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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54화 (54/164)
  • <54화>

    복마전(伏魔殿). 가화어인(嫁禍於人)(5)

    남량과 양봉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정면 승부는 남량의 필패(必敗)가 확실했다. 양봉이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멍청한 놈 같으니.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그 순간, 남량이 바닥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콰앙! 바닥이 패이고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엇!”

    한순간 시야가 가려진 양봉이 당황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남량이 있는 곳을 향해 검강을 날렸다.

    콰아앙!

    검강이 폭발하며 흙먼지가 흩어졌다. 그러나 그곳에 남량은 없었다! 양봉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이놈, 대체 어디로…….’

    다음 순간, 남량의 신형이 양봉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고경홍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한 판단이다.”

    양봉은 뒤늦게 남량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정면 승부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흙먼지로 내 시야를 가린 다음 후방을 잡은 것인가?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어!’

    죽음의 그림자가 양봉을 덮쳐 왔다. 양봉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발 먼저, 남량의 검이 양봉의 가슴팍을 가르며 지나갔다.

    후두둑-.

    바닥에 피가 튀었다. 양봉은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며 가슴팍을 부여잡고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남량은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다음, 검집에 집어넣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조절했다. 약속대로 정보를 뱉어 내라.”

    직후, 지켜보던 무사들이 손을 들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남 소협이 이겼다! 백매화가 이겼어!”

    비설은 안도와 허탈함이 섞인 웃음을 흘렸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요. 하하…….”

    건옹 역시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수염을 쓸었다.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는 청년이야. 허허.”

    이걸로 남량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흑영대와 함께 훌륭한 계책으로 맹의 간자를 색출했을 뿐 아니라 절정의 경지로 초절정의 실력자를 잡아낸 것이다!

    “이제 모두가 저 사내의 무위와 용기를 칭송하겠군.”

    “강호를 이끌 새 풍운아의 등장이군요.”

    비설과 건옹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하는 남량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고경홍은 남량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수고했다. 훌륭히 해냈구나.”

    남량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맡겨 주신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고경홍은 남량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쓰러진 양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양봉은 절망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졌을 리 없어…….”

    “고작 절정에게 졌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겠지.”

    양봉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고경홍은 싸늘한 눈빛으로 양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진 이유는, 끝까지 방심한 데 있네. 그렇지 않았다면 남량이 흙먼지로 시야를 가리는 수를 썼을 때, 섣부르게 검을 휘두르지 않았을 테지. 안 그런가?”

    양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경홍의 말을 인정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양봉.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봄세. 왜 마교에 가담한 것인가? 그들이 어떤 교묘한 언변으로 자네를 설득하던가?”

    “으하하…….”

    양봉이 힘없이 실소를 터뜨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맹주. 그들은 아무 말도…….”

    “그럼 대체 왜?”

    “그들은 그저 보여 주었을 뿐이오. 힘을.”

    “힘? 힘이라고 했나?”

    고경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양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대는 언제나 힘 있는 자의 편이었소. 나는 대세를 따랐을 뿐. 단지 그것뿐이외다.”

    “천마 위광이 있던 시절에도 변하지 않았던 자네였네.”

    “천마 위광? 하하하…….”

    양봉이 또 한 차례 웃음을 흘렸다. 멀리서 듣고 있던 남량이 고개를 돌렸다.

    “맹주. 하나 충고하겠소. 곧 닥쳐올 폭풍은 이전의 것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오. 남북 십성의 힘으로도 절대 막아 내지 못해. 이 무림은, 멸망을 피해 갈 수 없소.”

    남량은 양봉의 말을 들으며 염라가 했던 예언을 떠올렸다.

    ‘곧 저 세 명에 의해 중원의 모든 생명이 멸망한다. 그것은 재앙과도 같아 막을 수 없다…….’

    대체 삼천위는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남량은 굳은 표정으로 서쪽 하늘을 응시했다.

