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현세귀환록
196. 전개(4)
어차피 금융자산, 부동산 자산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이다 보니 카운트다운 시계가 뜨기 이전부터 강민은 그룹의 가용 가능한 재산을 모두 동원하여 식량, 석유, 광물 등의 실물자원으로 전환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최근 마정석이나 마물의 사체가 가장 각광받는 원자재이긴 하였지만, 전통의 원자재들도 그 쓰임이 많았다. 어차피 웜홀의 폭주 때문에 마정석과 마물의 사체가 넘쳐날 상황이기에 그것보다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원자재에 집중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화폐의 가치가 급락할 것이 뻔했기에 강민이 가지고 있던 수십조에 달하던 현금 자산들도 모두 그 작업에 동원하도록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렇기에 KM그룹에서 매집한 물량은 일개 기업에서 확보할 정도의 수준이 아닐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어쨌든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 우리가 원자재를 매입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매각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흠…… 일단 목표치보다 많이 확보하였으니 일부 여유가 있는 부분은 매각해도 좋습니다. 다만 매각은 현금성 자산이 아닌 한국 내 토지나 다른 원자재로 받도록 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화폐의 가치는 계속 떨어질 것이 자명하였기에 현물로서 대금을 받도록 한 것이었다. 특히, 지금의 상황에서 땅은 가치가 없는 재화였지만, 예외적으로 한국의 토지라면 다른 어떤 재화보다도 가치가 있는 재화였다.
당연히 장태성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였기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럼, 나가보도록 하세요.”
“네, 회장님. 자세한 보고는 나중에 별도로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장태성을 보낸 강민은 원래 부르기로 생각했던 벤자민에게 연락하였다. 벤자민은 강민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몇 번 신호가 울리지도 않았는데 금방 전화를 받았으며 말했다.
-강 회장님, 돌아오셨습니까?
벤자민을 비롯한 측근들에게는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자리를 비운다는 것 정도는 언급해 뒀기에 그는 강민의 전화에 돌아왔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래, 지금 KM그룹 본사 회장실에 있으니 이리로 와서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완전한 수하를 자처하는 벤자민과 단순 고용인인 장태성을 대하는 강민의 태도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벤자민도 그런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벤자민은 회장실에 있는 접대용 소파 뒤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KM그룹의 본사에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지만, 유리엘이 편의상 벤자민에게 지금 그가 선 곳의 보안 좌표를 알려줬기에 그의 공간 이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강 회장님.”
모습을 드러낸 벤자민은 강민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상황은 어떻지?”
“심각합니다. 호주나 남미, 아프리카는 완전히 마물의 손에 떨어졌고, 중동이나 동아시아도 소수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괴멸된 상태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유럽과 미국 정도는 그래도 꽤 버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벤자민의 이야기는 이미 제니아의 보고를 통해서 잘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강민이 그에게 원하는 정보는 사실적인 정보보다는 분석적인 정보였다.
“그런 부분은 이미 알고 있어. 네게 묻고 싶은 것은 지금 인간들의 상황이야.”
“아. 사실 지금 인류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사건이 벌어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강 회장님과 유리 님의 조치로 인해서 최소한의 생존 여력을 가질 수 있어 앞으로는 상황이 나아질 듯합니다.”
벤자민은 강민과 유리엘의 업적, 정확하게는 유리엘의 업적을 칭송하며 말을 이었는데, 강민을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공치사는 그만 되었고, 정확한 상황이 어떻게 돼?”
“처음 3개월은 인류는 세상에 종말이 온 것처럼 행동하였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찾아가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벌써? 생각보다 상황이 좋은가 보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마물들이 이동보다는 정주(定住)를 택하는 경우가 많아서였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모든 마물을 상대할 필요가 없이, 도시 부근에서 열리는 웜홀의 마물들만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을 이끌어냈습니다.”
처음에 우려했던 것은 몬스터가 계속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학살하는 상황이었다. 둠스데이 이전 웜홀을 통해서 나타난 마물들은 한자리에 있기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려 했기에 당연히 할 수 있는 우려였다.
사실 벤자민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껏 마물들이 한자리에 있지 않으려 한 것은 마나 충돌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한자리에 머물 생각조차 못 한 것이었는데, 이제 마나 충돌이 없어진 상황에서 마물들도 이 지구에 충분히 자리 잡을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정주라…… 이동하는 마물들은 없던가?”
“물론 몇몇 종의 마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동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 도시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전체 마물 수에 비하면 소수였기 때문에 충분히 방어할 만하였습니다.”
벤자민의 말에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렇군. 그래서 마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군.”
제니아가 보여준 지도에서 인간이 살아남은 지역과 마물이 나타난 지역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인간과 마물들이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였던 것이었다.
