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매화검투(梅花劍鬪)(13)
“덕분에 좋은 구경을 했네. 조심히 가게.”
“감사합니다.”
남량은 구풍의 대장간을 나와 유우화와 함께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어디로 갑니까?”
“따라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선의관(鮮衣館)이라는 현판이 걸린 포목점이었다.
포목점은 또 왜?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내부 장식들이 시선을 어지럽혔다.
“섬서에서도 가장 유명한 포목점 중 한 곳이다. 전국에서 발걸음이 모여드는 곳이지. 단순한 의복을 비롯해 수의(壽衣:시체에 입히는 옷), 법의(法衣:승려가 입는 옷), 도의(道衣:도사가 입는 옷) 등 다양한 제작을 맡아서 한단다.”
“오호…….”
의가(衣架:옷걸이)에 걸린 비단옷을 만지던 남량은,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놈!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
그곳에는 비단옷을 입고 짙은 화장에 손에는 곰방대를 든 젊은 여인이 역정을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유우화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이보게 원영(袁英). 나 왔네.”
“아아, 유 대인. 오셨어요?”
유우화를 알아본 여인, 원영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이쪽은 일전에 말한 내 제자일세.”
“어쩐지 백발이 눈에 익다 했더니…….”
남량을 지그시 쳐다보던 원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숨겨 둔 자식은 아니지요?”
“사실 맞네.”
“농담을 받아치는 솜씨가 느셨군요.”
“자네만 하겠는가? 하하.”
유우화는 껄껄 웃으며 원영을 소개했다.
“량아. 이쪽은 원영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옷을 만드는 재주가 아주 뛰어난 여인이란다.”
“스물다섯이면 어린 나이 아니에요. 언제까지 애 취급 하시려는지 원…….”
짧게 한숨을 내쉰 원영이 말했다.
“반가워. 네가 남량이지?”
원영은 남량의 머리부터 발끝을 가볍게 훑었다.
“키도 적당하고, 얼굴도 여리여리하게 잘생겼네요. 옷태가 잘 받겠어.”
“네?”
“왜 놀라? 너 새로운 도복 맞추러 온 거 아냐?”
남량의 시선이 유우화를 향했다.
“첫 강호행인데, 도복 한 벌 정도는 맞춰야지. 그동안 수련에 매진하느라 가지고 있던 도복이 전부 해지지 않았더냐.”
“검만 있으면 충분한데 굳이…….”
그때 원영이 남량의 등을 찰싹 때렸다.
다짜고짜 등을 맞은 남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아직 덜 컸네, 덜 컸어. 스승님이 얼마나 들떠하는지도 모르고! 눈치가 있으면 좋아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너한테 어울리는 수를 놓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만하게. 당황할 수도 있지. 하하.”
남량은 적잖이 충격을 받아 말도 안 나왔다.
감히, 감히 천마의 등을 애 다루듯 때린다고?
하도 기가 막혀서 화도 안 날 지경이었다.
“뭘 그렇게 봐? 아프냐? 엄살이 심하네.”
“…….”
나를 마교에서 안 만난 걸 감사하게 여겨라.
내가 천마였으면 넌 즉결처형감이다.
“따라와. 일단 치수부터 잴 테니까.”
원영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 남량의 손에는 어느새 도복 한 벌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도포치고는 좀 화려한 것 같은데요?”
수를 놓았다더니, 아무런 문양도 들어 있지 않은 기본 도의가 아니라 화려한 매화 무늬가 들어간 채의(彩衣:무늬가 있는 옷)였다.
“화산의 검사라면 자고로 멋을 알아야 하는 법. 무당같이 칙칙한 도사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 줘야 하지 않겠느냐?”
유우화의 말에 원영이 맞장구를 쳤다.
“암! 뭐든지 화려한 게 멋진 법이지!”
“그래. 어서 입어 보거라.”
유우화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남량을 재촉했다.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는군.
남량은 하는 수 없이 도복을 들고 경의실(更衣室:탈의실)로 들어갔다.
낡고 해진 도복을 벗고, 새 도복을 걸쳤다.
연분홍빛의 도복에는 금실로 매화 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여 있었다.
환생한 이후 화려한 옷을 입어 본 적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천마였을 시절에는 매일같이 입었던 옷들인데…….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유우화와 원영이 동시에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인물이 훨씬 사는구나. 하하.”
“가, 감사합니다.”
민망해진 남량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구풍의 집안이 대대로 화산제일검의 검을 만들었듯, 원영의 집안도 대대로 화산제일검의 옷을 만들어 왔단다. 참고로 내 옷은 원영의 친모께서 매번 만들어 주었지.”
유우화는 원영에게 옷의 비용을 지불하고 남량을 불렀다.
“이만 가자. 원영, 수고했네.”
주렴을 걷고 건물을 나서는 남량에게, 원영이 말했다.
“남량이라고 했지? 너 꼭 화산제일검이 돼서 다시 와. 그래야만 내 옷을 입을 자격이 있으니까.”
“……명심하지요.”
명심은 개뿔.
내 등을 때린 대가는 언젠가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까악. 까악.
멀리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산 너머로 떨어지는 노을빛에 그림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가야 하니 서둘러야겠습니다. 저자를 벗어나면 바로 업히시지요.”
“그래.”
해가 지는 시각의 저잣거리는 한산했다.