    “자네가 무엇을 보고 들은 것인지 모르나, 그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곧 깨닫게 될 걸세.”

    고경홍의 단호한 말에 양봉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열심히 노력해 보시오. 나는 저승에서 구경하고 있을 테니. 곧 만나게 되겠지만…….”

    건옹은 차가운 시선으로 양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자를 끌고 가라.”

    양봉이 끌려가는 것을 확인한 남량은 전투 후 피로한 몸을 쉬기 위해 거처로 돌아왔다.

    ***

    거처로 돌아와 몸을 씻고 침의로 갈아입은 남량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청했다. 꿈에 낭연청이 나와 조금 설치긴 했지만…….

    잠에서 깨어날 때쯤,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해 볼까?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아서라. 너 그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

    “남 사제한테는 네가 했다고 말할 건데?”

    “마당으로 따라 나와. 죽여 버릴 테니까.”

    남량이 눈을 뜨자 침상에 걸터앉은 찬야가 손에 붓을 쥔 채 운휘와 다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찬야는 남량과 눈을 마주치자 움찔하며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 사제! 깼어? 조금만 더 자지, 깨우려고 했는데…….”

    “그거 내 얼굴에 바르면 정신개조술 할 거다.”

    “이, 이거?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찬야는 얼른 붓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남량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자,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위지혁과 유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저 둘은 왜 온 거야?”

    “남 사제의 활약상을 듣고 온 거지. 축하하러.”

    찬야가 히히 웃으며 말했다. 남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활약상이라니? 무슨…….”

    “몰라? 어젯밤 순찰당주 양봉이 마교의 간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 그리고 그자를 색출해 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남 사제인 것도 알려졌어. 심지어 양봉 그자와 일대일로 결투를 벌여서 이기기까지 했다며? 지금 무림맹 전체에 이야기가 자자해. ‘절정의 경지임에도 불구하고 초절정의 고수를 정면으로 꺾은 풍운아의 등장!’이라면서 말이야. 지금 완전 유명인 됐어. 남 사제.”

    “벌써 소문이 났단 말이야? 입단속들 하지 않고…….”

    하기야 그곳에 있던 무사들만 수십 명이 넘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운휘는 흥분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형님. 저는 그 대결을 눈앞에서 보지 못한 게 한입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매번 형님을 따라가기로 한 게 제 생에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깨달아요. 존경합니다, 형님!”

    “뭐,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호들갑은…….”

    남량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타악. 찻잔을 내려놓은 유라가 말했다.

    “별것이 아니긴. 무림맹 내부에 마교가 숨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찬 이들이 남 사제의 활약으로 인해 다시 활기를 찾았어. 이건 분명 대단한 일이야.”

    “그만해라. 너까지.”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괜히 쑥스러워진 유라가 차를 다시 들었다. 찬야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래서? 남 사제에게 반했어?”

    “넌 그냥 닥치고 있어!”

    유라가 던진 찻잔을 찬야는 여유롭게 피해 냈다.

    위지혁은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 그 정도는 돼야 훗날 내가 넘을 가치가 있지.”

    “웃기고 있네. 평생 따라가도 발가락이나 핥을 수 있으려나?”

    이번에는 위지혁이 운휘를 향해 찻잔을 던졌으나, 운휘 역시 여유롭게 찻잔을 피했다.

    찬야는 남량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무튼 남 사제. 남 사제가 보여 준 도(道). 우리 모두 감탄했어. 악을 징벌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남 사제의 길에, 우리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도록 노력할게. 앞으로도 우릴 잘 이끌어 줘.”

    남량은 자신을 응시하는 매화오절의 눈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도 내가 앞장설게. 그러니 잘 따라와. 이 앞의 길은 더 험난할 테니까. 죽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할 거야. 다들 각오를 다지도록 해.”

    운휘가 가슴을 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각오라면 얼마든지요! 어떤 힘든 수련이라도 해낼 겁니다!”

