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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32화 (32/164)
  • <32화>

    요리왕 운휘

    일행은 낙양 무림맹으로 돌아왔다.

    요양을 핑계로 한동안 협행을 쉬게 된 남량은 그동안 천양신경을 수련하는 데 매진했다.

    한적한 별실(別室) 마당에서 널찍한 바위에 앉아 가부좌를 튼 채 천양신경을 수련하던 남량은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눈을 떴다.

    “배고파…….”

    아랫배를 슬쩍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바위 밑에 놓아둔 죽통을 들고 냉수로 목을 축인 뒤, 느린 걸음으로 마당을 나왔다.

    다들 협행을 나가 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는 수없이 오늘도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듯했다.

    남량은 무림맹 내부에 위치한 미맥전(米麥殿)으로 향했다.

    미맥전은 맹의 무사들이나 하인들이 식사를 하는 식당이었다.

    미맥전 숙수의 솜씨가 제법 훌륭해 남량은 요 며칠 그곳을 매일 방문하고 있었다.

    남량이 복도를 거닐자 지나치던 맹의 여무사들과 여자 하인들이 힐끗거리며 남량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뭔가를 속닥거리며 쿡쿡 웃음을 흘리거나 얼굴을 붉혔다.

    맹에 오고 나서부터는 익숙한 반응인지라 남량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웅성웅성.

    마침 중반(中飯: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미맥전에는 사람들이 제법 몰려 있었다.

    남량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항상 앉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주문을 받는 하인이 남량의 얼굴을 확인하고 잽싸게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오셨군요? 항상 오시(午時:11∼13시)에 맞춰서 오시네요?”

    “그냥 배가 고파서 온 건데.”

    “하하. 공자님 배는 참 편리하네요. 밥 먹을 시간을 정확히 아니까요. 주문은 늘 하던 대로 우육면 한 그릇, 맞죠?”

    “그래.”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인이 떠나고 남량이 홀로 차를 마시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형님!”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운휘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협행 끝나고 오는 길?”

    남량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운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개봉 인근 녹림도 토벌이었는데, 나름 재미있었어요. 채주라는 놈은 절정의 고수라고 자신만만했는데, 막상 상대해 보니 전혀 아니던데요? 무공도 허접하고 내공도 부실하고. 대충 이십 합 만에 끝내 버렸어요.”

    “경지가 높다고 무조건 강하다는 건 아니야.”

    남량이 웃으며 말했다.

    “왜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의 무인들 중에 내가고수(內家高手)가 많은 줄 알아? 기(氣)는 정순할수록 강하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도가와 불가의 내공심법이 심법 중 제일이라고 하지. 그중에서도 네 건원청심법은 내가 아는 한 도가 최상승의 심법이야. 칠절매화검 역시 상승의 검법이니 한낱 산적 채주가 익힌 잡다한 무공보다 몇 배는 뛰어나고. 네 경지는 비록 일류이지만, 어지간한 절정 초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거야.”

    남량은 ‘그렇다고 자만하지는 말고.’라며 덧붙였다.

    “아무튼, 이대로면 금방 절정에 도달할 수 있겠어. 찬야한테 명령해서 영약을 좀 구해 와야겠군. 그럼 절정의 벽을 뛰어넘는 걸 훨씬 앞당길 수 있으니. 너는 지금처럼 많은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몸에 익혀 두도록 해. 타고난 근골과 노력이 더해지면 10년 후,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거야.”

    운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제 길은 언제나 형님의 옆입니다! 형님이 언젠가 천하제일의 자리에 올랐을 때, 제가 그 옆을 지킬 거예요! 천하제일인을 지키는 데 모자람 없는 무인으로 성장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남량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직은 한참 멀었어. 그건 그렇고, 식사는 아직이지?”

    “네!”

    “난 이미 주문했는데, 뭘로 먹을래? 이곳 숙수의 실력이 괜찮아. 물론 너만 못하지만.”

    그때, 마침 우육면을 들고 온 하인이 살짝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이분이 그렇게 요리를 잘하세요?”

    “천하제일이지.”

    남량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난 지금까지 운휘가 해 준 밥보다 맛있는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어.”

    마교에도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 자부하는 숙수들은 많았다.

