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201화 (201/203)

# 201

현세귀환록

201. 신성(3)

둠스데이가 일어난 지도 벌써 1년, 강민과 유리엘이 마나 축에서 돌아온 지도 3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세계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며 이 혼란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아갔는데, 강민과 유리엘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연락 없었지?”

“네, 오늘은 그 덜떨어진 신들은 없었어요. 벌써 삼십 개체째네요. 쓸데없이 하급신들을 왜 그리 많이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강민과 유리엘은 미케아 차원에서 넘어온 신성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신성이 깨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능력자로서는 죽여도 사라지지 않고, 죽일 때마다 강해지는 그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결국 둘은 벤자민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성을 머금고 있는 마물들은 그들이 나서서 처리해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마 하크마가 말했던 창세전쟁 때문이었겠지. 당시 손발로써 싸워줄 하급신이 필요했을 테니 다소 무리해서라도 저런 신들을 찍어낸 것이겠지. 아마 상당수의 마물도 비슷한 이유로 만들어졌을걸? 키메라처럼 하나의 종족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마물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지.”

강민의 말에 유리엘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렇겠죠. 어쨌든 마나 축만 보호하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덜떨어진 녀석들이 많을지는 몰랐네요. 차라리 바르자크라는 녀석이 신계를 형성해 그 덜떨어진 녀석들의 신성을 일깨워 모아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니까요.”

“마나 축을 장악하지 않으면 신계를 만들기 힘들겠지. 마나 축 없이 신계를 만들려면 상당한 창세력을 써야 할 테니 말이야. 어쨌든 지금 잡는 녀석 중에서 간혹 창세력을 가진 녀석들도 있으니 뭐 완전히 헛수고는 아니잖아?”

“호호. 그렇죠. 어차피 창세를 하려면 창세력을 모아야 하는데 창세력이 있는 녀석들을 이렇게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기회네요. 그렇지만……. 음?”

그때 무언가를 느꼈는지 유리엘은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멈추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내 눈을 뜬 유리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강민에게 말했다.

“드디어 왔네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요? 이 정도 수준의 차원 은신 결계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보니, 생각보다 변변찮은 녀석들인가 봐요.”

유리엘이 왔다는 것은 그녀가 펼친 결계에 누군가가 접근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미케아 차원의 신들일 가능성이 컸다.

“탐색은 하위 신들을 시켰겠지. 주신인 바르자크가 직접 나선 것을 아닐 거야. 그러니 속단하기는 이르지.”

“호호. 그렇긴 하지만 수하를 보면 그 주인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단 들어가 보죠. 지금 막 마나 축에 펼친 결계를 두드리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 가 보자.”

말을 마친 강민은 전처럼 오른손에 흰 기운을 두르고 공간을 갈라냈다. 그리고 유리엘과 함께 자연스럽게 갈라진 공간으로 녹아 들어갔다.

* * *

쾅, 콰앙, 콰아앙!

“이게 뭐지? 마나 축에 결계라니……. 디노, 이 차원엔 신이 없다 하지 않았어?”

결계를 두드리던 30대 초반 정도의 푸른 머리 청년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노랑머리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디노라 불린 여성은 마나 축에 가까이 다가가 그곳에 손을 올렸는데, 손이 닿기 직전에 마나 축에서 기이한 문양이 떠오르며 그녀가 마나 축에 접촉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바로 유리엘이 펼쳐놓은 결계였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타쓰, 문제는 단지 결계가 펼쳐졌다는 것이 아니야.”

디노는 타쓰에게 이야기하였지만, 그녀의 말을 받은 것은 근육질의 40대 중년인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것이지?”

“문제는 이 결계의 수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야, 테슬. 원리를 파악해서 해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고, 우리의 힘을 쏟아붓는다 해도 부수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 같아.”

디노의 말에 지금껏 이야기하지 않고 있던 검은 머리의 40대 미부(美婦)가 입을 열었다.

“자세히 봐, 디노. 저 결계에는 자가 복구 기능까지 달려 있어서 아무리 우리가 힘을 써도 부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바르자크 님이 직접 오셔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레딧, 그래도 루스틴 님과 우리가 함께한다면 파괴할 수 있지 않을까?”

“글쎄…… 지금 우리 네 명이 전력을 다했는데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는데, 루스틴 님이 오신다고 해서 부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레딧의 부정적인 말에도 디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루스틴의 이름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루스틴 님이라면…….”

그때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한번 해보지.”

“루스틴 님!”

바로 디노가 기다리던 루스틴이었다. 검은 코트를 길게 늘어트린 루스틴은 회색 로브를 건친 노인의 모습인 렉스와 붉은 드레스의 레이나와 함께 마나 축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왔다.

흰 공간에 들어온 루스틴은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나 축에 다가가 그 표면에 손을 올린 후 가만히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루스틴의 마나에 반응하는 듯 마나 축의 결계는 그 손을 중심으로 룬어와 형이상학적인 문양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반투명한 흰빛을 내뿜고 있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그 손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결계는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저기 봐. 역시 루스틴 님이라니까. 우리 네 명이 한 번에 두들겨도 색 하나 변하지 않던 결계가 붉게 변하고 있잖아.”

디노는 자신의 힘으로 결계를 공격하는 것인 양 루스틴의 선전에 으쓱하며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루스틴의 손과 결계의 경계면은 붉은빛만 보일 뿐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이대로는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루스틴은 이제 한 손이 아니라 양손을 결계에 대고 내부의 마나를 맹렬히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월등히 높은 힘과 압력에 지금껏 붉은색이었던 결계는 주황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까 전 붉은빛 때와 마찬가지로 결계는 주황빛 경계면을 유지할 뿐이었다. 바뀐 것이라고는 경계면의 색뿐이었다.

