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현세귀환록
192. 통합(3)
카이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카이로 이외에도 많은 중동의 도시들이 밀려 버렸고,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마물에게 뚫려 버렸다.
지금 언급한 곳들은 카이로를 제외하고는 웜홀의 폭주에 그리 잘 대비된 곳이라 할 수는 없었는데, 문제는 상당히 준비가 잘된 곳이라 할 수 있는 호주의 시드니, 멜버른 같은 결계 도시들도 엄청난 마물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뚫려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는 등장한 마물의 질적, 양적 차이에서 나온 결과였다. 만일 케냐의 나이로비 같은 곳에 나타난 마물이 시드니에 나타났다면, 시드니에서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북반구에 비해 적도 아래쪽에 있는 남반구 도시들에 상대적으로 더 강한 마물이 출현했고, 그 마물을 극복할 준비까지는 되어 있지 않았기에 남반구의 결계 도시들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마물에게 뚫리고 말았다.
다만 결계 도시가 뚫렸다고 해서 모든 남반구 인간들이 사멸한 것은 아니었다.
전 지구 상에 걸쳐 수백, 수천만 개의 웜홀이 발생했고, 그 웜홀에서 억 단위의 마물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지구는 넓었다.
분명 웜홀의 영향력, 마물들의 영향력에서 빠져 있는 마을들이 있었고, 많지는 않지만 그런 소수의 마을 중에는 이번 웜홀의 폭주에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었다.
하지만 남반구에서 도시 규모 이상에서는 온전히 도시를 건사한 곳은 없었다. 남반구의 모든 국가와 도시들이 괴멸한 상태이기 때문에 소수의 인간들이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마물들에게 조직적인 대항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즉, 남반구는 마물들의 손에 떨어져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북반구 역시 남반구에 비해서는 상당히 선방하였지만, 수많은 도시와 국가가 마물들의 공세에 쓸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오늘 벌어진 웜홀의 폭주는 문명사회가 이룩된 이후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가혹한 시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상자와 천문학적인 경제적 피해를 발생시켰다.
더 큰 문제는 이 웜홀의 폭주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번처럼 엄청난 규모로 벌어질 것은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지속될 가능성이 컸다.
* * *
지구의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는 동안 한국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함경도 상단과 전라도 하단을 제외하고는 평화롭다고 할 정도로 그 혼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격전을 벌이는 곳도 다른 결계보다는 훨씬 넓은 범위였지만, 타국에서 이주해 온 수많은 이능력자들 덕분에 다른 국가들의 결계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이 모든 것이 유리엘이 한국 전역에 펼친 결계 덕분이었다. 하지만 결계의 중심에 있는 강민과 유리엘은 그렇게 평화롭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다.
“으음…….”
어디인지 모를 흰 공간에는 직경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입체 마법진이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중앙에는 공중에 떠서 가부좌를 튼 강민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한 줄기 신음성을 내었다. 감은 강민의 두 눈가에 살짝 주름이 진 것이, 강민이 편하게만 앉아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강민은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마법진 안에서 기이한 현기가 서린 동작으로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 따라서 막대한 마나 유동이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유리엘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강민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입체 마법진의 표면에는 형언하기 힘든 기하학적인 문양과 수천 개가 넘는 룬어가 나타났다 사라졌는데, 그것이 나타날 때마다 유리엘은 빠른 속도로 수인을 맺으며 마법진의 마력 술식을 재구성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추가하는 마력 술식에 따라서 강민이 발한 마나가 더 큰 울림을 가지고 흰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강민과 유리엘은 마법진의 안과 밖에서 거대한 힘을 사역하며 얼마인지 모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지금껏 감고 있던 강민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끊임없이 현기를 발하던 두 손 역시 움직임을 멈추고 단전으로 모였다.
유리엘 역시 강민의 움직임이 멈추자 수인을 멈추고 강민을 바라보더니 그에게 물었다.
“좀 어때요?”
“일단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아.”
“다행이네요.”
“오랜만에 마나 축에 들어와서 마나 흐름을 사역하려고 하니 생각보다 쉽지 않네.”
지금 강민과 유리엘이 있는 곳은 마나장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마나 축 안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둘이 하고 있는 일은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타 차원의 마나 흐름에서 이곳 차원의 마나 축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강민이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만 년의 시간을 살아온 둘에게도 이 일은 몇 차례 해보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만년도 넘은 일이었으니 오랜만이긴 하네요……. 어쨌든 고생했어요.”
“고생은 뭐. 혼자 했다면 모를까, 유리가 도와주니 그다지 힘들진 않았어.”
