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98화 (198/203)

# 198

현세귀환록

198. 만남(2)

“그런 것이었군.”

하크마 족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역시 왜 미토스 산맥 너머에만 웜홀이 생기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로 충분히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유리엘 역시 강민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강민을 보며 심어를 보냈다.

[결계로군요. 그런데 대륙 전체의 웜홀을 통제할 정도의 결계라면 10서클, 아니, 11서클도 넘겠네요.]

[그 정도 결계라면 보통의 초월자라기보다는 그 차원의 신(神) 중의 한 명일 가능성이 크겠지.]

[그렇겠지요. 그런데 신이라면 조금 애매한데요? 아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뚫린다니…….]

유리엘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류의 결계를 펼친 상황에서 중간중간 결계가 뚫린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10년 정도마다 한 번씩이라면 결계의 유지 보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호호호. 민, 제가 펼친 결계를 유지 보수 하는 것 봤어요?]

유리엘의 말에 강민이 생각해 보니 수만 년간 함께하였지만 그녀가 결계에 다른 용도를 추가하기 위해서 손보는 것은 있었어도, 같은 용도의 결계를 유지 보수 한 적은 없었다.

이번 웜홀 차단 결계를 손보는 것도 차원 통합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결계의 차단 좌푯값을 재설정하는 문제였지 정기적인 유지 보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음…… 그런 적은 없었지.]

[그렇죠. 필멸자라면 몰라도, 불멸을 획득한 신급 존재라면 그렇게 허술하게 결계를 펼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만 결계의 규모를 들어보니 필멸자들이 펼칠 결계의 규모가 아니구요. 그러니까…….]

유리엘의 말에 강민은 뭔가 떠올랐는지 그녀의 말을 끊고 대신 말을 이었다.

[대적자가 있다는 것이군.]

[그렇죠. 하크마가 말한 미토스 산맥을 기준으로 인간들의 편에 선 신이나 신들이 그걸 반대하는 신들을 결계 밖으로 몰아낸 것 같네요. 결계 밖에 있는 신들은 10년마다 한 번씩 그것을 뚫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구요. 디스트로 차원에서 그런 것처럼요. 그 주기가 10년 정도라면 밀려난 신들도 완전히 힘을 잃은 것 같지는 않네요.]

이런 현상을 처음 보는 것이라면 몰라도, 비슷한 상황을 수차례 목격하고 개입한 적이 있었던 강민과 유리엘은 몇 가지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미케아 차원의 상황을 추론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인가. 신들이 그렇게 활동한다는 말은 미케아 차원은 아직 마나장이 성숙한 곳이 아니라는 말이겠군.]

[그렇지요. 마나장이 성숙했다면 물질계와 영계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여 신들이 직접적으로 물질계에서 활동하기 힘들었을 테니 말이에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눈 강민은 추가적인 정보를 더 얻기 위해 하크마에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미케아 대륙의 신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강민의 지시에 하크마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에게 반문하였다.

“미케아 대륙에는 수많은 신이 있는데, 그 모두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하급신은 필요 없고, 주신이라 불리는 주요 신과 그에 대항하는 악신이 있으면 설명해봐. 음, 차라리 창세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군.”

“아. 창세신화 말씀이시군요. 저희 미케아 대륙의 창세는 빛의 신 아르포스와 어둠의 신 바르자크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하크마는 한참 동안 미케아 대륙의 창세신화에 대해서 설명했다. 신화라서 그런지 비유적인 부분도 많고 과장된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구전되는 신화는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몇천 년, 몇만 년 뒤의 인간이 듣기에는 허황돼 보이는 일들도 신화시대에는 당연하게 벌어지는 일들이 많았기에, 신화를 듣는 것만으로 당시 신들의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마나장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말은 신화시대에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니 다른 차원에 비해서 신화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하크마가 말하는 신화를 통해 그들의 상황을 대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하크마의 말을 간단하게 줄여보면, 혼돈으로 가득 차 있던 미케아 대륙에는 빛과 어둠이 발현했고 오랜 시간 끝에 그 둘은 의지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빛의 의지는 빛의 신 아르포스가 되고, 어둠의 의지는 어둠의 신 바르자크가 되었다.

이후 아르포스와 바르자크는 함께, 또 따로 여러 상급신, 중급신, 하급신들을 만들어냈고, 그 신들은 또 자신들의 피조물을 만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포스와 바르자크가 의견 차이로 대립했고, 그들을 따르던 신들 역시 둘을 따라 갈라져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신들이 만들어낸 피조물들 역시 그들을 따라서 대립했다.

그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어느 순간 서로를 해치게 되었고, 훗날 신들의 전쟁이라 알려진 창세 전쟁이 발발했다.

그 수백 년 동안의 창세 전쟁으로 대륙은 피폐해지고 엄청난 수의 피조물이 죽고, 수많은 신도 신성을 잃고 마나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결국은 아르포스가 이끄는 빛의 진영이 이겼고, 바르자크가 이끌던 어둠의 진영은 미토스 산맥 너머 마경이라 불리우는 곳에 봉인되었다는 것이 신화의 골자였다.

[평범하네요.]

[그래,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신화군. 문제는 지금 상황과 신화를 들어보니 바르자크라 불린 어둠의 신이 완전히 봉인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지.]

[그러게요. 주기적으로 봉인을 약화시킬 정도로 힘이 남아 있다면 어쩌면 봉인이 풀릴 가능성마저 있겠네요.]

[만일 그 바르자크라는 녀석이 물질계에 아직 실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잘못하면 이곳으로 넘어올 가능성도 있겠군.]