    유라와 위지혁도 옅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량은 훗날 자신의 든든한 검으로 성장할 청년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밤새 도착한 조공을 풀어 볼까?”

    박수를 쳐서 시선을 집중시킨 찬야가 바닥에 있는 상자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는 못해도 개수가 열 개는 넘어 보였다.

    “조공? 그건 또 뭐야?”

    “남 사제 방 앞에 놓여 있더라고. 아마 맹의 무사들이 놓고 간 거겠지?”

    “그걸 나한테 왜?”

    “내가 말했잖아. 남 사제 유명인 다 됐다고. 지금 밖에 나가면 남 사제를 흠모하는 사람들로 한가득일걸?”

    그때, 누군가 남량의 방에 찾아왔다. 문을 열어 보니 예쁘장하게 생긴 여무사 두 명이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남량이 묻자, 여무사들은 머뭇거리며 손에 든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저기…… 백매화 소협께 전해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희의 작은 성의이니 무시하지 말고 받아 주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을 머금고 있던 유라의 안색이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반면 찬야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남량 대신 상자를 받아 들었다.

    “어이구! 뭐 이런 걸 다. 남 사제가 기뻐할 거야.”

    “저, 정말요? 다행이다. 그럼…….”

    뻐엉! 찬야는 유라의 발길질에 비명을 지르며 복도로 튕겨 나갔다.

    ***

    무림맹주 고경홍은 집무실을 찾아온 화산파 장문인 구양중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남량이 활약한 소식 말입니까? 들었지요.”

    구양중은 말만 꺼내도 절로 흐뭇해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직접 보니 어떻더이까? 맹주의 말대로 남북 십성은 후계자를 찾아 훌륭하게 길러 냈습니다. 전 남북 십성인 매화검선 유우화 역시 마찬가지로 남량이라는 걸출한 후계자를 길러 냈지요. 그 아이에 대한 맹주의 평가가 궁금하군요.”

    “솔직히 말하면 탐납니다. 뺏고 싶을 정도로.”

    고경홍의 솔직한 대답에 구양중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란 말입니까?”

    “그 아이는 뭐랄까…….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반로환동을 한 전대의 고수를 보는 느낌이었달까……. 아무튼 살아온 세월에 걸맞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매우 놀랐고, 또 흥미로웠습니다. 남량, 그 아이에게는 분명 영웅지재(英雄至才)가 있습니다.”

    “칭찬에 인색한 맹주가 남량을 그리 높게 평가하실 줄 몰랐습니다. 하하.”

    고경홍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흠. 나는 언제나 평가할 대상을 솔직히 판단합니다. 칭찬에 인색했다면 그동안 만난 무사들이 전부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구양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홀짝였다.

    ‘허허. 그럼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고수들이 전부 맹주의 눈에 차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남량을 인정했단 말이지?’

    구양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농을 던졌다.

    “맹주의 말을 유 도장이 들었다면 분명 질투했을 겁니다. 하하.”

    “장문인. 농담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정말 남량이 탐이 납니다. 가능하다면 그 아이에게 내 가르침도 전수해 주고 싶어요. 그럼 얼마나 대단한 인재가 나올지 기대되지 않습니까? 장담컨대 남북 십성을 넘을 최강의 고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겝니다. 그러니 유 도장에게 잘 말해 주시지요.”

    “허허…….”

    맹주의 성격 상 농담으로 던진 말은 아닐 터였다. 그는 진심으로 남량을 가지고 싶어 했다.

    ‘이거 참, 괜히 중간에서 곤란하게 되었군.’

    구양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경홍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유 도장에게 전서를 넣어 보지요.”

    “좋은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고경홍은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사흘 뒤, 구양중이 보낸 서찰에 답장이 왔다.

    그곳에는 거친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맹주 이 미친 작자가 누구 제자를 빼앗으려 들어! 죽고 싶지 않으면 내 제자한테 손대지 마라! 경고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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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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