    물론 남량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숙수에게 항상 밥을 차리게 했다.

    그런데 남량은 운휘의 밥이 그들보다 더 맛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 말은 조금의 거짓도 보탬이 없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저녁은 네가 해라.”

    운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우육면.”

    “중반도 우육면인데 또요?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여기 우육면은 네가 한 맛이 안 나잖아.”

    남량의 말에 하인은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기껏해야 몇 가지 간단한 요리 정도나 할 줄 알게 생긴 사내가, 요리를 잘해 봐야 얼마나 잘한단 말인가?

    하인은 남량의 앞에 우육면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죄송한데, 여기 미맥전 숙수장님은 한때 황궁에서 일하셨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시거든요? 천자(天子:황제)님께서도 인정하신 중원 최고의 실력이라구요!”

    남량은 운휘에게 그릇을 밀었다.

    “네가 한번 먹어 보고 평가해 봐.”

    “그럴까요?”

    운휘는 먼저 국물을 한번 떠먹은 다음,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먹었다.

    하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반응을 기다렸다.

    “어때?”

    남량이 물었다.

    “음. 나쁘지 않네요.”

    “나쁘지 않다고요? 그게 단가요?”

    하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주 조금? 기름지고 짠 것만 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운휘의 말에 하인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멍해졌다.

    “저, 정말 이분 요리가 숙수장님 요리보다 맛있다는 말인가요?”

    “정말이라니까. 믿지 못하겠다면 확인해 보든가. 마침 주방도 마련되어 있겠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야 언제든 가능하죠.”

    운휘가 고개를 돌리자 하인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잠깐만요. 일단 숙수장님한테 허락을 맡아야…….”

    남량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맡으면 되지.”

    “으음…….”

    하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량은 오랜만에 운휘가 만든 음식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운휘는 우육면의 맛을 보며 ‘오, 이건 좀 괜찮은데?’, ‘칼솜씨가 좋으시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수, 숙수장님이 괜찮다고 하세요. 그런데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신지 ‘어디 만들어 봐! 나도 한번 보게!’라고 하시는데요…….”

    남량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탁자를 쳤다.

    “하하! 그 사람 황궁에서 일했다며? 자존심에 상처 좀 입겠는걸?”

    운휘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산의 재료는 신선하지만 항상 아쉬웠는데, 여기서는 제대로 된 우육면을 형님께 만들어 드릴 수 있겠네요! 재료가 있으니 따로 장을 볼 필요도 없고!”

    남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대할게.”

    “조금만 기다리세요.”

    운휘는 검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관심이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뭐야, 화산파 도사님이 요리를 한다고?”

    “으하하! 이거 재미있겠는데! 한번 보자고!”

    “내기할까? 누구 요리가 더 맛있는지?”

    “그래도 숙수장 실력에 어디 비하겠는가!”

    조금 뒤, 운휘는 쟁반에 우육면 한 그릇을 받쳐 들고 주방을 나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자! 다 됐어요.”

    남량은 하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어서 먹어 봐. 냉정하게 평가해.”

    “아, 알았어요.”

    자리에 앉은 하인은 먼저 숙수장의 우육면을 한 입 먹고 다음으로 운휘의 것을 먹었다.

    직후, 하인의 눈이 번쩍 뜨이며 그가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왜 그래! 독이라도 들은 게야?”

    지켜보던 한 사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하인은 손에 든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탱글탱글한 면과 아삭한 채소. 깊은 육수와 고기의 선미(鮮味:감칠맛)가 입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어! 이 맛은, 생전 처음 먹어 보는 맛이야! 이럴 수가! 정말 이분의 말이 사실이었어!”

    “오오오!”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일제히 환호성을 내뱉었다.

    “하하. 그 정도야?”

    운휘가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됐지? 그럼 이제 나 좀 먹자…….”

    남량이 하인에게서 젓가락을 빼앗으며 그릇을 자신의 쪽으로 당길 때였다.

    “이봐, 나도 한 입만 먹어 보자!”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이런 반응이 나와?”

    “설마 아편(阿片:마약)이라도 집어넣은 겐가?”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뻗으며 애원했다.

    “무슨 그런 망발을! 요리는 신성한 거라고!”

