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천음선녀(天陰仙女)(4)
채채챙! 채앵!
운대산 중턱에서 기습을 받은 흑영대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적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대형을 유지하라! 흩어지면 안 된다!”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분전했으나 여전히 열세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암영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전멸이다.’
파파팟!
운휘는 안개 속에서 날아드는 사슬낫을 피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사슬을 낚아챈 다음,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으아악!”
스걱!
운휘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끌려오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숨어 있는 적들을 전부 쓰러뜨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비겁하게 숨어서 이런 거나 날리지 말고 남자답게 나와서 붙자 이 새끼들아! 엉?”
그러나 적들이 순순히 나올 리 없었다. 운휘는 답답함에 괴성을 질러 댔다.
‘대체 안에 들어간 녀석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위지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날아드는 사슬낫을 피했다.
진법이 감각을 흩어 적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뿐더러,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점점 체력이……. 버티기 힘들어진다…….’
위지혁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사슬낫이 팔을 휘감았다.
직후, 위지혁의 몸이 안개 속으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할……!”
마침 위지혁이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운휘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운휘는 검풍을 날려 사슬을 끊어 버린 뒤, 위지혁의 옷깃을 붙잡고 뒤로 내던졌다.
엉망으로 바닥을 구른 위지혁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말했다.
“구해 준 건 고맙다만, 내던지는 건 좀 아니잖아?”
운휘가 한숨을 내쉬며 버럭 소리쳤다.
“그냥 ‘구해 줘서 고맙다.’라고만 해! 무슨 사족이 많아? 성격이 그 모양이니 너랑 친해지겠냐?”
“누, 누가 너랑 친해지고 싶다고 했냐?”
위지혁이 당황해 외치는 그때, 사슬낫이 운휘의 등을 베고 지나갔다. 공격을 당한 운휘가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운휘!”
깜짝 놀란 위지혁이 황급히 달려와 운휘를 보호했다.
“개자식들……. 이 안개만 흩어지면 죄다 도륙을 내 버린다!”
운휘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노성을 지르는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썰물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법이 깨졌다……. 안에 들어간 대원들이 해낸 것이야!”
암영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전황이 바뀌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하라!”
감각이 온전히 돌아온 대원들은 답답했던 감정을 일제히 분출하며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더 이상 진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적들은 흑영대의 공세를 버텨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됐다! 전세가 역전됐어! 운…… 컥!”
기뻐하며 운휘를 들쳐 업으려던 위지혁은 운휘가 휘두른 팔꿈치에 턱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운휘는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를 내뿜은 채 모습을 드러낸 적들을 향해 미친 듯이 쇄도했다.
“내가 네놈들 전부 쳐 죽여 버린다고 말했지!”
쇄애애액!
운휘는 당황하는 적들을 향해 뛰어들어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적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때 저 위에서 납치된 여성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암영은 즉각 지시를 내렸다.
“일부는 여인들을 보호하며 산을 내려가도록. 그리고 나머지는 본거지를 수색해 적의 수장을 사로잡을 것이다. 가자!”
“존명!”
운휘와 위지혁은 암영의 뒤를 따라 여인들이 나온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
한편, 찬야는 월아쌍노의 일노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쿨럭!”
찬야는 피를 토해 내며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 냈다.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가 욱신거리는 것이…… 늑골이 나간 것 같은데.’
일노는 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 내며 말했다.
“제법 버티는 것 같다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일노의 신형이 순식간에 찬야의 앞으로 쇄도했다. 찬야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카카캉! 카캉!
일노는 찬야의 검을 여유롭게 상대하며 낄낄거렸다.
“아가야. 검격이 깃털처럼 가볍구나. 힘이 다했느냐?”
일노는 공격을 피하며 손바닥에 내력을 모아 찬야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쩌엉!
일격을 허용한 찬야는 울컥 핏덩이를 내뱉으며 날아가 동굴 벽에 처박혔다.
“크억!”