보통 마나장이 강화되어 영계와 물질계 사이의 경계가 명확해지면 신은 물질계로 현신(現身)하여 개입하기보다는 계시(啓示)나 화신(化神)을 통해서 간접 개입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직 마나장이 성숙하지 않아 보이는 미케아 차원에서는 아직 신이 물질계에 그 신체(神體)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신화에서 언급되는 봉인이 사실이라면, 신체를 가지고 있을 확률은 더 높았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강민의 말처럼 잘못하면 웜홀을 통해서 신체와 함께 넘어올 확률도 있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신화로 남은 것을 보니 최소 만 년은 넘은 일일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알 수 없지. 특히 이번 마나장 통합과 웜홀의 폭주 같은 사건은 차원 전체를 흔드는 일이고, 아무리 주신급이 펼친 봉인이라도 이 정도 사안에는 충분히 깨질 여지가 있지.]

[음……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대비를 해두어야 할까요?]

[본격적인 대비까지는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니 만일의 사태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신(神), 그것도 주신(主神)급의 신이라면 아무리 강민이라 해도 쉽게 볼 수는 없는 상대였다.

주신도 차원마다 힘의 크기와 권능의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미케아 차원의 주신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로 잡는다 하더라도 한 차원의 주신이라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까지 강민이 소멸시킨 주신만 하더라도 수십 개체가 넘고, 하급신은 수백 개체가 넘기 때문에 주신급인 바르자크와 싸운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구였다. 지구를 파멸시킬 것이 아니라면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신들의 싸움은 물리적으로도 대륙을 파괴하는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마나의 차원에서도 자칫 잘못하면 마나 축이나 마나장에 큰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여파를 줄 수도 있었다.

즉, 신들의 싸움은 자칫 잘못하면 세상의 파멸을 일으킬 정도로 거센 후폭풍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특히, 현재 마나장 통합에 따르는 엄청난 마나 흐름을 감당하며 약해져 있는 지구의 마나 축이라면, 그 후폭풍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 버릴 가능성마저도 있었다.

[하긴, 기껏 다 지켜놓고 그 녀석과의 싸움에 지구의 마나 축이 부러진다면 그것만큼 낭패인 경우도 없겠죠.]

[그렇지. 그런 면에서 일단 다각도에서 방비할 필요가 있을 거야.]

유리엘과의 심어를 통해서 생각을 정리한 강민은 아직도 바닥에 엎드리고 있는 하크마 족장에서 말했다.

“수고했어. 대략 어떤 상황인지 잘 알겠군. 어쨌든 내가 원하는 정보를 들었으니,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것을 하나 정도는 들어주고 싶군.”

하크마 족장에게서 얻은 정보가 미케아 차원의 상황을 아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기에 강민은 그의 지구 이주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금전 등의 물질적인 도움은 당연히 가능할 것이고, 인간들과의 관계 같은 정치적인 도움 역시 어차피 벤자민이 있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들어준 다음 하면 될 것이고, 무슨 도움이 필요하지?”

“몬스터 한 마리만 처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몬스터? 마물 말인가?”

강민은 정착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였는데, 뜻밖에 마물을 처리해달라는 하크마 족장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문하였다.

“네, 그렇습니다.”

“음…… 지금 인근에 마물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이 없는데, 어떤 마물을 말하는 것이지?”

강민의 감지범위는 평소에도 수 킬로, 별다른 기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정신만 집중해도 십수 킬로미터 정도는 족히 감지할 수 있었는데, 지금 그의 감지 범위 안에 마물은 없었다.

“지금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벽이 되면 수백 구의 시체들과 함께 나타나는 몬스터입니다. 미케아 대륙에서는 칼리 칸이라 불리는 몬스터로…….”

한참 그의 설명을 듣던 유리엘은 강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데스나이트네요?”

“그러게. 언데드도 있긴 있군.”

지금 하크마 족장이 말하는 마물은 보통 죽음의 기사라 불리는 데스나이트와 비슷하였다. 증오에 찬 마스터급 이상의 기사의 영혼이 타락하여 언데드가 된 데스나이트는 주변 시체들을 자신의 부하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크마 족장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웬만한 마물들은 자체적으로 방어하면서 정착해나가고 있었는데, 이 칼리 칸과 시체들에게 벌써 십수 명의 수하가 죽은 상태였다.

벤자민이 파악했던 저번의 정착지에서 이 위치로 옮긴 것도 다 이 칼리 칸 때문이었다. 또한 마을 주위에 있던 방벽도 칼리 칸이 이끄는 시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강민은 왜 경비병들이 그리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어쨌든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이상, 강민은 그 부탁이 새벽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지라도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크마 족장이 전해준 정보는 충분히 그 정도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애초의 목적을 다한 벤자민은 유니온으로 돌려보낸 뒤 강민과 유리엘은 하크마 족장에게서 미케아 차원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추가적인 정보를 획득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이미 해가 지고 달이 높이 떴을 무렵, 강민의 기감에 한 마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은 십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마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크마 족장의 마을에 도착할 것 같았다.

“왔군.”

“네?”

“네가 기다리던 마물이 왔다는 말이다. 칼리 칸이라 했던가?”

하크마는 당연히 십 킬로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마물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신의 힘을 가진 강민이 거짓을 말할 리 없기에 주위 경비병에게 전투준비 신호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강민은 하크마의 신호를 막았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크마에게 강민이 말했다.

“내게 부탁하지 않았나? 그냥 보기나 해.”

“아……. 네, 강민 님.”

그렇게 강민과 유리엘, 하크마는 소수의 견인족과 함께 마을의 경계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