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현세귀환록
194. 전개(2)
드래곤은 100미터가 넘는 눈에 띄는 큰 몸집이라 이런 난동을 부리지는 않더라도 시야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블랙드래곤의 지척까지 다가간 백무성은 문답무용으로 자신의 환도에 광검을 깃들이더니 드래곤의 배를 향해 검격을 펼쳤다.
블랙드래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인간에게서 뜻밖의 강렬한 공격이 터져 나오자, 그 육중한 몸을 순간적으로 공간이동 시켜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고룡이라 하더라도 광검의 공격은 위험하다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백무성에게 말을 걸었다.
[호오. 이 차원에도 네놈 정도의 실력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드래곤의 대화 시도에 백무성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물이…… 말을 하다니…….”
지금껏 수많은 마물들을 보았지만, 대화를 시도한 마물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 그 때문에 백무성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물? 크큭, 우리를 마물이라 부르다니 확실히 이 차원에는 우리 종족이 없는가 보군. 우선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블랙드래곤 일족의 알카이브다.]
자신을 소개하는 알카이브의 그런 행동에 백무성 역시 꺼내 들었던 환도를 도집에 갈무리한 후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알카이브? 나는 백두일맥의 가주 백무성이라 하네. 말이 통하는 마물, 아니, 타 차원의 존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해 처음부터 공격했네. 미안하군.”
[미안할 건 없지. 어차피 네 몸을 가져갈 생각이니 말이야.]
“뭐?”
몸을 가져간다는 알카이브의 발언에 백무성은 깜짝 놀라며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크크큭. 생각지도 못한 차원 이동 때문에 다잡은 티그리안 일족의 왕을 놓쳐서 화가 치밀었는데, 여기서 더 높은 경지의 대전사를 구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영상에서 보여지는 백무성은 알카이브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티그리안이니 대전사니 하는 말은 이곳에서 쓰이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보는 강민과 유리엘은 둘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대전사라면 저쪽도 드래곤의 개체수가 많지는 않은가 보군.”
“그런가 봐요. 대전사를 사용해서 직접 전투를 피하게 하는 것을 보니 말이에요.”
드래곤이 있는 차원은 생각보다 흔했다. 특정 차원에서 자생한 개체도 있을 테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호기심 많은 드래곤들이 차원 이동을 통해서 타 차원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드래곤이라는 종족을 퍼뜨린 경우가 많았다.
암수가 교미하여 생식을 할 수도 있지만, 자가생식 또한 가능한 종족이다 보니 혼자서 차원을 넘어간다 하더라도 종족을 퍼뜨리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알을 낳는 것은 엄청난 마나 소모를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개체 수를 늘릴 수는 없겠지만, 자가생식을 할 수 있는 만큼 종족 자체의 명맥이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차원에 존재하고 있는 드래곤들은 차원의 개체 수에 따라서 분쟁을 조절하는 방식이 보통 둘로 나누어졌다.
개체 수가 많은 곳에서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제약이 적거나 거의 없었다. 즉, 분쟁이 생기면 드래곤끼리 직접 전투를 벌여서 심하면 상대방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하지만 개체 수가 적은 곳에서는 보통 직접적인 전투는 하지 못하도록 드래곤 로드로 통칭되는, 수장급의 드래곤이 막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감과 자부심이 넘치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분쟁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로드라고 하더라도 그 분쟁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온 방법이 대전사(代戰士)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대전사는 간단히 말하면 대신해서 싸워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개체 수가 적은 드래곤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쪽이 죽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각 드래곤들을 대신해서 싸워 그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강민과 유리엘은 대전사라는 알카이브의 말에 그들의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조금 전 알카이브가 난동을 부린 이유도 다잡은 대전사를 놓쳤기 때문이라는 것도 유추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짐작이 가는군.”
“그러게요. 아무리 초입이라 하더라도 광검지경의 능력자라면 대전사로서 거의 최상급일 테니까요.”
“고룡쯤 되면 광검지경 초입이라 해도 잡지 못할 리 없으니 말이야.”
강민과 유리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영상에서 알카이브와 백무성의 대화도 계속 이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놈을 나의 대전사로 삼겠다는 것이지. 골드 일족은 상응하는 대가를 주고 계약을 맺기도 한다던데, 난 그런 번거로움은 싫어서 말이야. 능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정신을 제압해서 사용하는 것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어서 더 낫더군.]
그렇게 말을 마친 알카이브는 검은 두 눈에 마나를 깃들이더니 시동어와 함께 그 마나를 쏘아냈다.
[알카라 바리카 둠!]
알카이브의 눈에서 쏘아진 마나는 백무성의 온몸을 감쌌다. 심상치 않은 알카이브의 기세에 백무성은 미리 몸에 호신막을 친 상태였는데, 정신에 직접 개입하는 알카이브의 마법은 백무성의 호신막과 관계없이 그의 정신에 파고들었다.
애초에 정신 공격인 줄 알았다면 정신계 방어막을 쳤을 테지만, 이런 공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백무성으로서는 때늦은 후회였다.
“으, 으윽…… 으으윽…….”
백무성은 자신의 정신으로 파고든 알카이브의 마법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블랙드래곤 일족의 주특기 중의 하나가 정신계 마법이었다. 그리고 백무성의 광검 공격을 통해서 그의 수준을 알아본 알카이브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펼친 것이었다.
즉, 지금 고룡급의 블랙드래곤 알카이브가 사용하는 이 마법은 10서클 마법이라는 의미였다.