바닥에 주저앉은 찬야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일노를 응시했다.
“어린 나이에 절정이라, 과연 재능이 뛰어나군. 허나 경지가 비슷하다 하여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경험의 차이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느니…….”
찬야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영감. 잘난 척은 내 목을 벤 뒤에나 해.”
찬야는 이를 악물고 또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찬야의 검은 일노의 몸에 닿지 못했다.
퍼퍽!
일노는 칼등으로 찬야의 얼굴을 가격하며 말했다.
“아직도 알지 못하겠느냐? 네놈은 날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휘릭-. 파파팟!
일노는 몸을 크게 회전하며 찬야의 전신을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크어억!”
직전에 몸을 뒤로 날리며 막아 낸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으나, 출혈이 심해 길게 버티기 힘들 듯했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이러다 정말 죽겠네…….’
찬야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자세를 유지했다.
고개를 돌리자, 저편에서 유라가 힘겹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도와주러 가야 하는데……. 한심하게 한 놈도 해치우지 못하고…….’
일노가 찬야를 향해 몸을 날리며 검을 내질렀다.
찬야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굴러 검을 피해 냈다.
일노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허어-. 마지막 발악이더냐?”
몸을 일으킨 찬야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정신 차려라 찬야! 네가 자신 있게 말했잖아. 남 사제에게 이곳은 내가 맡겠다고! 남 사제는 날 믿었는데, 그 믿음을 실망시킬 셈이야?’
찬야는 일노의 검과 그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래. 놈의 말대로 경험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허나, 같은 절정의 경지인 만큼 공격만 들어간다면 내게도 분명 승산은 있을 터……. 하물며 내 검술은 화산의 검술이다. 도가 최상승의 검술 중 하나가 고작 저런 늙은이의 검술을 이기지 못할 리 없지!’
일노는 섬뜩한 검기를 내뿜으며 찬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충분히 즐겼다. 이만 죽어라!”
채채채챙! 채채챙!
찬야는 정신없이 검을 막아 내는 와중에도 일노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빈틈을 찾아라. 그리고 최선의 초식을 떠올려! 내 감각이라면 할 수 있다!’
“크아아!”
찬야는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의 5초식, 유록화홍(柳綠花紅) 초식으로 일노의 검을 쳐 냄과 동시에 옆구리에 검격을 넣었다.
촤악!
비록 옷자락을 베는 데 그쳤지만, 일노의 안색이 급변했다.
‘됐다! 처음으로 놈의 몸에 공격이 닿았어!’
찬야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러시나? 어디 계속 여유를 부려 보시지?”
“이 애새끼가 감히……!”
분노한 일노가 괴성을 터뜨리며 공격을 해 왔다.
‘보인다! 감정이 격해져서 움직임이 커졌어!’
찬야는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일노와 격돌했다.
카카캉! 퍽! 퍼퍼퍽!
찬야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일노는 당황했다.
‘이놈! 다 죽어 가던 놈이 어디서 이런 힘이……!’
“으아아아아!”
찬야는 피가 튀기고 상처가 벌어져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검격의 속도를 올렸다.
‘나는 남 사제가 보여 준 도(道)를 따라 끝까지 갈 거야. 너 따위 쓰레기에게 발목 잡힐 수는 없단 말이다!’
찬야의 검이 일노의 발목을 노리고 낮게 들어왔다.
파팟!
몸을 띄워 공격을 피한 일노는 그대로 찬야의 몸을 가를 생각이었다.
쇄애애액!
그러나 그 순간, 찬야가 몸을 빙글 돌리며 일노를 향해 십(十)자로 검기를 교차해 날렸다.
‘이놈, 설마 일부러 내 몸을 공중에-!’
눈치챘을 때는 이미 찬야의 검기가 일노의 몸을 베고 지나간 뒤였다.
“이십사수매화검법 16초, 화조월석(花朝月夕).”
푸확! 후두둑-.
