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현세귀환록
195. 전개(3)
그것은 백두일맥의 비전(?傳) 멸성신(滅星身)이었다. 멸성신은 별을 멸하는 신체라는 그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백무성에게 엄청난 힘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갑작스러운 큰 힘에는 당연히 대가가 따랐다. 그 대가는 시전자의 목숨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무성은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눈앞의 알카이브를 해치울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회복에 주력하던 알카이브는 갑자기 발현되는 거대한 힘에 깜짝 놀라 회복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전면에 방어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금 나오는 힘에 직격당한다면 아무리 고룡인 자신이라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정도로 강렬한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리즘 월! 크로메틱 실드! 타이케론 아머!]
방어 마법은 주력 계통의 마법이 아니라서 10서클의 방어 마법은 아니었지만, 9서클의 마법 중에서는 최고의 방어 마법이라 일컫는 마법들을 펼쳤다.
하지만 지금 백무성의 몸은 그 자신이 하나의 거대한 광검이 된 듯이 온몸에 광검을 발현시켜 알카이브의 전면에 펼쳐진 마법들을 갈라내고 천천히 그에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크윽…… 당분간 가수면기에 들어가더라도 어쩔 수 없겠군. 이놈은 위험해. 해치워야겠어’
알카이브 역시 백무성이 보여주는 힘의 위험함을 파악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펼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그의 드래곤 하트 속에 담긴 무한대의 마나가 일시적으로 비어버릴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그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왔다. 바로 드래곤 브레스였다.
쿠와와와아--!!
가공할 만한 기운을 담은 알카이브의 연녹색 브레스는 백무성을 직격했다. 백무성 역시 지금 그가 펼치고 있는 한 번의 공격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어 피할 여력도 없는지,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브레스를 뚫으려 했다.
“크으윽…….”
하지만 고룡은 고룡이었다. 기본적으로 고룡급의 드래곤이 사용하는 브레스는 계통과 무관하게 10서클 마법의 파괴력에 육박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백무성이 광검을 온몸에 둘렀다고 할지라도 초입의 광검지경으로는 브레스에서 그의 몸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었다.
결국 산성을 머금은 것처럼 보이는 알카이브의 브레스는 광검에 둘러싸인 백무성의 몸을 조금씩 녹여 나갔다.
그렇게 알카이브의 입에서 1미터 정도까지 다가간 백무성은 이미 두 다리와 왼팔이 녹아내려 버린 상태였다. 온전한 부위라고는 환도를 든 오른손과 머리, 몸통뿐이었다.
아니, 그것 또한 온전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상태였다. 피부는 거의 다 녹아버려서 근육과 뼈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백무성의 몸은 알카이브에게 닿지 못하고 1미터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끝이다.”
[그래, 끝이지. 네놈 때문에 내가 100년은 가수면기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무리했으니 영광으로 알거라.]
알카이브의 이죽거리는 말에 입술마저 녹아내려 발음조차 불분명한 백무성이 다시 말했다.
“네놈도 끝이라는 이야기다. 가거라!”
가라는 백무성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그의 온 힘을 담고 있던 백무성의 애도가 알카이브의 머리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환도에는 여전히 광검이 서려 있었는데, 백무성이 몸을 보호하던 마나를 다 거두고 환도에만 집중시킨 결과였다.
[뭐, 뭐냐…….]
몸을 보호하던 마나가 사라졌기에 백무성의 몸은 아직 남아 있는 브레스의 여력에 휩쓸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백무성의 마지막 힘이 담긴 그의 환도는 백무성이 의도한 바를 달성했다.
콰가각!!
알카이브의 당황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무성의 환도는 브레스를 뚫고 알카이브의 입천장에 틀어박혔다.
치명상이라 할 수 있는 일격이었지만, 드래곤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알카이브를 해치울 수 있는 일격은 아니었다.
[커헉! 의지가 대단하군. 그러나…… 어억!!]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콰아앙!!!
입천장에 틀어박힌 환도가 그대로 터져 버린 것이었다. 단순히 검강을 머금은 조각들이었다면 어쩌면 집중된 마나의 힘으로 버텨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공격은 광검이 담긴 일격이었다.
백무성의 혼신의 힘이 담긴 도편(刀片)들이 알카이브의 뇌를 비롯한 머리를 난자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뇌가 곤죽이 되어버려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절대적 강자라 할 수 있는 고룡급의 블랙드래곤 알카이브가 눈에 생기를 잃은 채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어지는 영상에서는 백무성의 수하들이 백무성이 남긴 흔적과 알카이브의 사체를 수습하는 장면들이 찍혀 있었으나, 그런 부분은 강민과 유리엘의 관심 밖의 문제였기에 유리엘은 제니아에게 손짓을 하여 영상을 종료할 것을 지시했다.
“저렇게 되었군.”
“알카이브라는 녀석이 멍청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저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인간에게는 다행이라 할 수 있겠네요.”
“뭐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백무성이 보인 행동은 확실히 영웅적인 모습이었지.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저 드래곤의 사체를 가져갔으니, 백두일맥에서는 광검지경의 고수가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 그 힘이 강화될 여지는 있겠군.”
