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얼자(孽子). 위지혁(3)
사천(四川) 성도(省都)에 위치한 당가는 남궁가, 모용(慕容)가, 팽(彭)가, 제갈가와 함께 중원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毒)과 암기에 능했으며, 당가에서 나온 인재들 중에는 주로 암습에 능한 자객(刺客)들과 독술사(毒術士)가 많았다. 일부는 독에 대한 재능을 살려 의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당가의 사람들은 냉혹하며 비정한 성정을 가지고 있어 자신들의 일에 거슬리는 자들은 정도를 가리지 않고 손을 쓰기로 악명이 높았다. 흔히 강호에 떠도는 격언으로 ‘절대 당가와는 척을 지지 말라.’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남량은 이제야 이 사건의 전모를 알 것 같았다.
사천의 당가는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흑도의 소행으로 꾸며 사람들의 땅과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아 온 것이 분명했다. 아마 협행을 하러 온 협사들도 그들의 손에 당한 것이리라.
“정파의 탈을 쓰고 약자들을 핍박하다니. 마교보다 더한 악질들이 여기 있었군. 하하하…….”
남량은 웃음을 터뜨렸다.
“유계성이 쌓아 올린 이 문서들과 전표는, 모두 힘없는 백성들을 핍박해 얻어 낸 것들이다. 그리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고 짓밟는 것이야 당연한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그건…….”
유계성이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남량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말이 틀렸다고 한 적 없다. 오히려 전적으로 동의하지.”
슈아앙!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량이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려 사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제법 기세가 날카롭다만 그래 봐야 절정의 경지. 당가의 비기(秘技)로 단번에 끝을 내 주마.’
사내는 양손을 품에 넣어 대량의 암기를 허공에 흩뿌렸다.
파파파파팟!
날아간 수십 개의 암기가 마치 소용돌이처럼 나선을 그리며 남량을 덮쳐 왔다.
“당가의 회선폭화비(回旋爆火飛)는 하나만 몸에 닿아도 폭발을 일으킨다. 어찌하겠느냐?”
사내는 남량이 당연히 뒤로 물러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많은 암기를 하나도 맞지 않고 피하는 것이란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나 남량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높여 암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죽을 생각인가? 멍청한…….’
후웅!
그 순간, 남량은 발을 허공에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남량의 신형이 급속도로 빨라지며 암기 다발을 파고들어 단숨에 사내의 앞으로 도달했다.
사내의 웃음이 멎고 경악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방금, 허공을 딛고 한 번 더 가속을……. 그럴 리가! 그건 경공의 최고수들이나 가능한 허공답보(虛空踏步)일 텐데!’
당황한 사내의 반응이 한발 늦었다.
촤악!
남량의 검이 사내의 가슴팍을 베고 지나갔다.
사내의 옷자락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넣어 둔 땅문서와 전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으윽!”
사내는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팍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틀었나…….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군.”
바닥에 착지한 남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경(唐瓊) 어르신!”
위지혁을 공격하던 복면인들이 깜짝 놀라 당경을 보호했다.
“얼른 문서랑 전표부터 챙겨!”
당경이 버럭 소리치는 그때, 누군가 떨어진 문서 앞으로 다가왔다.
“위지혁?”
위지혁은 손을 뻗어 문서와 전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불타고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이게 전부……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재산이란 말이지.”
위지혁의 생각을 짐작한 유계성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안 된다! 네 이놈! 뭐 하는 짓이냐!”
위지혁은 고개를 돌려 유계성을 한 번 쳐다보더니, 불 속에 종이 뭉치를 망설임 없이 던져 버렸다.
화르륵!
종이는 불에 들어가자마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유계성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내, 내 전 재산이…….”
당경을 비롯한 복면인들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위지혁은 매우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그게 네 선택인가.’
남량은 당경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전부 사라졌는데, 이 싸움을 언제까지 계속할 거지?”
문서와 전표가 타 버렸으니, 이들이 가져갈 것은 없었다.
당경은 불같이 성을 내며 한바탕 포효했다.
그리고 차갑게 굳은 눈으로 남량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놈들의 얼굴, 기억했다. 강호에 떠도는 격언을 알고 있겠지? 당가는 절대 원한을 잊지 않고 열 배로 되갚는 곳이다. 기대하거라.”
당경은 말을 마친 뒤 복면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났다.
남량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당경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당가 사람을 죽이면 그야말로 당가와 척을 지는 셈이니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일을 방해한 셈이 되었으니 보복을 당할 각오를 해야겠군. 남북 십성, 당가의 독왕(毒王)은 과연 어떤 방식을 취할 것인가. 타고난 성정이 괴이한 자이니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 터.’
쾅! 우지끈.
전각이 무너지며 불길이 거세게 타올라 밤하늘을 밝혔다.
***
다음 날, 무림맹에서 보낸 사람들이 도착해 부상자를 치료하고 시신을 옮겼다.
전투 중 부상을 입은 위지혁은 잠시 유씨 가문에서 치료를 받은 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유계성과 대면했다.
유계성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부상은 없었지만 그동안 모든 재산을 한 번에 날린 터라 정신적인 충격이 엄청났다.
그는 위지혁을 보고는 불같이 진노하며 소리쳤다.
