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은영단(隱映團)(8)
‘이건 위험해.’
흑표는 경악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정의 경지였던 상대의 기세가, 갑자기 급변했다.
흉포하며, 동시에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았다.
믿기지 않지만, 그 기세는 가히 초절정에 비할 만했다.
침이 마르고 숨이 턱 막혀 오는 위압감.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천하의 흑표가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겁에 질린 꼴이라니!’
흑표는 이를 부득 갈며 내력을 폭발하듯 뿜어냈다.
동시에 남량이 바닥을 박차고 포탄처럼 쇄도했다.
후욱! 뜨거운 열기가 노도처럼 흑표를 덮쳐 왔다.
“오냐, 와라! 정면으로 받아 주마!”
흑표는 괴성을 지르며 끌어모은 내력을 일시에 방출했다.
“맹호과강(猛虎跨江)!”
투콱-!
묵직한 충격파와 함께 터져 나간 검강(劍罡)이 남량을 집어삼킬 기세로 쏟아졌다.
콰아앙!
검강이 충돌하며 폭발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남량의 모습이 흙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흑표가 광소를 터뜨렸다.
“멍청한 애새끼야, 봤느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경지의 격차는 절대 넘을 수…….”
푸확-!
다음 순간, 흙먼지를 뚫고 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을 불꽃으로 뒤덮은 채,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이, 이럴 수가…….’
검강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도 무사했단 말인가?
흑표는 경악하다 못해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친 새끼.”
순식간에 흑표의 지척까지 도달한 남량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흑표는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운, 이글거리는 귀신을 응시하며 발악하듯 갈퀴손을 내질렀다.
“이익-. 어림없다!”
카캉!
남량이 휘두른 검은 흑표의 갈퀴손을 부수고도 힘이 남아 아래로 떨어졌다.
흑표는 자신의 어깨를 가르는 검을 쳐다보며 망연히 눈을 떨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이딴 애송이에게…….’
“매화천수검, 1초식.”
서걱-!
남량의 일검이 흑표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잘린 단면이 깔끔한 일격이었다.
흑표는 극렬한 고통에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한편, 검을 늘어뜨린 남량이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했다.
“쿨럭! 크으…….”
눈과 코, 귀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내력의 운용을 멈추자 폭혈기공의 부작용이 온 것이다.
몸이 타오를 듯 뜨거워지고, 폐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조금만 더 폭혈기공을 유지했으면 분명 죽었으리라.
‘겨우 초절정 하나 상대하는 데 이 고생을 할 줄이야.’
남량은 간신히 호흡을 안정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흑표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뒷덜미를 잡고 벽에 밀어붙인 뒤, 입을 열었다.
“말해. 네놈의 배후가 누구냐.”
“그걸 내가 말해 줄 것 같…….”
푸욱!
남량은 흑표의 어깻죽지에 검을 찔러 넣으며 싸늘히 중얼거렸다.
“어차피 죽을 놈…….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며 죽어 가게 해 줄 수도 있는데, 그걸 원해?”
콰득.
남량이 검날을 비틀자 흑표가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
“끄윽, 으아악!”
“말해. 네놈 배후가 누군지.”
꺽꺽거리며 비명을 토한 흑표가 덜덜 떨리는 발음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나도 몰라……. 정말이다. 난 그저……. 무너진 사파의 세력을 부흥시키고자 일어난 집단 중 하나일 뿐이야. 그것들을 주도한 건 우리조차 처음 들어 본 조직이었고…….”
“그 조직에 대해 아는 걸 빠짐없이 말해.”
“흑룡회(黑龍會)……. 분명 그렇게 불렀다.”
“흑룡회?”
눈살을 찌푸린 남량이 물었다.
“그곳의 총수(總帥)를 본 적이 있나?”
“딱 한 번……. 한 번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발에 호리호리한 체격. 분을 바른 듯 새하얀 피부. 세로로 쭉 찢어진 눈과 샛노란 동공……. 잘생긴 미남자였지만 차갑고 마치 뱀을 연상케 하는 사내였다. 그리고 우린 그자에게 편익의 문신을 받았지…….”
“효초아…….”
결국 제 귀로 확인하고 말았다.
효초아가 중원에 들어왔으며, 흑룡회라는 조직을 설립해 사파들을 조종하고 있음을.
놈들은 남량의 예상대로 중원 정복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흑룡회의 위치는? 어디에 있지?”
“그놈들이 얼마나 치밀한데, 그걸 알려 줄 것 같아? 지령도 전서구를 통해서만 이뤄져서 연결책조차 있는지 몰라……. 그가 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를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놈들은 어둠 속에서 중원을 주무르고 있어…….”
흑표는 낄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어……. 그는 간교하고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지. 무엇보다 고강한 무공 실력까지……. 어차피 중원은 곧 그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야…….”
콰콰콱-!
남량은 더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 검을 휘둘러 흑표의 전신을 갈가리 도륙 냈다.
칼날에 묻은 피와 살점을 가볍게 털어 내며 검집에 넣은 남량은, 몸을 돌리며 툭 던지듯 말했다.
“내가 있는 한 그렇게는 안 돼.”
마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남량은 무림맹이 오기 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남량은 그길로 무림맹에 귀환했다.
양악은 뒤늦게 주변을 수색해 흑표와 호위대의 시신을 발견했고, 그의 죽음과 관련된 새로운 조사에 착수했다.
은영단이라는 살수 집단으로 하여금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한 배후에 대해.