조각난 일노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력을 갈무리하며 검을 내린 찬야가 중얼거렸다.
“배고파……. 운휘가 해 준 요리 먹고 싶다.”
쩌엉!
이노의 검기를 막아 낸 유라가 뒤로 한참 밀려났다.
“겁도 없이 정면으로 덤벼든 기개는 칭찬하마. 허나 거기까지다.”
이노는 공중으로 몸을 날려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유라는 다급히 검을 들어 막았으나, 충격을 받아 피를 토했다.
“쿨럭! 크으…….”
검을 든 손목과 어깨가 부러진 것인지 욱신거렸다.
“계집의 몸으로 이걸 버텨 내? 독한 년!”
퍼퍼퍽!
이노는 발을 들어 유라의 얼굴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유라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노는 한껏 당당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하고 있느냐. 내 악행을 막겠다 하지 않았느냐? 아니면 더는 싸울 힘이 없는 것이냐?”
“…….”
유라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하자……. 놈의 검술은 남궁월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허나 경험의 차이가 달라. 놈은 내 공격을 훤히 꿰뚫고 있어. 이기기 위해서는 나도 놈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유라가 고민하는 순간, 또다시 검기가 날아왔다.
카가각-!
유라는 검기를 피하며 이노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채채챙! 채챙!
몇 차례 합을 주고받으며 유라는 필사적으로 이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으허허! 네년 무예가 웬만한 사내새끼들보다 낫구나!”
퍼퍼퍽! 촤악!
이노는 칼등으로 유라의 어깨를 가격한 다음, 유라의 허리를 베었다.
“크윽!”
유라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노는 칼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끌끌 웃음을 흘렸다.
“운이 좋구나. 조금만 더 깊었으면 장기가 흘러나왔을 텐데.”
유라는 허리의 검상을 부여잡으며 출혈을 막았다.
“당장 네년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네년의 자존심을 뭉개 준 다음, 더럽혀 줄 것이다. 도사로서는 견디기 힘든 치욕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년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천천히 감상해 주마.”
“……지금 실컷 웃어 두어라.”
유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 웃음이 될 테니까.”
“으하하! 네년의 기개가 얼마나 가나 어디 보자.”
카앙! 카카캉!
유라는 이노의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 내며 생각했다.
‘보여라. 제발!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게……!’
바로 그때, 유라의 눈에 한 가지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검을 휘두른 직후, 초식을 연계할 때의 동작이 조금 커지는 부분이 있다!’
마침 이노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기회를 잡았다.
유라는 이를 악물고 그 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슈앙-!
유라의 검이 이노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베인 옷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이, 이년이 어떻게……!”
유라는 이노의 당황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놈이 당황했을 때가 기회다!’
채채챙! 채채채챙!
이노의 품 안으로 파고든 유라가 미친 듯이 공격을 가했다.
유라의 입에서 짐승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그녀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오며 이노를 압박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노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유라의 눈이 투지로 붉게 타올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력했다. 남궁월, 남량…….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절망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껏 해 온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으, 으윽! 제기랄!”
이노는 검기를 발현해 유라를 튕겨 내려 했으나, 유라는 이노의 검기를 정면으로 받아 내며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이노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매화홍주검 18초, 비두출화(鼻頭出火)!”
콰아앙!
유라의 일격이 이노의 검을 부수고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이노의 심장에서 검을 빼냄과 동시에 수평으로 휘둘러 이노의 목을 쳐 버렸다.
고통에 일그러진 이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한참을 구르다가 멈추었다.
쨍그랑.
피에 젖은 검을 떨어뜨린 유라는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빠졌다.
‘이겼다……. 내 힘으로 이겨 냈어.’
턱.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찬야가 받았다.
“움직일 수 있겠어?”
“그래…….”
“그나저나 둘 다 꼴이 말이 아니네. 남 사제가 비웃을 거야.”
“…….”
유라는 말없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서 가자.”
찬야는 유라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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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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