백무성이 알카이브의 마법을 저항하는 동안 그가 데려온 수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가주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수하들은 적극적으로 드래곤의 몸체를 향해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챙, 챙챙-
콰앙! 콰앙!
검기와 검강들이 알카이브의 비늘에 작렬했다. 9명의 수하 중 3명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금강승이고, 나머지 6명도 모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강자들로 무시할 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특히, 세 명의 금강승의 검강은 평범한 검강보다도 훨씬 날카롭고 정련되어 알카이브의 비늘도 일부 잘라낼 정도였다.
‘크윽. 꽤나 날카롭군. 그런데 이놈이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데? 아까 티그리안의 왕을 잡는다고 너무 많은 마나를 사용해서 최대출력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서 그런 건가?’
광검지경인 만큼 어느 정도는 저항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백무성이 버티는 것은 그의 생각 이상이었다.
“크으으윽…… 으으윽…….”
아직도 괴로워하며 저항하는 백무성을 본 알카이브는 방어로 돌린 마나마저도 이 마법에 집중시켜 어서 빨리 백무성을 장악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공격이 꽤 아프긴 하지만, 이깟 상처야 치료 마법 한 번이면 금방 치유될 테니 일단 저놈부터 확보하자.’
알카이브의 그런 결심과 동시에 알카이브의 눈에서 쏘아지는 마나 광선은 더욱 강렬하게 빛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알카이브의 비늘에 서린 마나의 양이 줄어들면서 백무성 수하들의 공격이 비늘을 뚫고 알카이브의 몸체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크윽…… 그만 버티고 굴복하라!!’
알카이브의 정신 지배 마법 광선이 더 강한 힘을 발하는 동안 백무성의 머리에는 왠지 모를 현기를 가진 푸른 광채가 은은히 발현하였다.
딱 보아도 이 푸른 광채가 백무성이 그 스스로의 정신을 붙잡을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백무성 또한 자신이 정신을 놓으려고 할 때마다 기이한 힘이 자신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 현장에 있는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 상황을 영상으로 보는 강민과 유리엘은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제마봉(制魔棒)으로 심어 놓은 청명기(淸明氣)가 이렇게 그에게 도움을 줄지는 몰랐군.”
지금 백무성을 보호하는 푸른 광채는 과거 백무성이 심마에 빠졌을 때 심마를 제거하면서 강민이 심어놓은 청명기라는 기운이었다.
당시 백무성에게 다시 심마가 발현할 것을 염려하여 그의 정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한 줄기 기운을 남겨둔 것이었는데, 그 기운이 공교롭게도 알카이브의 정신계 마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지금 저 고룡의 마법 수준이나 백무성의 수준으로 보아 그의 본신 능력만으로 저항했다면 벌써 저 마법에 먹혀 버리고 말았을 것 같네요.”
“그렇겠지. 저 드래곤으로서는 충분히 마법이 먹힐 상대가 저항하고 있으니 당황스럽기도 했겠지. 그런데 저 알카이브란 녀석 꽤나 멍청하군. 저렇게 복부가 뚫려서 큰 상처를 입고 있는데, 아직도 저 마법에 집착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호호호. 근데 상황이 좀 우습긴 해요. 아예 막아냈다면 그냥 포기했을 테지만 저렇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있으니 지금 마법을 포기하기도 아깝겠죠. 상태를 보니 마법에 거의 전 마나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강민과 유리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백무성의 수하들에 의해 알카이브의 복부에는 큰 상처가 난 상태였다.
알카이브는 10서클 마법 시전에 집중하느라 몸을 이동할 여력도 없었고, 방어에 쓰는 마나도 최소화한 덕분이었다.
지금도 백무성은 괴로워만 하고 있었는데, 결국 계속되는 공격으로 상처가 커짐에 위기감을 느낀 알카이브가 마법을 거두고 몸을 피하면서 이 기묘한 대치 상황은 종료되었다.
마법을 거둔 알카이브는 재빨리 뒤로 이동하여 공격을 피한 후 자신의 몸에 회복 마법을 걸었다.
“커헉!!”
알카이브가 마법을 거두자 백무성은 크게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는데, 그의 상태도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크윽…… 나는 괜찮다. 어서 빨리 저 마물을 잡아야 할 것이야. 저 마물이 이 세상에 마음대로 돌아다닌다면 세상은 종말을 맞고 말게 될 것이다!”
백무성은 만일 자신을 보호하는 기이한 기운이 없었다면 자신은 조금 전 알카이브의 마법 공격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광검지경에 다다른 자신이 그 정도라면, 자신보다 밑에 있는 능력자들은 이 마물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 자명하였다.
이 마물을 해치우지 못한다면 이 세계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이 든 백무성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알카이브를 해치울 결심을 하였다.
더군다나 아직 마물은 조금 전 입은 피해를 회복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에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만일 이 자리를 떠나서 완전히 회복된 상태로 돌아온다면 백무성은 스스로를 알카이브라 칭한 이 마물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결심을 한 백무성은 알카이브의 마법에 저항하느라 엉망이 된 내부의 상황을 무시하고 빠르게 몇 군데의 혈도를 짚었다. 사혈(死血)이라 할 수 있는 혈도에 특유의 운행으로 기를 집어넣자 내부의 기는 마치 용암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그렇게 끓고 있는 것은 단지 내부의 마나에 그치지 않았다. 기를 담고 있는 단전마저 그의 흐름에 동조하여 펄펄 끓는 솥처럼 엄청난 기운을 머금은 마나를 그의 전신으로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