을 노리며 발꿈치로 장제의 발등을 찍어 버렸다.

    콰직! 방어가 취약한 발등의 뼈가 부서지며 장제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번에는 검집으로 무릎을 노리며 동시에 얼굴을 걷어찼다.

    연이은 변칙 공격으로 장제의 흐름이 깨진 틈을 노려, 남량은 장제의 가슴팍에 검격을 날렸다.

    콰앙!

    장제는 다급히 방어했지만 충격을 받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량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왜, 억울해? 명색이 흑도인데, 꼴에 무사로서의 자존심은 있다는 건가?”

    “……도사란 놈이 길바닥에서 쓸 법한 방식을 썼다는 게 놀랐을 뿐이다.”

    장제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이제 그따위 허접한 공격은 안 통한다!”

    장제는 또다시 내력을 끌어모아 자신의 절기, 혈선만참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량이 먼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군.”

    “과연 그럴까?”

    혈선만참을 펼치는 순간만큼은 큰 절기이니만큼 장제 역시 무방비 상태일 터.

    만약 혈선만참을 피해 놈의 지척으로 파고들 수만 있다면, 단숨에 끝을 낼 수 있다.

    그러나 혈선만참의 난격(亂擊)을 피하기 위해서는 날아드는 검로를 전부 파악해야 한다.

    “그런 게 가능할 성싶더냐!”

    콰과곽-!

    장제의 검끝에서 터져 나온 검강의 그물이 남량을 덮쳐 왔다.

    순간, 남량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득였다.

    슈악-! 남량의 신형이 사라지며 순식간에 장제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장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통찰안.

    남량은 만물을 꿰뚫는 통찰안의 능력을 발휘해 날아드는 검로를 모두 파악한 뒤, 검강을 피해 낸 것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가진 패를 전부 꺼내 들어 이루어 낸 결과였다.

    “대체 네놈은 정체가-.”

    경악하는 장제를 향해, 남량이 차갑게 내뱉었다.

    “패자에게 그걸 알 권리는 없다.”

    남량의 검이 날아듦과 동시에 장제도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질렀다.

    『매화천수검의 5초식, 상청도월(上淸渡月)은 단 세 번의 검격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기술. 1초에 사선 베기로 무릎을 베어 중심을, 2초에 횡 베기로 어깨를 베어 무기를, 3초에 올려 베기로 턱을 베어 목숨을 앗아 간다.』

    퍼퍼퍽!

    남량의 검이 갈지[之]자를 그리며 차례대로 장제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무기를 떨어뜨렸다.

    스걱-.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량의 올려치기가 작렬하며 피분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칼을 떨어뜨린 장제가 하늘을 올려다본 채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남량은 장제를 쓰러뜨리자마자 서둘러 폭혈기공을 풀었다. 그러자 반동이 찾아오며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허억, 허억……. 컥컥.”

    남량은 피를 토해 내며 장제의 시체를 넘어 뒷문으로 나섰다. 이미 하추가 탄 마차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남량은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남은 내력을 모아 월인비를 펼쳤다. 땅을 접어 달리는 축지(縮地)로 남량은 단숨에 마차를 따라잡았다.

    “서라!”

    마차 지붕으로 올라탄 남량이 마부의 옷깃을 잡아 내던졌다. 그러자 말이 화들짝 놀라며 몸부림을 쳤다.

    히히힝!

    마차가 덜컹거리며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부딪히며 큰 소리와 함께 전복되었다. 마차 안쪽에서 하추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남량은 바닥으로 내려와 천천히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으, 으아악!”

    문을 열고 기어 나온 판매상은 피에 젖은 남량의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남량은 그의 뒷목을 수도(手刀)로 가격해 기절시켰다.

    “이 망할 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망신창이가 된 하추가 밖으로 나오며 남량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 건방진 도사 놈 같으니! 장제! 장제! 어디 있느냐!”

    “장제는 죽었다. 조금 전에 내가 저세상으로 보내 주었지.”

    “뭐라고? 그럴 리가 없다. 장제를 고용하느라 들인 비용이 얼마인데! 광동제일검이 그리 쉽게 죽을 리 없……. 헉!”

    남량이 하추의 목에 칼을 들이밀자 하추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장담하는데 그놈이 저승에서 내 정체를 알면 오히려 영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할걸?”

    “그, 그게 무슨…….”

    “나중에 죽으면 가서 물어봐.”

    퍼억! 남량은 칼등으로 하추의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마침 상황을 끝낸 황룡대와 흑영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짝! 짜악!

    희미한 불빛만이 들어오는 어두운 지하. 그곳에서 고위영은 사지가 결박당한 채 효초아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있었다.

    “병신 같은 새끼. 겨우 아편 하나 밀수해 오는 것도 못해서 꼬리를 잡혀? 아랫것들 관리를 그따위로밖에 못하나?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고위영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분명 정보가 새어 나갈 곳이 없었을 텐데…….”

