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현세귀환록
202. 신성(4)
“누구냐!”
그 뛰어난 아르포스조차 결계의 힘이 없다면 자신의 기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자신의 기감에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두 명의 등장에 바르자크는 약간 당황하며 외쳤다.
“내가 이름을 말한다고 해서 내가 누군지 알겠어? 저 결계를 펼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네가 물어보는 것에 대한 정답에 가깝겠지? 호호호.”
실제 결계를 펼친 것은 유리엘이었지만, 그녀 역시 강민이 마나 축에 심어놓은 마나를 이용하여 펼친 결계였기에 함께 펼친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소 놀리는 듯한 유리엘의 어조에 바르자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 네가 이 차원에 있던 초월자인가 보군. 신성도 얻지 못한 초월자에게 이런 조롱이라니……. 이 결계를 믿고 그러는 것이냐? 네놈들이 얼마 동안 이 결계를 준비한 건지 모르겠지만, 한 달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이 정도 결계는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을 언급하는 바르자크에게 이번에는 강민이 나서며 말했다.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얻지 않은 것이지. 그리고 한 달? 그래도 한 차원의 주신이면 일주일 정도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약해졌나 보군. 어쨌든 상태를 보고 괜찮으면 이 차원의 신으로 남게 하려고 했더니 영 상태가 좋지 않군.”
강민의 말을 들은 유리엘 역시 바르자크의 상태를 보았는지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이에요. 복수심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이 녀석이 맡으면 조만간에 말세로 진행할 가능성이 크겠어요.”
지금 둘이 보고 있는 바르자크의 모습은 복수심에 가득 찬 광신(狂神)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신이라는 높은 격(格) 때문에 이지는 잃고 있지 않았지만, 마치 심마에 사로잡힌 것처럼 복수를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행동하는 중이었다.
이런 바르자크에게 지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 지금 바르자크의 상태로 미루어 추측해 보면, 그가 지구의 신이 된다면 그는 지구의 전 마나를 이용하여 미케아 차원의 아르포스와 대적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아직 차원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두 마나축을 사역하는 신들의 대립은 결국 양 차원의 파멸로 끝날 것이 자명하였다.
바르자크는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강민과 유리엘을 보며 다시 한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려 좌에서 우로 내저었다.
분명 강민과 유리엘을 노리고 한 공격이었으나, 둘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나타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음?”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자, 바르자크는 한 번 더 손을 저었지만, 여전히 둘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았다.
“소멸의 권능인가? 이 정도로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결계를 보고도 아직 우리 수준을 짐작 못 하는 것 같군.”
“그러게 말이에요. 딱히 갱생의 여지가 없는데 그냥 처리해 버리죠. 결계도 남아 있으니 처리한다 해도 후폭풍을 충분히 견뎌줄 것 같아요. 일단 내가 저기 일곱 명을 상대하죠.”
바르자크가 나선 이후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던 일곱 상급신은 유리엘의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즉각 전투를 준비하였다.
특히, 루스틴의 주먹에는 한눈에도 가공할 만한 마나가 담겨 있는 검은 기운이 맺혀 있었는데, 유리엘이 말을 마치자마자 문답무용의 일격을 그녀에게 날렸다.
콰앙!
갑작스러운 루스틴의 공격이었지만, 유리엘은 어느새 자신의 주위에 방어 결계를 펼쳐놓고 있었다.
쾅! 쾅! 쾅!!
루스틴은 결계를 뚫기 위해서 전력으로 그녀의 결계에 주먹을 내려쳤지만, 결계에는 별다른 흠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루스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유리엘이 나지막이 강민에게 말을 건넸다.
“주신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얘들도 저 바르자크라는 자와 다르지 않네요. 신성을 얻었다는 것들이 복수심만 가지고 있다니, 쯧쯧…….”
유리엘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루스틴은 나머지 여섯 명에게 눈짓했고, 조금 전 마나 축에 결계를 뚫듯이 일곱 명의 상급신은 유리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시작해 볼까?”
유리엘이 일곱 명에게 공격받고 있었지만, 강민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바르자크에게 말을 건넸다.
“허. 저 여자는 네 반려 같은데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저 정도 공격으로 유리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
“자만심이 과하군.”
“자만인지 자신인지는 직접 겪어보도록.”
그렇게 말을 끝낸 강민의 손에는 어느새 은은한 흰빛을 발하는 바스타드 소드가 날카로운 날을 빛내고 있었고, 바르자크 역시 어둠의 기운을 뭉쳐서 만들었는지 은은한 검은빛을 띠는 롱소드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어색하다고 느껴질 무렵, 둘은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챙챙챙챙! 채앵!
