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序)
천마(天魔) 위광(儰洸).
천산(天山)에 자리 잡은 마교(魔敎)의 교주이자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은 절대자.
그러나…….
“쿨럭!”
그가 궁지에 몰릴 것이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그것도 다름 아닌 내분(內紛)으로 인하여.
“이것들이 감히…….”
위광은 검붉은 피를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마교의 삼천위(三天位)이자 위광의 충실한 수하였던 세 인물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월(地月).
탄영(歎英).
효초아(曉椒雅).
위광을 제외하고 가장 고강한 무공을 자랑하는 그들이었지만, 감히 그들만으로 위광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본좌가 벽을 뛰어넘는 순간을 노린 것이냐?”
위광은 일평생 무도(武道)의 끝을 향해 달렸고, 마침내 자연경(自然境)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에 당할 자가 없던 위광조차도 깨달음을 얻는 그 순간만큼은 무방비할 수밖에 없었고.
눈앞의 반역자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위광을 공격해 왔다.
“네놈들만큼은 믿었는데…….”
위광은 벽을 넘을 동안 이 셋으로 하여금 자신을 지키도록 명했다. 멍청하게도…….
“내 무덤을 내가 팠구나.”
위광은 혀를 차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기습을 당하고 뒤늦게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과는 불 보듯 당연한 일.
자신을 따르던 수하들은 모조리 도륙당했고, 저 또한 팔이 잘려 나가고 가슴에 창과 화살이 박힌 처참한 몰골이었다.
한때 무림 최강자로 군림하던 위광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무림인들이 본다면 얼마나 비웃을지 떠올렸다.
“허무하구나. 참으로…….”
절대자의 벽이 눈앞에 있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잡을 수 있었는데도.
자신의 안일함 때문에 모든 걸 그르치고 말았다.
“잔인한 것들. 하필이면 이때를 노렸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을 이기기란 영원히 요원할 테니.”
하긴, 그야 맞는 말이다.
위광은 손에 들린 검을 응시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휘두를 수 있을까.
아니, 이제 숨이 얼마나 이어질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더러운 배신자들을 전부 저승길 동무로 삼고 싶지만…….
‘불가능하겠지.’
참으로 허무하다.
일평생 패도(覇道)를 걸으며 살아왔다.
사내로 태어나 응당 천하일통(天下一統)의 야망을 가슴에 안고 달려오기를 수십 년.
야망을 위해 싸우다 적의 손에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믿고 등을 맡겼던 수하의 배신으로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하늘은 어찌하여 내게 힘과 지혜를 주고 인복(人福)을 앗아 갔단 말인가!
이런 죽음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단 말이다!
“빌어먹을…….”
일평생 전투 중에 등을 보인 적 없었고, 누군가에게 구차하게 무릎을 꿇은 적 또한 없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에서 언제나 살아남았고, 결국 승리했으며, 패왕(覇王)의 좌(座)가 코앞에 있었다.
그러나 위광이 이룩한 영광은 모두 저 배신자들에게 넘어가고, 자신은 결국 패배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기록이 그따위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의 무덤 앞에서 술잔을 부딪칠 놈들을 떠올리니 더더욱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절대로!
위광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탄영이 말했다.
“아직 발악할 기력이 남았소?”
가면을 쓴 효초아가 끌끌 웃었다.
“천마의 마지막 발악인데 천천히 구경해 봅시다.”
그러자 가운데 선 지월이 말했다.
“치명상을 입었다 하나 천하제일의 자리에 올랐던 자요. 방심은 금물이니.”
그 말을 들은 위광은 웃었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 것이 바로 저것이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궁지에 몰린 쥐도 뱀을 물 수 있으며, 꺼지기 직전의 불길이 가장 거세게 타오르는 법.
겸손하며 어떠한 상황에도 자만하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강한 것임을 저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위광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지월은 그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운명의 장난인가.’
지월은 천천히 손을 들어 위광의 가슴을 겨냥했다.
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거센 충격파가 터지며 위광의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으으…….”
위광은 구멍이 뚫린 아랫배를 응시하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전신에 힘이 빠지고 살고자 하는 희망의 불씨가 허무하게 꺼져 버렸다.
그저 눈을 뜨고 멍하니 놈들을 바라보는 것밖에, 그는 할 수 없었다.
“어머, 시시해라. 온 천하를 집어삼킬 듯 거대한 괴물도 결국 한낱 고깃덩이에 불과했군요.”
탄영은 요사스러운 입술을 달싹이며 나를 조롱했다.