    “준비해 낸 변명이 겨우 그거야? 조금 더 그럴싸한 변명 없어? 응? 말해 봐.”

    효초아는 광기에 찬 미소를 지으며 피에 젖은 채찍을 바닥에 내던졌다.

    망신창이가 된 고위영은 상처를 타고 흐르는 핏물을 가만히 응시했다.

    “네놈의 멍청함 때문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어. 우리가 준비해 놓은 간자들도 전부 죽었고. 고작 너 따위의 실수로 내가 준비한 대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단 말이야. 알아들어?”

    효초아는 고위영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고 으르렁거렸다.

    고위영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했다.

    “회주님…….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왜? 기회를 주면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이미 낡고 쓸모없어진 칼을, 왜 굳이 주워서 써야 하지?”

    효초아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위영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고위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기필코 맹주를……. 제 손으로 끝장내겠습니다.”

    효초아가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네가? 네가 명왕을 죽이겠다고? 무슨 수로? 맹주는 천하제일인이며 천마 위광과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현경(玄境:화경의 윗단계)의 고수인데. 암살을 하게? 독약을 먹일 거야? 하물며, 네놈의 아비를 스스로 죽이겠다고? 과연 천륜을 어기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고위영은 피를 토하며 격하게 소리쳤다.

    “교에……. 아니, 회에 충성을 다한 그 순간부터 천륜 따위, 벗어던진 지 오래입니다. 회주님. 제발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니까 어떻게 죽일 거냐고!”

    효초아가 언성을 높이자 고위영이 발악하듯 대답했다.

    “폭약(爆藥)!”

    폭약이라는 단어에 효초아와 그 뒤에 말없이 시립해 있던 낭연청마저 관심을 보였다. 고위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맹주전마저 날려 버릴 폭약을 쓴다면, 제아무리 반신(半神)의 경지에 선 맹주라고 해도 꼼짝없이 죽은 목숨입니다.”

    “폭약이라…….”

    잠시 고민하던 효초아는 고개를 돌려 낭연청에게 물었다.

    “이자를 한 번 더 믿어 볼까? 네 결정에 맡겨 보지.”

    낭연청의 시선이 고위영을 향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낭연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좋아. 이자를 풀어 줘.”

    낭연청이 검을 뽑아 휘두르자 고위영의 사지를 결박하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고위영이 비틀거리며 효초아의 발 앞에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주님! 마교천세(魔敎千歲)! 마교천세!”

    효초아는 죽통의 마개를 따고 고위영의 얼굴에 냉수를 부어 주며 말했다.

    “잘해.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믿어 볼 테니까.”

    “회주님의 믿음을 결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효초아는 빈 죽통을 바닥에 던지며 그곳을 나갔다. 낭연청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고위영은 핏발이 선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

    남량 일행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다음 날, 맹으로 복귀했다.

    하추와 판매상은 곧바로 관에 넘겨졌으며 낙양상단은 철저히 와해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식솔들도 마찬가지로 추포되어 관아에 압송되었으며 노비들은 전부 관노(官奴)로 팔렸다.

    “결국 이번에도 별호는 못 얻었네……. 쩝.”

    “내가 지어 준 단각검으로 하라니까. 어때?”

    “넌 제발 그 주둥아리 좀 닥쳐.”

    일행은 운휘와 찬야가 투덕거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별채로 향했다. 그때 유라가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저분……. 무림맹 총대주 고위영 대협 아닌가?”

    “고위영? 맹주님의 아들인 소룡검(小龍劍) 고위영 대협?”

    찬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운휘가 코를 후비며 물었다.

    “그렇게 유명해?”

    “뭐 뛰어난 검사이기도 하고 협행도 많이 다녀서 인망도 두텁고. 무엇보다 천하제일인의 아들이잖아. 유명하지.”

    “그런데 왜 별호는 허접하대? 소룡검이라니.”

    “그 별호, 듣기로 후기지수 때부터 이어 온 별명이래. 천하제일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소룡(小龍)이라고 부르는 거지.”

    “다 컸는데 소룡은 무슨. 저분도 슬슬 별호 바꿔야겠다.”

    매화오절은 고위영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매화오절이 총대주 고 대협을 뵙습니다.”

    “아, 화산의 후기지수들이로군. 반갑네.”

    고위영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식 들었네. 낙양상단의 아편 거래를 성공적으로 막아 냈다면서. 맹주님께서도 자네들 칭찬을 어찌나 하시던지. 하하. 아무튼, 정말 수고했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 주게. 그럼 이만.”

    고위영은 남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그를 지나쳤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량은 코를 킁킁거렸다.

    ‘이 냄새는……. 왜 총대주에게서 이런 냄새가…….’

    살짝 고개를 든 남량은 짧은 순간, 고위영과 눈을 마주쳤다.

    ‘뭐지? 저 눈빛……. 어쩐지 낯이 익은데…….’

    남량은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멀어지는 고위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총대주님.”

    “음?”

    남량의 부름에 걸음을 멈춘 고위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나?”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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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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