이 넓은 흰 공간의 이곳저곳에는 검이 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 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검격 소리만 들려오다 일순간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폭음이 그치자 강민과 바르자크는 아까 둘이 처음 사라졌던 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신(神)치고는 검술이 상당한데? 검의 신이나, 무술의 신이라 자칭하는 것들보다도 훨씬 낫군.”
일반적으로 신과의 대결은 권능을 파훼하고 본질을 베어내는 싸움이었다. 이렇게 검격을 마주하는 대결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강민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르자크를 보며 말했다.
“……대체 넌 누구냐? 신성도 얻지 못한 고작 초월자가 이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또 그 소린가? 아까도 말했잖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얻지 않았다고. 뭐 조만간에 창세(創世)를 해서 직접 신이 될 생각도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 곧 얻을 거야.”
“무, 무슨 소리냐? 창세를 한다니…….”
“아. 신화에 따르면 넌 자연 발생적인 신이었지? 그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일반적으로 차원에 신이 생기는 경우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바르자크처럼 차원에 가득 찬 마나에서 저절로 의지가 발현하여 신성을 갖는 경우였고, 다른 하나는 강민이 계획한 대로 극도로 깨달은 초월자가 차원을 벗어나서 창세를 하여 그 차원의 신이 되는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창세 원리나 과정도 알고 있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후자의 케이스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네놈을 처리해야 이 차원을 장악할 수 있을 듯해 보이니 이제 그만 끝내자.”
바르자크는 아직도 강민의 내재된 힘을 완전히 알아보지는 못했는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을 하더니 손아귀에 있던 어둠의 검에 더 많은 힘을 부여했다.
은은하게 빛나던 어둠의 검은 바르자크의 마나에 의해서 칠흑과도 같은 어둠의 검으로 변하였다. 마치 이 흰 공간을 지워낸 것과도 같은 어둠이었다.
암검(暗劍)을 발동한 바르자크는 아주 가벼운 손놀림으로 강민에게 검격을 펼쳤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기세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파앙-!
번개처럼 날아간 바르자크의 암검은 어느새 꺼내어 든 강민의 암검에 막혔다.
“다크 소드까지……. 역시 보통 놈이 아니군.”
“이게 끝인가? 소멸되기 싫으면 밑천을 더 꺼내 놓아야 할 텐데?”
“소멸? 오만하구나. 주신인 나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냐? 빛의 신이라 지칭하던 아르포스 역시 날 봉인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지금 다크 소드를 믿고 있는 것인가 본데, 다크 소드에도 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마!”
분노를 감추지 않고 바르자크는 더 많은 마나를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몸 전체가 어둠에 동화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흰 공간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르자크의 몸은 사라지고 그의 몸이 있던 자리에는 직경 삼 미터 정도의 암흑 구체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구체는 등장하자마자 강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구체는 빨랐지만 지금까지의 공격보다 월등히 빠른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구체가 움직이는 모든 공간이 그 구체에게 흡수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듯이 구체가 움직인 공간은 모두 검은빛으로 변해 버렸다.
기이한 흡력에 피할 수도 없는 구체를 바라보며 강민은 아무런 기운도 나타나 있지 않은 오른손을 조용히 뻗으며 구체를 잡아갔다.
콰득!!
에너지체와 같은 구체였지만 강민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손으로 구체를 잡아버렸다.
실제로 강민의 손이 닿은 부분은 실체화되어 마치 검은 천을 잡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구체는 강민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서 꿈틀거렸지만, 마치 땅꾼에게 잡힌 뱀처럼 강민의 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구체를 보며 강민은 나지막이 말했다.
“암흑신(暗黑身)인가? 주신이라면 이게 끝은 아닐 텐데?”
파르륵!
강민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구체는 잠시 떨리더니 어둠이 풀리며 다시 바르자크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만 검은 로브의 아래쪽이 찢어져 있는 것이 조금 전 강민에게 잡힌 부위를 포기한 대가인 것 같았다.
강민은 오른손에 있던 검은 천을 바닥으로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주신다운 모습을 보여봐. 이것으로 끝인 거야?”
“크윽, 좋다. 나중에 아르포스와 싸우기 위해서 모아둔 힘이지만 지금 널 이기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 같군. 하아압!!!”
바르자크는 기합과 동시에 손에 반투명한 단창(短槍)을 만들었다. 볼품없는 단창의 모양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그 어떤 힘보다 강대하고 파괴적인 힘이 숨어 있었다.
이 단창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을 소모하는지, 살짝 떨리는 팔에 마나를 부여하여 팔을 바로 잡은 바르자크는 강민을 향해 단창을 던지면서 말했다.