“공존…… 까지는 아니지만, 일단은 적극적으로 이동하는 마물을 제외하고는 도시에서 먼 마물들은 놓아두고 있습니다. 아니, 몇몇 지역에서는 오히려 이제 폭발적인 웜홀이 나타나지 않으니, 살아남은 인간들과 능력자들이 연합하여 도시 인근의 마물들을 처리하여 땅을 확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긴 그래야겠지. 아무래도 식량이나 공장 등을 지을 공간이 필요하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마물이 나타나지 않는 바다를 통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륙의 도시들은 그런 부분에 제한이 있고 결국은 경작을 할 토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8개월이 지난 지금은 폭주라 할 수 있는 웜홀의 출현은 끝이 났다 할 수 있었다. 물론 둠스데이 이전보다는 월등히 많은 수의 웜홀이 나타나고는 있었지만, 폭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대부분의 강한 마물들은 남반구에 몰렸고, 북반구에 있는 강한 마물들은 유니온과 이능력자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퇴치하고 있었다.
즉, 결계 밖이 위험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안정성이 확보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말은 더 이상 결계 도시에만 머무르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결계 도시 역시 8개월간 도시가 수용 가능한 인구수의 몇십 배를 수용하느라 한계치에 다다른 상태였기에, 사람들을 외부로 보낼 수 있는 도시 외부 토지의 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럼 각 국가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지?”
“사실 지금 국가라 말할 수 있는 곳은 이곳 한국 전역과 미국 동부, 중국 동부 해안 쪽과 유럽의 일부 정도입니다. 아. 유럽 지역은 두 달 전 올림포스와 템플나이츠의 주도하에 삼 일 전 긴급 총회를 통해서 EU로 완전히 통일된 국가연합을 구성하기로 결의한 상태입니다.”
“호오. 그럼 유럽 또한 미국처럼 단일국가가 되는 건가?”
“네, 단일국가라기보다는 국가연합에 가깝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상태입니다. 연합을 통해서 유럽 내의 능력자들을 체계적으로 움직여 유럽 전역의 마물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국경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계 도시를 벗어나면 어디서나 몬스터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여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인 치안도 제공하지 못했기에 국가라는 의미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은 결계 도시 하나하나가 도시국가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벤자민이 말한 곳 정도만이 국가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과 치안력을 제공한다 할 수 있었다.
“전역에서 몰아낸다라……. 남은 마물들도 상당할 것이고, 지금도 마물이 계속 생기고 있는데 가능할까?”
“물론 전역은 희망 사항일 것이고,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경작지의 확보가 1차 목표이겠지요. 그래도 몇 가지 희망적인 사항이 있습니다.”
“희망적인 사항?”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타 차원의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력 또한 상당하기에 마물의 처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화가 통하는 존재라는 말에 강민이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화가 통하는 존재?”
“네, 인간과 흡사한 모습의 존재들인데, 통역 마법을 통해 의사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종족들은 텔레파시가 가능하여 통역 마법도 필요 없는 종족도 있었습니다.”
“한 종족이 아니라는 것이군. 그런데 왜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지?”
지금껏 웜홀에서는 괴물이라 할 수 있는 마물만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성을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 전 제니아의 영상을 통해서 본 드래곤이 전부였다.
하지만 드래곤은 원래부터 많은 차원에서 발견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지금 강민이 말하는 이성체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웜홀의 출현에도 단 한 번도 이성을 가진 종족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강민은 지금 통합될 차원에는 문명을 이룬 종족이 없는 마물만이 가득한 세계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차원들도 많이 보았기에 어쩌면 그런 추측이 당연했다.
그러나 인간과 흡사한 형태의 문명화 된 종족이,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다수가 있다는 얘기에 왜 지금껏 그런 존재들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다소 의아했다.
“그건 저도 잘……. 아,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유니온 유럽 지부에서 스스로를 도그마 일족이라 부르는 종족과 접촉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 그들은 그리스 지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 어떤 종족들인지 궁금하군. 좌표를 불러봐.”
“네, 좌표는 654, 159, 357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도그마 종족은 인간과 흡사하나 꼬리가 존재하고, 마나를 사용하면 마치 개와 비슷한 얼굴이 된다는 점입니다.”
벤자민의 말에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견인족(犬人族)의 일종인가 보군요. 견인족이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수인족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네, 아직 유니온이 접촉하진 못했지만, 다른 결계 도시에서 접촉한 타 차원의 다른 종족들도 마나를 사용하면 지구의 들짐승과 비슷하게 변신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티그리안 일족은 호랑이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캐치아 일족은 고양이처럼 변하더군요.”
이번에는 강민이 벤자민의 말을 받아서 대답했다.
“호인족과 묘인족인가 보군. 수인족은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확실히 호인족이나 웅인족의 전사들은 상당한 무력을 지녔으니 마물을 처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줬겠네요. 저도 왜 이들이 이제야 나타났는지 궁금하네요.”
“그들을 만나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 다른 보고 사항이 없으면 돌아가 보도록.”
그렇게 벤자민을 보내려고 하는 강민에게 유리엘이 말을 건넸다.
“벤자민과 같이 가는 게 어때요? 어차피 유니온에서 견인족과 이미 접촉했다고 하니, 벤자민과 함께 가면 불필요한 드잡이질 없이 바로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흠,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어때 벤자민?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같이 가 보지그래?”
갑작스러운 강민의 제안이었지만 벤자민은 재빨리 대답했다.
“크게 중요한 사항은 없습니다.”
“좋아. 그럼 출발할까?”
출발이라는 말을 하며 강민은 유리엘을 보았고, 강민과 눈이 마주친 유리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손가락을 튕겼다.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