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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43화 (43/164)
  • <43화>

    천음선녀(天陰仙女)(2)

    결국 남량은 비설의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작전을 수락했다.

    다음 날, 남량과 찬야, 유라는 흑영대원의 손에 이끌려 여성용 의복과 화장품이 마련되어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유라는 간단한 화장을 끝내고 무복 대신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화장을 끝낸 남량과 찬야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남량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천마가, 천하의 위광이……. 아아, 찬란했던 과거여…….’

    남량은 붉은 매듭끈을 풀고 대신 꽃 장식의 금색 비녀로 머리를 고정했다.

    단장을 마치고 남량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라가 살짝 충격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왜……. 왜 이렇게 예쁜 거지?”

    찬야는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내 생에 최고의 미인을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여장을 한 남량은 절세미인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눈매가 얼음처럼 차갑고 기품이 흘러 어느 귀족 가문의 규수 정도로 보였다.

    변장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비설은 남량을 보자마자 당황하며 유라에게 슬쩍 물었다.

    “저기 혹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여자 아니냐구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남자입니다.”

    유라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비설은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박수를 쳤다.

    “제가 사람을 아주 잘 본 것 같네요. 완벽해!”

    비설은 남량의 앞에 면경을 내밀며 물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화장을 좀 다르게 해 볼까?”

    “솔직히 말하세요. 아주 재미있어 죽겠지요?”

    “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네.”

    비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말문이 막힌 남량이 입을 다물었다.

    ‘이 여자도 제정신은 아니야…….’

    변장을 마쳤으니, 다음은 내력을 감출 차례였다.

    세 사람은 비설이 수하를 시켜 가져온 산공독을 복용했다.

    “산공독의 지속 시간은 세 시진(6시간)입니다.”

    남자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옷 속에는 부드러운 가죽을 넣어 근육이 잡히지 않게 했으며, 특수한 약물을 마셔 목소리도 얇게 변조했다.

    마지막으로 흑영대 대원들이 추적할 수 있도록 손목과 목 뒤에 추종향을 뿌렸다.

    준비가 끝나자, 비설이 일행을 세우고 한 사람씩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반드시 살아서, 실종된 여성들과 함께 돌아옵시다. 다들 무운을 빕니다.”

    운휘와 위지혁은 흑영대원들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남량과 찬야, 유라는 곧장 암야촌으로 향했다.

    ***

    암야촌은 개봉의 하류층들이 모인 곳으로, 관아에서 수배 중인 범죄자나 왈패, 낭인(浪人) 등 위험천만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무법 지대였다.

    살인과 강도가 밥 먹듯 일어나는 곳이다 보니 관아에서도 눈을 돌렸고, 결국 치안은 개판이 되었으며, 부패한 마을답게 도박장과 매춘업소가 성행했다.

    남량은 납치범들이 이곳을 고른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치안이 엉망인 곳이니만큼 관아의 눈길이 닿지 않아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이곳 여성들의 신원은 대부분 창기나 시종 등의 하류층으로 사라져도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해가 지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남량 일행도 인파에 자연스레 섞여 들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빌어먹을. 코가 썩을 것 같아.”

    거리의 악취에 찬야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악인들이 풍겨 대는 악취는 언제 맡아도 역겨워.”

    유라 역시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둘 다 경거망동하지 마. 당장은 내력도 없으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량은 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곰방대 연기로 자욱했고,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썩은 냄새가 났다. 자리마다 온통 도박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음담패설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남량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사내들의 시선이 동시에 집중되었다.

    위험한 사내들로 가득한 곳에 여인들이, 그것도 경국지색의 미녀들이 들어서자 그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욕정으로 들끓었다.

    “눈빛 봐라, 아주 그냥 다 죽여 버리고 싶네. 하하.”

    찬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내들이 금세 일행을 둘러싸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거 간덩이가 부은 계집들이네? 여기가 어디라고?”

    “이것 봐라? 미색이 아주 그냥……. 죽이는데? 으하하.”

    “덕분에 눈 호강 제대로 하는군. 어디, 다른 호강도 받아 봐?”

    “다들 눈 깔아. 저년들은 내가 점찍었으니까. 알았어?”

    남량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눈이 좀 높아서 말이야, 네깟 것들로는 성에 안 차지.”

    “뭐? 하하하! 이 계집 하는 말 좀 들어 보게!”

    도박을 하던 사내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남량은 품속에서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남량의 손으로 향했다.

    “한판 거하게 따려고 왔는데, 자리 있나?”

    “자리? 물론 있지. 있고말고.”

    한 사내가 남량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밤은 이 오라버니가 제대로 놀아 주마. 물론 각오는 되어 있겠지? 돈이 다 떨어지면, 네년 몸이라도 걸어야 할 것이다.”

    남량이 웃음을 거두며 싸늘히 말했다.

    “냄새나니까 입 닫고 자리나 안내해.”

    남량은 옷깃을 걷어붙이며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뭐로 하겠어? 쌍륙기(雙六棋), 십인계(十人契:야바위), 마작(麻雀), 화투(花鬪). 뭐든 좋으니 덤벼라.”

    또 한 번 도박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계집 포부가 남아보다 낫구만!”

    “어디 제대로 쓴맛을 보여 줘라!”

    유라는 남량의 옆자리에 슬쩍 앉으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귓속말을 건넸다.

