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복마전(伏魔殿). 미인계(美人計)(1)
한편, 양봉이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위영은 또다시 동료들을 불러들였다.
“다들 들으셨겠지요. 양봉이 붙잡혔습니다.”
“멍청한 작자 같으니. 그리 조심하라 당부했건만…….”
쾅! 장각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혀를 찼다.
“회주께서는 어떤 반응이십니까?”
하추의 물음에, 고위영이 대답했다.
“회주께서는 짧게 대답하셨습니다. ‘거사에 변함은 없다.’. 우리는 이대로 거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호, 혹시, 양봉 그자가 입을 놀리거나 하지는 않았겠지요? 이거야 원,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장각은 못내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이렇게 멀쩡할 것 같습니까? 벌써 맹의 무사들이 들이닥쳤겠지요.”
고위영은 한숨을 내쉬며 하추에게 물었다.
“아편의 거래 날짜는 언제로 정해졌습니까?”
하추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거래 상단을 최대한 닦달해 보름 안에 도착한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빠르면 열흘까지도 가능합니다.”
“열흘이라…….”
고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조사가 더욱 심해질 것이니 두 분 모두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열흘만 버티면 아편이 들어오고, 그럼 우리가 이기는 겁니다. 명심하세요. 남은 열흘 동안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장각과 하추가 고개를 숙였다.
***
남량 일행은 비설의 부름을 받고 그녀를 찾아갔다.
“대주. 양봉이 입을 열었다고요?”
남량의 말에 비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자가 약조를 지켰습니다.”
“또 누가 간자라고 해요? 바로 잡으러 가죠!”
비설은 흥분한 운휘를 진정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지만 양봉은 간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요. 단지 ‘무림맹의 재정 상태를 잘 조사해 보라.’라고만 했지요.”
“무림맹의 재정 상태요?”
“네. 그래서 총관께 보고하고 재정을 조사했는데, 누군가 장부를 조작한 정황이 드러났어요.”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회의 간자가 그동안 무림맹의 자금을 비밀리에 빼돌렸다?”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범인은요? 누가 한 짓인지 알아낸 건가요?”
유라의 물음에, 비설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조사 중에 있어요. 곧 단서가 잡힐 거예요.”
비설이 남량을 향해 물었다.
“남 소협. 혹시 양봉을 밖으로 빼돌릴 때 그가 뭔가 단서가 될 만한 말을 하지 않았나요?”
남량은 손으로 턱을 쓸며 당시를 회상했다.
‘양봉은 분명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지. 약당의 궁장문명이 흑영대의 의심을 받고 있으니 주의해서 살펴보라고.’
남량이 설명하자 비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당에 궁장문명이란 자는 없어요. 애초에 궁장문명이 사람 이름인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약당은 저를 떠보기 위해 거짓으로 말한 것이 분명하나 궁장문명은 실재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찬야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럼 그들만의 암호가 아닐까요? 서로를 부르는.”
“궁장문명이 간자의 정체를 뜻하는 암호다?”
남량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야. 양봉도 궁장문명을 가리켜 ‘궁장문명께서-.’라며 사람을 부르듯 말했어.”
비설은 당장 흑영대원을 불러 말했다.
“대원들 중, 암어(暗語)를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을 모아 궁장문명이라는 암호를 해석하도록 하세요. 무림맹 인사들의 이름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원이 나가고 비설과 남량 일행도 궁장문명이 뜻하는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당연히 금방 떠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으악! 나는 이런 머리 쓰는 일과 안 어울려!”
운휘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남 사제. 암어 해석이야 흑영대가 더 잘할 테니 그냥 그들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찬야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이건 그들에게 맡기고 우린 간자들로 의심되는 자들을 감시하는 데 집중하자.”
일행이 방을 나서려는 그때, 남량의 시선이 우연찮게 벽에 붙어 있는 수많은 글자들로 향했다.
“전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군요.”
“전부 중원의 곳곳에서 보내오는 대원들의 서신입니다. 정보를 다른 자들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해 암호로 되어 있지요.”
남량의 눈에 마침 궁(弓) 자가 들어간 각궁반장(角弓反張)이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궁장……. 궁(弓) 자와 장(張) 자……. 그러고 보니 장(張) 자에 궁(弓)이 들어가는구나. 잠깐! 이거 설마…….’
남량은 뭔가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
‘파자(破字)다!’
파자는 말 그대로 깨뜨린[破] 글[字]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문 문(門)’ 자와 ‘입 구(口)’ 자를 합치면 ‘물을 문(問)’ 자가 되는 식이다.
‘그래. 궁장이란, 궁(弓) 자와 장(長) 자를 합쳐 새로운 장(張)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문(門)과 명(名) 자를 합쳐 각(閣) 자가 되는구나. 이거다!’
남량은 당장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말했다.
비설은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파자는 저희 쪽에서도 쓰는데, 왜 내가 그걸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했지?”
“오히려 너무 단순했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 겁니다.”
이걸로 암호는 풀렸다. 남량이 비설에게 물었다.
“대주님. 무림맹 인사들 중, 장각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네. 부총관 장각. 무림맹의 내정을 담당하는 건 총관의 오른팔입니다. 설마 그자까지 마교의 간자였을 줄이야…….”