    운휘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이제 그만 가시오! 배고프니까.”

    남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하인은 여전히 충격을 금치 못한 채였다.

    그때 주방의 문을 박차고 누군가 거칠게 걸어왔다.

    “수, 숙수장님!”

    머리에 하얀 천을 두르고 팔을 걷어붙인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남량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게 더 맛있단 말이냐?”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으로 반쯤 기절해 있는 하인을 가리켰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아편을 했다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저 모습을 보면 답이 딱 나오지 않습니까?”

    노인은 표정을 잔뜩 구긴 채 우육면 그릇을 번쩍 들어서 냄새를 확인했다.

    “이봐요!”

    계속 먹는 걸 방해하자 남량이 짜증을 냈다.

    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잠깐 우육면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이 요리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

    “나요!”

    운휘가 당당히 손을 들며 나섰다.

    어릴 적 사파 무리에 있었고, 아버지처럼 길러 준 화성 진인이 죽은 이후로 예절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던 탓에 운휘는 예의범절과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 서투른 면이 있었다.

    운휘를 발견한 노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나는 요리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데 칼로 사람을 해하는 놈의 손에서 나온 요리가 나보다 낫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다!”

    운휘가 발끈해서 응수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요리야 먹는 사람을 향한 마음과 맛만 있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때, 남량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인정 못 하겠으면 얼른 먹어 보세요. 어르신도 요리사로서의 긍지가 있다면 거짓말은 못 하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좋다!”

    노인은 남량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어 들고 면을 건져서 먹었다.

    순간, 노인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 이건…….”

    이번에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마셨다.

    직후, 노인은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릇을 내려놓으며 외쳤다.

    “어떻게 이런 맛을! 한 입 먹었을 뿐인데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야!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구름을 걷고 있는 듯해! 아아…….”

    노인은 외마디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숙수장을 부축했다.

    ‘이런 미친……. 이 사람들 왜 이래?’

    남량은 황당한 표정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은 머리에 두른 천을 풀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맛의 정수! 내 대에서는 이뤄 내지 못해 못내 아쉬웠는데 드디어 내 숙원을 이뤄 줄 제자를 찾아내고 말았구나!”

    “뭐, 뭔 정수?”

    노인은 운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젊은이! 이름이 뭔가!”

    “우, 운휘…….”

    “내 제자가 되어라! 내가 평생 갈고닦은 비법들을 모조리 전수해 주마! 나와 함께 요리왕의 길을 걷자꾸나! 기필코 너를 최고의 자리에 앉혀 주겠다!”

    “풉!”

    우육면을 한 입 먹던 남량이 입에 든 면과 야채를 뿜어 버렸다.

    운휘는 당황하며 노인의 손을 뿌리쳤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요! 나는 열심히 검을 갈고닦아…….”

    “아니야! 자네는 요리의 재능을 타고났어! 그 재능을 썩힌다는 건 요리의 신에 대한 모독이네! 하늘이 주신 재능을 이렇게 썩힐 셈인가?”

    “아니, 나는 요리로 천하제일이 될 생각이 없다니까! 놔요, 좀!”

    그렇게 미맥전에 일어난 작은 소동(?)과 함께 하루가 지나갔다.

    ***

    “그 미친 영감! 도망치느라 죽는 줄 알았네!”

    별실로 돌아오는 도중, 운휘가 저린 손을 부여잡으며 투덜거렸다.

    “숙수장이 아주 작정을 한 것 같던데, 이참에 목표를 바꿔 보는 건 어때?”

    “정말 형님까지 그러깁니까?”

    남량이 쿡쿡 웃으며 말하자, 운휘가 벌컥 화를 냈다.

    입술을 삐쭉 내밀며 걷던 운휘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참, 형님. 나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도대체 우육면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까? 사연이라도 있는 거요?”

    “…….”

    잠깐 침묵하던 남량이 대답했다.

    “누가 자주 해 줬거든.”

    “누가요? 유 도장님?”

    “아니…….”

    남량은 떨어지는 노을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더 전 사람…….”

    운휘는 더 물어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치솟았지만, 남량의 옆모습이 매우 슬퍼 보여 입을 닫았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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