    “어쩌려고 이래?”

    남량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이면 놈들의 시선을 끌어야지. 산공독 효력이 다하기 전까지 납치당해야 하니까.”

    찬야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선을 끌려면 아무래도 돈을 따야 하는데, 도박은 할 줄 알아?”

    “예전에 중원 최고 도박사에게 배운 적이 있어.”

    남량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가만히 구경이나 해.”

    한 시진(2시간)이 지났다.

    “오늘은 패가 잘 들어오는군. 구련(九蓮).”

    “오오오!”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기지?”

    사내들이 손에 든 패를 던지며 분통을 터뜨렸다.

    찬야와 유라의 손에는 남량이 따낸 금자와 은자, 전표와 보석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한 시진 동안 남량의 손에 전 재산이 거덜 난 자들의 숫자만 해도 열 명을 훌쩍 넘겼다.

    ‘이거면 화산의 도관을 몇 개나 지을 수…… 아니야! 이건 악인들의 더러운 때가 묻은 검은 돈이다!’

    유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홀로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자, 다음! 아무도 없어? 여기 도박장에는 계집과 맞상대할 담도 없는 사내들뿐이야?”

    찬야는 잔뜩 신이 나서 도발을 하고 있었다.

    ‘대충 이 정도면 모습을 드러낼 법도 한데…….’

    남량이 슬슬 초조해지던 찰나, 사내들이 우르르 비켜서며 검은 비단옷을 입은 몇몇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우리와 한 판 두겠는가?”

    구경꾼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남량은 검은 옷의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든지.”

    마작을 두는 동안 사내와 남량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사내가 패를 가져오며 입을 열었다.

    “도박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혹시 창기인가?”

    “그건 왜 궁금한데?”

    “궁금하지. 우리한테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거든.”

    사내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년이 정조(貞操)를 지켰으면 그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재물(財物)이 될 테니까.”

    “재물?”

    남량과 찬야, 유라가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직후, 사내의 손이 바람처럼 뻗어 와 남량의 수혈(睡穴)을 짚었다. 남량은 움찔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남……!”

    유라와 찬야가 깜짝 놀라 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역시 함께 온 검은 옷의 사내들에 의해 수혈을 잡히고 말았다.

    “반응을 못 하는 걸 보면 평범한 계집이 맞군.”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던 남량의 귓가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려가라.”

    남량은 억센 팔에 끌리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한편, 흑영대는 암야촌의 오 리(2.2km)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흑영대는 향서(香鼠)라는 동물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향서는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추종향이 남긴 잔향(殘香)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흑영대와 함께 대기하던 운휘는 초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 산공독의 효력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런 일이 없으면 돌아오기로 했는데. 성공한 거야, 실패한 거야?”

    위지혁이 덤덤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잠자코 기다려라. 성공하면 향서가 움직일 것이고, 실패하면 돌아오겠지. 뭐, 변수가 있다고 해도 그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빠악!

    운휘가 손을 들어 위지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무정한 놈 같으니. 넌 동료애도 없냐? 형님, 찬야, 바윗덩이가 걱정되지도 않아?”

    위지혁이 이를 부득 갈며 외쳤다.

    “이게 죽으려고 감히!”

    위지혁이 운휘를 향해 손을 뻗자 운휘가 잽싸게 몸을 날리며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위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운휘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흑영대원들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들 덕분에 이런 상황에서도 웃는다.”

    “사형제 사이가 참으로 돈독해 보기 좋구나.”

    위지혁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오해입니다! 오히려 반대라고요!”

    이번 임무에서 대장을 맡은 흑영대원 암영(暗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래 동료끼리는 자주 다투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다. 그러면서 우애가 돈독해지는 것이지.”

    운휘가 주먹을 돌리며 방긋 웃었다.

    “정확히는 다투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죠. 저놈이.”

    “그래도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서로 도와줄 것이 아니냐. 하하.”

    위지혁은 그럴 리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향서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어디론가 잽싸게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미소를 짓고 있던 흑영대원들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워졌다.

    “마침 계획도 성공한 것 같구나. 지금부터 들키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놈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수장께는 기별을 넣도록.”

    “존명!”

    대원들은 즉시 향서가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휘와 위지혁도 뒤처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따라붙었다.

    한 시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구름이 걸려 있는 산의 초입이었다.

    암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수하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디지?”

    지도를 펼친 흑영대원이 한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하남성 운대산(雲臺山)입니다.”

    흑영대원들은 산길을 올랐으나 도중에 향서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향서가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가 감각을 방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진법이군요.”

    암영의 말에, 위지혁이 대답했다.

    “그럼 일단 안에서 신호를 보낼 때까지 기다릴까요?”

    암영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밖에서 진법을 깰 방법을 찾아보자.”

    휘이잉!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싸늘한 바람과 함께 안개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대원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든 운휘가 외쳤다.

    “함정이다!”

    “대형을 갖추어 방비하라!”

    흑영대원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며 기습에 대비했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투명한 수정구(水晶球)를 통해 위에서 내려다보듯 지켜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흥. 무림맹의 쥐새끼들이 걸려들었구나.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여인은 가늘고 긴 손을 뻗어 수정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다. 이곳에 들어선 이상,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할 테니까. 이 천음선녀(天陰仙女)의 음사(陰司: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마.”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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