일행들은 뭔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순찰당주에 이어 부총관까지…….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앞으로 누가 더 있을지 몰라. 빌어먹을.”
매화오절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장각이라면 충분히 장부를 조작하고 자금을 빼돌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비설은 매화오절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장각과 그 주변 인물들을 은밀히 감시합니다. 단, 절대 들키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하세요.”
“네.”
매화오절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매화오절은 흑영대원들과 함께 각자 맡은 인물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남량은 암영과 함께 장각을 감시했다.
장각은 오전에 출근해 유시(酉時:17∼19시)에 퇴근했다. 그런데 그를 태운 마차가 거처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남량이 암영에게 물었다.
“저자가 주로 가는 곳이 있습니까?”
암영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총관 장각은 하남 정주의 부유한 상단이자 맹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도명표국(倒影鏢局) 국주의 장자라네. 어릴 적부터 표국 일을 도맡아 해 온 덕에 내정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 총관이 직접 발탁한 인재지. 허나 능력과 별개로 사람 자체는 부인이 있음에도 여색을 탐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즐겨 결코 행실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자일세. 그리고 요새는 도박에 취미를 들려 하루에만 수십, 많게는 수백 냥을 탕진한다고 하더군.”
“그럼 지금도 도박장으로 가는 것이겠군요.”
남량의 예상대로 장각을 태운 마차는 도박장에 도착했다. 다만, 암야촌과 같은 음침한 곳이 아닌 고관대작이나 거상 같은 부유한 권력층들이 주로 출입하는 크고 화려한 기루였다.
“그런데 왜 하필 명월루야 또…….”
남량은 예전에 찬야와 함께 명월루에서 큰돈을 쓰고 논 적이 있었다. 물론 흑점의 초대를 받기 위해서였지만…….
암영은 정보 조직의 대원답게 남량이 명월루에 출입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 루주나 다른 기녀들이 자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 변장을 하는 것이 좋겠네.”
“네…….”
“응?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도사라지만 한창 젊은 나이인데, 기루 한 번 가는 건 흠이 아닐세. 난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고. 하하.”
암영은 남량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
남량은 대꾸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정보 조직의 특성상, 정보를 빼내기 위해 변장술은 필수적으로 익혀야 했다. 남량은 흑영대에서 제작한 면구(面具)를 썼는데, 피부의 질감과 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인피(人皮:사람 가죽)로 만든 면구가 아닐세. 우리가 흑도도 아니고, 사람 피부를 벗겨 내는 잔혹한 짓을 할 리 있겠는가?”
“네, 뭐…….”
인피를 쓰든가 말든가……. 남량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변장을 마친 남량과 암영은 신분을 감추고 명월루의 안으로 들어갔다.
일다경 정도 먼저 들어가 상황을 살피고 온 대원이 보고했다.
“장각은 2층 두 번째 방에 있습니다.”
“수고했네. 우린 건너편 누각에서 지켜보지.”
남량과 암영은 사방이 훤히 보이는 누각에 자리를 잡았다.
장각이 있는 방은 창문을 활짝 열고 있어 남량이 앉은 자리에서도 내부가 잘 보였다.
“자자! 어서 돈을 거시게!”
“좋아. 이번에는 두 배다!”
장각은 남량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품에 아름다운 기녀를 끼고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다.
남량은 술을 마시며 기루 전체를 살펴보았다. 딱히 의심할 만한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대략 한 시진 정도가 지났다.
암영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꼭 오늘이 아닐 수도 있네. 피곤하면 교대해도 괜찮아. 우리야 뭐, 감시가 일상인지라 괜찮네만 자네는…….”
“아닙니다.”
남량이 손을 저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앉아 있던 장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남량은 즉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따라붙겠습니다.”
“그러세. 허나 측간을 가는 것일 수도 있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네.”
남량과 암영은 기척을 죽인 채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는 장각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그가 도착한 곳은 정말 측간이었다. 장각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암영은 아쉽다는 듯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이만 자리로 돌아가지.”
“조금만 더 지켜보지요.”
남량은 장각이 측간에서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암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남량은 암영이 말리기도 전에 성큼성큼 측간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측간 너머로 느껴져야 할 장각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남량은 곧장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예상대로 측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량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이자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측간을 둘러보던 남량은 벽 뒤쪽에서 미세하게 바람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통. 벽을 두드리자 안이 비어 있는 소리가 났다.
“벽 뒤에 공간이 있습니다.”
남량은 벽을 더듬거리다 숨겨져 있는 작은 고리를 발견했다.
남량은 고리를 붙잡고 힘껏 당겼다. 그러자 벽이 문처럼 열렸다. 비밀 통로였다.
남량은 암영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즉시 장각의 뒤를 추적했다. 비밀 통로는 어둡고 축축했으며, 어딘지 모를 건물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남량과 암영은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위쪽에서 장각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장각이 누군가와 같이 있네.』
암영이 전음을 보내왔다. 남량과 암영은 기척을 철저히 감추며 천장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
“……그래서 더는 힘들다니까!”
장각은 누군가에게 성질을 내고 있었다.
“이미 순찰당주 양봉이 붙잡혔고 맹주는 나머지 간자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네. 이러다 나까지 위험해져!”
장각의 말을 엿듣던 남량과 암영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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