남량과 유우화는 천천히 걸으며 거리를 구경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점포 문을 닫으려는 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때, 유우화의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량아, 잠깐만.”
“네?”
“잠깐 저길 좀 들르자꾸나.”
유우화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남량이 눈을 깜빡였다.
저긴 장신구 가게인데?
설마 장신구까지 선물로 줄 생각인가? 그럼 미안하지만 정중히 사양이다.
“이보게, 잠깐만 기다려 보게.”
점포 문을 닫으려던 주인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도사님. 죄송하지만 시간이 늦었습니다.”
“값을 두 배로 쳐줄 테니 부탁하네.”
두 배라는 말에 주인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천천히 구경하십시오.”
유우화는 신중하게 장신구를 살펴보다 붉은 매듭끈 하나를 사서 돌아왔다.
“받거라. 마지막 선물이다.”
남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건 뭡니까?”
“홍선(紅線)이라고 들어 봤느냐? 남녀의 인연을 연결해 준다는 운명의 붉은 실 말이다. 훗날 네 운명의 짝을 만나거든 단단히 묶어서 놓지 않으려무나.”
유우화는 남량의 팔에 매듭을 묶어 주었다.
남량이 매듭끈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 혼인 안 합니다.”
“어허! 우리가 무슨 무당의 고지식한 도사들도 아니고, 한창 청춘일 시기를 홀로 보내려느냐?”
유우화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돌다 보면 언젠가는 인연을 만나게 되는 법이다. 한 번뿐인 인생 아니더냐. 홀로 외롭게 보내고 싶지 않으면 이 스승의 말을 잘 새겨듣거라.”
“경험담입니까?”
“…….”
유우화는 움찔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천재로 촉망받아 수련에만 전념했고, 강호에 나선 이후로도 쭉 약자를 구하고 사도를 토벌하는 데에만 전념하느라 이성에 눈을 돌릴 틈조차 없었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름을 널리 떨친 영웅이지만, 그도 실은 외로웠던 것일까?
그래서 당신의 제자만큼은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유우화는 헛기침을 하며 짐짓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흠흠! 허튼소리! 내가 소싯적에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네가 몰라서 그런다. 그때 내가 지나가면 거리의 여인들이 어찌나 관심을 보이던지…….”
“예예, 알겠습니다.”
“이놈이? 그 말투는 뭐냐? 마음에 안 드는구나. 안 되겠다. 화산까지 돌아가는 길에 네놈 경공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시험할 테니 각오하거라!”
“예예, 그러시지요.”
웃기는 놈.
남량은 슬쩍 웃음을 흘리며 유우화를 업은 채 바람처럼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
마침내 무림맹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난 남량은 팔에 묶인 매듭끈을 풀어 머리를 동여맸다.
준비를 마치고 새로운 검, 화양을 챙긴 뒤 조용히 암자를 나왔다.
“이제 가려느냐?”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이 벌컥 열리며 유우화가 얼굴을 내밀었다.
“깨셨습니까?”
“제자가 강호행을 떠나는 날이다. 어찌 잠이 오겠느냐?”
“아,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
“…….”
뭐, 뭐 어쩌라고?
잘 다녀오겠다고 했으면 들어가 처자야지, 왜 눈을 빛내면서 나를 부담스럽게 바라보는 건데?
그러고 보니 이틀 전 저녁, 놈이 지나가듯 한 말이 떠올랐다.
“이 스승님 소원이 강호행 떠나는 제자한테 절 한 번 받아 보는 거였단다.”
이 새끼가 설마……?
나보고 절을 하라는 건가!
유우화는 남량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량은 그 순간 검을 빼 들고 달려들지 않은 자신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냈다.
저런 개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나는 천마다! 긍지 높은 마교의 교주!
이런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길 놈 같으니.
남량이 멀뚱하게 서 있자, 유우화의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
“안 하니?”
“…….”
진짜 절을 안 하면 안 보내 줄 기세다.
남량은 하는 수 없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유우화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몸 성히 잘 다녀오도록 하거라.”
“예, 스승님. 다녀오겠습니다.”
얼굴을 숙인 남량은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죽인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인다!
화산 초입에서 남량을 기다리던 운휘는 남량의 썩은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 어제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얼굴에 그늘이…….”
손에 한가득 당과를 들고 우물거리던 찬야가 말했다.
“저건 수치심으로 충격을 받은 표정이야. 내가 알아.”
“어떻게 아는데?”
“우리 서로의 너무 깊은 곳까지 알려고 하지 말자.”
“또 여자 문제겠지. 호색한.”
“…….”
남량은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어느새 친분이 생긴 모양이다.
비단 도포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위지혁은 여전히 짜증 가득한 얼굴이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늦어 주는군. 망할 놈.”
“다 모였나?”
단정한 옷차림의 유라가 손뼉을 쳐서 시선을 집중시킨 뒤,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명에 따라 이 시간부로 일행의 통솔을 내가 책임지도록 하겠다. 무림맹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내 명령을 장문인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따르도록. 이의 있나?”
“…….”
“좋아. 그럼 출발한다.”
말에 훌쩍 올라탄 유라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다그닥. 다그닥.
남량과 나머지 일행도 잇따라 말에 올라탔다.
‘날씨가 좋군.’
“이랴!”
“이랴!”
일행은 푸른 하늘 아래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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