“오늘은 축배를 들어야겠군. 이 망할 괴물 늙은이의 살점을 안주 삼아서 말이지. 하하.”
효초아는 가면 사이로 내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
마지막으로 지월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지막 가는 길은 지켜봐 드리리다.”
가슴에, 용암이 들끓어 오른다.
저들을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원통해 견딜 수 없었다.
미간에 떨어진 침이, 귀를 파고드는 웃음소리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복수를 하게 해 다오. 제발!
이 위광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악마가 있다면 영혼까지 팔 것이니!
바로 그때였다.
일순간 눈앞이 환히 빛나더니, 새하얀 장발에 붉은 비단 관복(官服)을 입은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월의 곁을 지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공허한 눈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너는…….”
위광은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그리고 사내는 마음속 말에 답했다.
“나는.”
사내가 말했다.
“염라(閻羅)다.”
염마(閻魔:염라대왕). 지옥의 염왕.
그 말을 들은 순간 인정하고 말았다.
이토록 강렬한 죽음의 기운이라니. 염라가 아니라면 또 누가 있겠는가.
위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마에 대한 예우(禮遇)인가……. 고맙군. 한낱 저승차사를 보내지 않고 직접 마중 나와 줘서.”
“죽음을 바라느냐.”
염라가 말했다.
“아니면 살겠느냐.”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살겠느냐.’라는 단어 한마디에 나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살겠다. 살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놈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염라는 한동안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곧 저 세 명에 의해 중원의 모든 생명이 멸망한다. 그것은 재앙과도 같아 막을 수 없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건 네가 중원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저들을 막는 것뿐이다.”
“나보고 마교를 막으라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하하!”
위광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운명이 그에게 또다시 시험을 내렸다. 일평생 몸담고 지켜 온 교(敎)를 무너뜨리는 대가로 목숨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조건이다.”
위광이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내가 지켜 왔던 교(敎)는 오늘부로 죽었다. 남은 건 그 껍질을 뒤집어쓴 더러운 기생충들만이 있을 뿐.”
위광은 고개를 들어 배신자들의 면면을 확실하게 영혼의 기억에 새겼다.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잊지 않도록, 똑똑히 각인시켰다.
“나는 살겠다.”
위광은 염라를 향해 말했다.
“살아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대의 뜻대로 해 주겠다.”
염라는 무릎을 펴며 일어서 뒤로 돌아섰다. 천천히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때, 현실로 시야가 돌아왔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억울함과 분노에 찬 위광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배신자들을 향해 오히려 웃었다.
“으흐흐…….”
“이 미친 늙은이가, 갑자기 왜 웃어?”
탄영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죽음을 앞두고 실성한 모양이군.”
효초아도 불편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웃기시오?”
지월이 물었다.
뭐가 웃기냐고?
즐겁다. 너무나도 즐겁다.
내게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 너희들의 그 얼굴이 경악과 고통으로 일그러질 미래를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건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일 것이다.
나는 한시도 낭비하지 않고 달려 나갈 테니까.
네놈들을 목전에 두는 그 순간까지, 조금도 지체하지 않을 테니까.
나, 천마 위광.
무극(武極)의 끝에 도달한 지식과 경험에 독기를 품었다.
한낱 거지촌에서 자란 어린아이의 몸으로 환생해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기생 계집의 몸에 들어간다고 해도, 뚱뚱하고 기름진 몸뚱이를 가진 거상(巨商)의 몸에 들어간다고 해도!
무조건 자신이 있었다.
‘네놈들의 죽음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그게 조금 빨라지냐 느려지냐의 차이일 뿐.’
‘내가 되살아나는 것이 확정된 이상.’
위광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고 시원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 다시 돌아온다.”
퍽-!
직후, 시야가 깜깜해졌다.
어떤 놈이 머리통을 날려 버린 모양이다.
성질 급한 효초아나 성질 더러운 탄영일 것이다.
그래. 날 죽인 이날을 기념하며 실컷 즐겨라.
‘내가 다시 돌아오는 날, 그날은 내가 너희들을 발아래 두고 있을 것이니.’
온통 암흑천지 속,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위광은 그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천마 위광은 죽었다. 이제 그를 뒤로하고 새로운 삶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운이 좋게도 무당의 검제(劍帝)나 종남의 도군(刀君), 남궁의 검성(劍星)의 몸으로 환생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점점 빛이 가까워졌다.
그때, 뭔가가 나풀거리며 눈앞에 떨어졌다.
‘꽃잎이다. 매화(梅花)…….’
화악-!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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