‘크윽…… 신도 아닌 단지 초월자가 펼친 결계가 이렇게 강력할 줄이야……. 상급신을 이끄는 내가 초월자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은 루스틴은 지금까지의 힘에 더해 이번에는 자신의 신성에 깃든 권능까지 깨워서 결계를 파훼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결계 역시 그에 반응하는지 이번에는 노란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이쯤 되자 주변의 신들도 이 결계가 변해가는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중 회색 로브의 노인 렉스가 아직도 결계와 싸우고 있는 루스틴의 옆에 서며 그에게 말했다.

“레인보우 배리어와 같은 방식인 것 같군. 그렇다는 말은 아직 네 단계가 더 남아 있다는 말인데, 나도 합류하겠네.”

루스틴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의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뜻을 보여주었다. 루스틴의 끄덕임을 본 렉스는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만 하고 있는 신들에게 외쳤다.

“다 같이 파훼를 시도해. 마나 파장은 루스틴에게 맞추고, 권능 또한 동원해서 전력을 다하도록!”

렉스의 말에 주변의 신들은 서둘러 루스틴과 나란히 서며 결계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일곱 상급신의 공격이라 결계는 순식간에 초록색을 거쳐 파란색까지 색이 변해 버렸다. 레인보우 배리어와 같은 방식이면, 이제 남은 것은 남색과 보라색뿐이었다.

“조금 더 힘을 내! 바르자크 님이 오시기 전까지 결계는 파훼해야 하지 않겠나!”

“으윽!!”

“하압!”

“이얏!!!

다양한 기합성과 함께 일곱 명의 신은 자신의 남은 힘마저 끌어내며 결계를 파훼시키기 시작하였다.

더욱 강한 마나가 쏟아지며 결계는 드디어 남색의 빛깔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보라색 하나였다.

다들 창세전쟁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힘을 쓴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결계를 뚫어내기 위해서 전 마나와 권능을 동원해 필사의 힘을 다하였다.

아무도 잠시 쉬었다가 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것은 공격을 멈추는 순간 결계는 빠르게 수복될 것이고, 만일 공격한다면 다시 처음부터 뚫어야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색의 결계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고, 모두 절망적인 기색이 가득하였다.

그때 흰색 공간에 어울리지 않은 검은 기운이 나타났다. 연락을 받은 바르자크가 등장한 것이었다.

검은 기운을 두른 바르자크는 등장하자마자 자신이 두르고 있는 검은 기운으로 결계를 후려쳤다.

콰아앙!!

바르자크가 결계를 가격하자마자 지금껏 남색을 유지하고 있던 결계는 바로 보라색으로 변해 버렸다.

“바르자크 님!”

바르자크는 상급신들의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자신의 공격을 버텨내는 결계가 불만인지, 더 강한 마나를 두르고 한 번 더 결계를 가격했다.

쿠아앙!!

결계는 바르자크의 두 번째 공격까지는 버티지 못했는지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내며 바스러져 흩어졌다.

결계가 흩어지는 느낌에 바르자크는 몸에 두른 어둠을 걷어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는데, 육안으로 보이는 그는 40대 정도의 청수한 느낌을 주는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하하. 드디어 마나 축을 만나는구나. 저쪽 차원에서 보고 이게 얼마 만인지…….”

잠시 감격 어린 목소리를 내던 바르자크는 손을 뻗어 마나 축을 만지려 하였다. 하지만 바르자크는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레인보우 배리어가 사라진 그곳에 투명한 막(膜)이 나타나 마나 축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작은 신음성을 낸 바르자크는 이 막에 마나를 주입하여 분석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 이 막은 또 다른 결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나의 흐름상 아마 조금 전에 파훼한 결계가 이 결계의 발동 조건인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루스틴 역시 새로운 결계의 발동을 느꼈는지 조용히 바르자크에게 말을 건넸다.

“바르자크 님, 이것은…….”

“그래, 새로운 결계군. 보통 놈이 아닌 것 같군. 내가 한 번에 파훼할 수 없는 결계라니…… 아르포스의 결계와도 맞먹는 수준이겠는데?”

보통의 결계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래 봤자 초월자가 펼친 것이었다. 그런데 바르자크가 아르포스를 언급하자 루스틴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바르자크에게 반문하였다.

“아르포스…… 말입니까? 이 결계가 그 정도인 것입니까?”

“조금 전에 파훼한 결계 정도야, 너 역시 마나만 자유로이 다룰 수 있다면 시간이 걸릴 뿐 파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닌데, 이 결계는 그 수준을 넘어서는군.”

“그렇다면…….”

“뭐, 그래도 내가 시간을 들인다면 파훼 못 할 수준은 아니군. 대신 시간이 좀 걸리겠어.”

시간만 들인다면 해결할 수 있다는 바르자크의 말에 루스틴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를 보며 바르자크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 정도 결계를 펼칠 수 있는 자라면 보통 녀석이 아니다. 신성이 깨어나지 못한 하급신을 잡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능력을 지닌 초월자라 생각했는데, 이 결계를 보니 너희들도 감히 대적하기 힘들겠군.”

보통 때라면 자존심이 강한 루스틴의 성격상 초월자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도 파훼가 불가능한 결계와 마주한 지금은 바르자크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바르자크조차 한 번에 파훼하지 못하는 결계를 펼치는 자라면 자신의 윗줄인 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며 루스틴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가 결계를 파훼하고 마나 축을 장악하는 동안 너희들은 이 공간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틀어막고 있거라. 혹시 이 결계를 펼친 자가 들어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네, 바르자크 님.”

그때 공간의 한쪽이 갈라지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들어와 있는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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