양악은 흑표와 호위대를 죽인 자도 아마 배후에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남량은 다친 몸으로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탓에 다시 치료를 받게 되었고, 며칠간 요양했다.
몸이 나아 퇴실을 할 때가 되자, 남량을 비롯한 매화오절은 총관 건옹의 부름을 받아 그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형님?”
“보다시피.”
“에휴. 한바탕 거하게 날뛰어 볼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재미는 형님만 보고…….”
집무실로 올라가는 와중, 운휘가 아쉽다는 듯 투덜거렸다.
팔짱을 낀 채 걷던 찬야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우리도 명성이 자자해. 남 사제의 활약이 어쩌다 보니 매화오절의 활약으로 바뀌었지 뭐야. 하하.”
맹의 골칫거리였던 은영단 사건을 해결하는 데 남량의 활약이 가장 컸다는 사실은, 곧 전 강호에 퍼졌다.
호사가들은 화산의 젊은 기대주들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쏟아 냈고, 화산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남량이 미령전에서 요양하는 동안, 화산에서 장문인 구양중으로부터 수고했다는 전갈을 받기도 했다.
“나도 남 사제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흐흐.”
“무슨 소리야?”
남량의 물음에 운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마세요 형님. 이 새끼 어제도 그제도 기루에 가서 여자애들 끼고 놀았다고요!”
퍽.
운휘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친 찬야가 말했다.
“날 애타게 부르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손길을 어찌 지나치겠어?”
빠악!
찬야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친 남량이 말했다.
“이 새끼는 내가 의실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영약을 구해다 주지는 못할망정, 기녀를 끼고 즐겨?”
“미, 미안해 남 사제…….”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던 찬야는 이쪽을 째려보는 유라의 시선을 발견했다.
“왜 또 도끼눈을 뜨고 노려봐? 그렇게 남 사제가 싫어?”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째려본 건 너야. 도사라는 놈이 기루에 간 걸로도 모자라 기녀들이랑 놀아나? 수치인 줄을 알아라.”
유라는 시선을 돌려 남량을 응시하며 말했다.
“남 사제, 너는 칭찬받아 마땅하지. 수고했다. 화산의 이름을 지고 큰 공을 세웠으니 잘한 일이야.”
“고맙다.”
남량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유라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네놈이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니야!”
“하하.”
남량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엄격하고 고지식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제법 귀여운 면이 있다.
“아이고. 저렇게 앞뒤로 꽉꽉 막힌 여자는 처음일세!”
반면, 찬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질색을 했다.
“남 사제,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런 여자랑 맺어지면 피곤해. 경험자로서 해 주는 조언이라고. 사소한 일마다 꼬투리 잡고 성질을 긁어 대니 아무리 미색이 뛰어나다고 해도 참을 수가…….”
“닥쳐, 이 호색한!”
유라가 욕설을 내뱉으며 찬야의 정강이를 걷어차려 하자 찬야는 잽싸게 남량의 뒤로 숨었다.
한편, 홀로 걷던 위지혁은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발 좀 닥치고 걸어라! 품위를 지키라고! 여긴 무림맹이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나도 싸잡아서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긴 알아? 그러니…….”
빠악!
위지혁의 뒤통수를 후려친 운휘가 코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목소리 좀 낮춰. 맨날 천박하다느니, 품위를 지키라느니 지랄하면서 항상 네가 제일 경박해. 알아?”
“이, 이이…… 천박한 짐승 놈이……!”
위지혁이 이를 부득 갈며 운휘에게 달려들었고, 운휘는 혀를 삐쭉 내밀며 몸을 뺐다.
마찬가지로 유라와 찬야도 남량을 중심으로 술래잡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량은 멀뚱히 서서 얼굴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애새끼들을 정말 끝까지 데리고 가야 한단 말인가?
***
“아주 수고했네. 훌륭하게 맡겨진 일을 해냈더군. 이거야 원,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무안할 지경이야. 하하.”
총관 건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다음 임무 전까지 심신을 편히 하도록 하게. 머무르면서 필요한 것들은 맹에서 전부 지원할 것이며, 필요한 비용도 전부 댈 것이니.”
“감사합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했다.
“총관 어르신.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일공자, 제갈랑(諸葛浪) 공자십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
건옹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면목 없네. 이렇게 불러 놓고…….”
“아닙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남량 일행이 일어나자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젊은 귀공자는 새하얀 백의에 녹옥빛 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관모를 쓰고 품위가 단정했다. 콧대가 날카롭게 솟고 눈매가 차분해 기품이 있어 보였다.
‘제갈세가 놈들은 여전히 똑같이 생겼군.’
호북성 용중(俑中)에 위치한 제갈세가는 중원에서 가장 위명이 높은 오대세가(五大世家)의 일원이며, 규율이 엄격하고 두뇌가 총명하며 금욕적이고 절제적인 생활 덕분에 뭇 공자들의 귀감으로 명성이 높았다.
제갈랑은 남량 일행을 발견하고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선객이 계셨군요. 저는 제갈랑이라 합니다.”
“화산의 도사 남량입니다.”
“명성이 자자한 도사님들이시군요. 오는 길에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과찬이십니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난 뒤, 제갈랑이 말했다.
“마침 오셨으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마 흥미가 일 겁니다.”
“네? 무슨…….”
남량의 물음에, 제갈랑이 씩 웃으며 말했다.
“바로 전설의 지하미궁(地下迷宮)에 대해서입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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