“결국! 결국 네가 우리 가문을 무너뜨리는구나. 네놈이! 그게 어떻게 모은 것인 줄 알고! 그걸 어떻게 불태워!”
밖에서 듣고 있던 남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여측이심(如厠二心:뒷간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이라더니, 죽을 목숨을 구해 줬는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와? 어이가 없군.’
위지혁은 싸늘한 눈으로 유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군가 관아에 고발했다면 큰 벌을 받았을 테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그놈들도 내가 준 뇌물을 받아먹는데, 감히 누가 날 고발해!”
“아, 그래요? 참 대단하십니다. 하하.”
위지혁은 웃고 있었지만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튼 협행을 마쳤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시길…….”
“어딜 가! 네놈이 불태운 돈과 땅, 전부 토해 내고 가라. 토해 내란 말이다!”
유계성이 두 눈을 부릅뜨며 발광을 했다.
위지혁이 차가운 냉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내가 왜 당신을 살려 준 줄 아십니까?”
“…….”
“난 화산파의 제자니까. 약자를 보호하고 협의를 실현하는 도사니까! 그래서 당신을 살려 준 거요. 정이나 미련 따위가 남아서가 아니고. 그러니 착각하지 마시오.”
위지혁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유계성이 머리맡에 놓인 찻잔을 집어 위지혁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찻잔은 위지혁의 바로 옆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유계성은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분노에 찬 눈으로 말했다.
“내가 네놈을 키우고, 먹여 준 세월이 몇 년인데, 누가 종년의 자식이 아니랄까 봐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위지혁이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은혜? 무슨 은혜? 당신 필요에 따라 쓰고 내쳤으면서 무슨 은혜? 내 어머니가 병에 걸려 죽기 전에도 치료는커녕, 병이 옮을까 싶어 창고에 가둬 둔 채 죽게 내버려 둔 주제에 무슨 은혜!”
위지혁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았다.
“그깟 신분이 뭐라고……. 적자, 얼자가 뭐라고……. 다 같은 자식인데…….”
위지혁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평생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오.”
위지혁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방문을 열었다.
등 뒤에서 유계성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던 남량이 말했다.
“인사는 다 끝낸 것 같으니, 이만 갈까?”
위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걷던 도중,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펴보니 유계성의 아들인 유안이었다.
유안은 망설이다 위지혁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버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형님.”
위지혁은 잠시 침묵하다 유안을 지나치며 말했다.
“나는 네 형이 아니다.”
***
노을이 서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말을 타고 관도를 따라 낙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위지혁이 말했다.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군. 고맙다.”
남량은 의아하다는 눈으로 위지혁을 응시했다.
‘허어. 그저 자기 멋에 사는 놈인 줄 알았더니, 의외인데?’
위지혁은 남량의 눈에서 속마음을 읽고 웃음을 흘렸다.
“알아. 내가 유아독존(唯我獨尊)처럼 행동한다는 거. 품위에 집착하는 것도, 사실 어릴 적 기억 때문에 그래. 아버지…… 아니, 유계성이 내게 가르쳤던 것들이거든.”
위지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가 죽고 집안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던 나를, 스승님이 발견하고 거두셨지. 내게 스승님은 부모이자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야. 그래서 그분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러니 그동안 네게 적대적으로 굴었어도 이해해라. 우리 스승님이 매화검선을 증오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전혀 몰랐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남량은 눈살을 찡그렸다.
‘이건 도장이 유우화를 증오한다고? 그럼 설마……. 매화검투에서 나를 곤경에 빠트린 것도…….’
위지혁이 씁쓸히 웃었다.
“네 표정 보니까 눈치챈 것 같네. 맞아. 매화검투 때 혁련 사숙이 널 막은 것도 스승님이 꾸미신 일이다. 네가 강호에 나가 명성을 쌓지 못하게 하려고.”
“역시 그랬군.”
“하지만 더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건 비겁한 짓이고, 무엇보다 내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어.”
위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나는 스승님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장문인의 자리에 오를 거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너를 뛰어넘겠어. 오로지 내 힘으로 말이야.”
남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불가능할 텐데? 아무튼 열심히 해 봐.”
위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물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 주겠지?”
“비밀? 무슨 비밀?”
“내 과거에 대해 말이다. 알려져 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으니…….”
남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얼자인 과거를 숨겨 달라고? 이놈 설마, 자신의 과거가 알려지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던 남량의 입가에 장난 어린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발견한 위지혁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미소, 무슨 뜻이야!”
“응? 무슨 미소?”
“방금 미소 말이다! 너 설마,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남량이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글쎄? 그냥 지나치기에는 우리 위 사형의 과거가 너무 흥미로운데요? 운휘나 찬야에게 알려 주면 재미있는 놀림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하겠군.”
남량의 말에 위지혁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평소 물과 기름처럼 만나면 다투기만 하던 그놈들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위지혁이 다급히 말을 몰아 남량의 곁으로 다가왔다.
“비밀 지켜! 안 그럼 가만두지 않겠다!”
“무서워 죽겠구만. 그럼 먼저 갈게!”
남량이 말을 몰아 멀어지자, 위지혁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기, 기다려!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보자……. 뭐가 좋으려나.”
“이놈이 나한테 대체 뭘 시키려고…….”
“긴장 풀어.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노을이 떨어지는 낙양(落陽)의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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