드래곤의 사체는 어느 차원에서나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완벽한 무구를 만들 수 있는 드래곤 스케일과 드래곤 본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였고, 마나를 강화시킬 수 있는 드래곤 블러드와 드래곤 플레쉬까지, 드래곤의 사체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그중 백미는 당연히 용심(龍心), 드래곤 하트였다. 드래곤 하트로 마법기를 만든다면 최고 수준의 마법기가 가능할 것이고, 마나를 흡수한다면 그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자에 한해 순식간에 그랜드 마스터급의 마나를 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쓰임새를 가진 드래곤의 사체를 얻었다는 것은 비록 광검지경의 고수가 운명을 달리했지만, 백두일맥의 앞날이 어둡지 않을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하긴, 지금도 그랜드 마스터급이 세 명이나 남아 있고, 다른 사람이라도 저 고룡의 사체를 소화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면 뭐 완전히 손실이라고만은 볼 수 없겠네요.”
“그렇지. 어쨌든 백무성이 저 드래곤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결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시 꽤나 피해를 입었겠는걸?”
“그러게 말이에요. 한국을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인간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겸 이런 업적을 홍보해 주는 것도 괜찮겠네.”
사실 강민과 유리엘이 예상했던 범위 내의 손실이라 하더라도 지금 인류는 패닉 상태에 가까웠다. 그것은 인간이 이런 세계적인 재앙을 겪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웜홀의 폭주에 대해서 미리 경고는 있었지만, 전 인류의 절반이 죽을 정도로 심각한 일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인류가 공포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이런 영웅적인 업적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남은 인류에게 큰 힘을 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일단 제니아에게서 개괄적인 현황은 들었으니, 벤자민을 불러서 세부 현황에 대해서 파악해 보도록 해요. 어차피 본부도 한국으로 옮겼다고 하니 부르면 금방 올 수 있겠네요.”
제니아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정보와 벤자민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다른 카테고리의 정보였다.
제니아가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라면 벤자민은 인간들의 대처를 비롯한 분석적인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급한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집 안에 있는 한미애의 기운을 확인한 강민이 그것을 지적하며 이야기했다.
“벤자민은 나중에 부르고 일단 어머니께 인사부터 드리자. 아무래도 우리가 8개월 가까이 자리를 비웠더니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아.”
“확실히 그런 기운이 보이시네요. 얼른 가서 걱정을 풀어드려요.”
그렇게 제니아를 돌려보낸 강민과 유리엘은 이제 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는 강민을 본 한미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강민에게 다가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무사했구나. 수고했다. 수고했어.”
이미 짧으면 6개월에서 길면 1년 정도까지 자리를 비울 수 있다고 미리 말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미애는 과거 강민이 실종되었을 때처럼 마음 졸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라 6개월이 넘어가자 다소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을 채우기 전 8개월 만에 아들이 돌아오자 한미애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강민을 반겼다.
한미애는 강민이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들었지만, 아직도 자식 걱정을 하는 평범한 어머니였다.
마물 따위에게 절대 강민이 당할 일이 없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식은 아무리 커도 자식이듯이 연일 도시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한미애의 걱정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 * *
한미애와 강서영에게 돌아왔다는 인사를 하고 그들의 걱정을 풀어주고 난 뒤, 강민과 유리엘이 움직인 곳은 벤자민이 있는 유니온이 아니라 KM그룹 본사였다.
어차피 KM그룹에도 들러야 하기 때문에 벤자민을 굳이 집으로 부르기보다는 그곳으로 불러서 한 번에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강민과 유리엘이 회장실로 들어오자마자 장태성 기획실장이 올라왔다는 비서의 보고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하세요.”
강민의 들어오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상기된 표정의 장태성 실장이 들어왔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저야 괜찮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 그게…….”
장태성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강민의 안부를 물어보려 이렇게 다급히 올라온 것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시처럼 대하는 그의 모습에 되려 당황했다.
“음, 이왕 올라오신 김에 회사 상황이나 보고해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급히 올라오느라 상세한 서류를 들고 오지 못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별도 보고 드리겠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대략만 보고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전에 지시하신 대로 결계 도시 밖에 있던 계열사의 지역 본부 및 지부들은 둠스데이가 있기 전에 다 매각하여 결계 도시 밖에서 손실을 입은 것은 거의 없었으나, 결계 도시 안에 있던 지사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입니다. 특히, 호주나 남미 쪽의 지사들은 그 도시들이 그랬듯이 모두 괴멸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지금 장태성 실장이 둠스데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론에서 웜홀의 폭주가 일어난 날을 그렇게 지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날은 일반인에게도 둠스데이라는 호칭으로 지칭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둠스데이라는 호칭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곳은 어떤가요?”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쪽 지부와 중동 쪽 지부들도 큰 피해를 입었고, 유럽이나 북미 쪽도 비교적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피해를 입긴 하였습니다.”
지금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나 당시 장태성 실장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장태성은 남은 KM그룹을 다독여야 할 책임이 있었기에, 남은 직원들과 사업을 생각하여 다시 마음을 잡고 그 스트레스를 이겨냈었다.
“그렇군요. 원자재 확보 지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그 부분은 이전부터 꾸준히 준비했던 것만큼 목표치의 두 배 이상을 달성한 상태입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는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그전에 저렴하게 구매했던 물량이 많아서 예산도 그리 많이 들지 않았습니다.”
“두 배라구요? 호오. 꽤 노력하신 것 같네요.”
“회장님께서 자금을 더 풀어주셨기에 가능했던 부분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