“이것마저도 받아낼 수 있다면 네 승리겠지! 보이드 스피어!
예사롭지 않은 기세의 단창은 강민을 향해 나아갔다. 광검처럼 강렬하게 빛나지도 않았고, 암검처럼 공간을 지워내지도 않았지만, 이 단창에 든 흉포한 기세는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요요히 날면서 강민을 향해 다가갔다.
피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강민을 보며 바르자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확신하였다.
하지만 강민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창이 바르자크의 손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강민의 손에 있던 바스타드 소드에서 암검의 기운이 지워지더니 반투명한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단창이 강민의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강민은 번개처럼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러 단창을 베어냈다.
콰아아아앙!!
바스타드 소드와 단창의 충돌은 공간을 뒤흔들고 마나 축마저 약간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를 뿜어냈다.
유리엘을 공격하고 있던 일곱 명의 신도 그 충격에 공격을 멈추고 충격파가 발생한 곳을 바라보았다.
“뭐, 뭐지?”
“바르자크 님이 보이드 스피어까지 사용하셨어!”
“그런데 저자가 버틴 것이야?”
그런 말이 나오고 있을 때 유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리아스 케이토른!”
유리엘의 시동어에 그녀를 중심으로 십여 미터 정도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이 마법진의 범위에는 지금껏 그녀를 공격하던 일곱 명의 신이 서 있던 곳이 다 포함되었다.
뜻밖의 마법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는지 일곱 신은 서둘러 마법진 밖으로 벗어나려 하였지만 이미 발동된 마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고정되어 버린 그들은 권능까지 동원하여 온 힘을 다해 마법진에서 벗어나려 하였지만, 점점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고 결국에는 모두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루스틴! 렉스! 레이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바르자크는 눈앞에 강민이 있다는 것도 순간 잊었는지 아끼던 세 상급신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이미 정신을 잃은 그들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그 대답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나타난 강민에게서 나왔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 그럼 내 차례군.”
바르자크의 눈앞에 나타난 강민의 바스타드 소드에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바르자크는 뭔가 섬뜩한 기운에 뒤로 물러나서 바스타드 소드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강민의 검은 그가 갈 공간을 선점하고 있었다. 옆으로 물러서도, 뒤로 물어서도 이미 바스타드 소드는 바르자크가 갈 수 있는 모든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바르자크는 눈치채고 있지 못했지만,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흘린 황금빛 기운이 그를 감싸는 그물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황금빛 그물이 자신을 포박했다고 느낀 것은 강민의 기합이 들린 다음이었다.
“하압!!”
강민의 기합과 동시에 황금빛 기운은 바르자크를 누에고치처럼 둘러쌌다. 황금빛 덩어리가 된 바르자크는 몇 차례 격렬히 꿈틀거렸으나 정신을 잃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움직임은 멈추고 말았다.
둘을 제외한 모두가 전투 불능이 되자, 강민과 유리엘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생각이 통했군.”
“아무래도 창세력이 아깝잖아요. 그리고 복수심 때문에 신성을 그대로 두긴 힘들겠지만, 그냥 소멸시켜 버리긴 불쌍한 녀석들이구요. 보아하니 이들도 아르포스라는 녀석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던데 말이에요.”
“그렇지. 어쨌든 이제 창세력을 회수하고 신성을 지웠으니 그만 보내주자. 넘어온 신성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바르자크의 신성 파장을 확인했으니, 지구로 넘어온 하급신들의 신성을 찾아 지우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지금 강민과 유리엘은 이들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신성과 창세력만을 회수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를 윤회의 고리에 다시 연결하여 영원한 소멸이 아닌 또 다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물론 능력도 기억도 지운 상태라 다시 전과 같은 힘을 획득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소멸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사실 둘에게는 소멸시키는 것이 훨씬 편한 선택이었음에도 이들이 태생부터 악신이라기보다는 복수심이라는 잘못된 감정에 사로잡혀 다소 어긋나 있었던 것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그래요. 그럼 문을 열죠.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새로운 기회를 주죠.”
유리엘의 손짓에 흰 공간 일부가 열리더니 푸른 하늘이 나타났다. 그리고 황금빛이 걷힌 바르자크와 일곱 명의 상급신, 이제는 인간이 된 그들이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갈수록 그들의 몸은 천천히 젊어지더니 어느새 모두 아기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다양한 머리색을 가진 그 아기들은 쌔근쌔근 잠든 채로 강서영이 세운 드림시티의 보육원 앞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렇게 미케아 차원을 아우르던 신들은 강민과 유리엘의 손에 의해 평범한 인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