과거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오롯이 강민 혼자서 그 압력을 받으며 마나 축을 보호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리엘이 사전에 강민의 힘을 증폭해 주는 입체 마법진을 설치하였고, 급변하는 마나 흐름에 맞추어 실시간으로 마법진을 수정하여 강민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결과적으로 강민은 과거에 들인 힘의 반의반도 들이지 않고서도 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마나 축을 보호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마나 폭주의 압력이 강했네요. 우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마나 축이 부러졌었을 수도 있었겠어요.”
“압력도 압력이지만, 이 차원의 마나량이 적었던 것만큼 마나 축의 내구력 또한 너무도 약했어. 그래도 전에 경험이 있어서 미리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다 물거품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강민과 유리엘이 이곳에 미리 자리를 잡은 것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둘의 생각보다 타 차원에서 쏟아지는 마나 흐름의 압력은 강하였고, 이 차원의 마나 축의 내구력은 너무 떨어졌다. 둘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마나 축은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차원 축이 부러지면 차원을 유지할 수 없듯이, 마나 축이 부러지면 기존의 마나 문명을 유지할 수 없을뿐더러 새로이 마나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생명의 기반인 마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이 생명체가 태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했다.
임시방편으로 얼마간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생명체가 없는 사멸한 차원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이고 이번처럼 차원의 통합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약간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할 수 있었다.
이미 마나장이 통합된 상황에서 마나 밀도를 맞추어가며 마나 축도 서서히 통합이 되어야 하는데, 한 곳의 마나 축이 부러진다면 일시적으로 마나 공동화(空洞化)가 발생하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 마나 공동화로 한 차원의 마나가 비어버리면 다른 차원에서는 더 급격한 흐름으로 마나 밀도를 맞추려고 할 것이고, 그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규모의 후폭풍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소수의 강자를 제외한 양 차원의 생명체 모두가 그 마나 폭풍에 사라질 수도 있을 만큼, 마나 축의 붕괴에 따른 마나 폭풍은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어느 쪽에서든 마나 축의 붕괴는 생명체가 말살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요. 어쨌든 가장 강할 것으로 예상했던 첫 번째 흐름을 넘겼으니 앞으로는 좀 여유가 있겠네요. 몇 번이나 막아야 할 것 같아요?”
“적어도 다섯 번 정도는 더 막아야 할 것 같아.”
“다섯 번요? 전 세 번 정도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 차원의 마나 축이 너무 약해. 확실히 하려면 다섯 번째 흐름까지는 막아놓아야 할 것 같아.”
“흠. 다섯 번이라……. 그럼 최소 석 달 정도는 이곳에 묶여 있어야겠네요.”
마나의 흐름을 맞추는 과정은 일시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마치 파도가 치듯이 크고 작은 흐름이 왔다 갔다 하며 마나 밀도를 맞추어갔다.
당연히 막은 보를 터뜨린 것과 같은 첫 번째 흐름이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여파가 남아 있었기에 두세 번 정도는 그 힘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강민이 다섯 번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차원의 마나 축이 그것조차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강민이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보통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석 달이 넘는 간격으로 그 흐름이 쏟아졌기 때문에 유리엘이 최소 석 달을 말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길면 1년이 넘을 수도 있을 거고 말이야.”
“그때까지 잘 버텨주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마나 축 안에서는 외부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마나장이 위치한 차원은 이 차원에 속하기는 하였지만, 그 위상(位相)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공간이 발현되면 아공간 자체는 원래 차원에 속하지만, 그 속은 원래 차원과 단절된 것과도 같은 원리였다.
그 때문에 지금 강민과 유리엘은 지구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흐름이 약해진 지금 나갔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들어오는 식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통상적으로는 흐름의 주기가 삼 일에서 십 일이지만 외부의 요인이 생긴다면 삼 일보다 더 빠른 시기에도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한 번 흐름이 나타났다면 마나 축 스스로의 자율 방어 체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방어체계를 부수지 않고서는 다시 마나 축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방어체계를 부순다는 말은 곧 마나 축 자체를 부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다.
결국 타 차원의 마나 흐름의 압력을 마나 축이 버텨낼 수 있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묶여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유리엘이 말한 것처럼 둘이 부재하는 동안 지구인들이 얼마나 버텨주는가에 있었다.
“잘하겠지. 결계까지 만들어줬는데 말이야.”
“그랜드 마스터급이라 할 수 있는 SSX급 마물들이야 이곳에도 그랜드마스터가 생각보다 많이 나와서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문제는 그 위의 마물이지요.”
통상적으로 SSS급부터 SSF급의 마물은 그랜드 마스터급이라 하여 SSX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유리엘이 걱정하는 것은 이 마물들은 아니었다.
광검지경, 혹은 10서클 마법사와 동급이라 할 수 있는 등급외의 마물이 그녀의 걱정이었던 것이었다.
“하긴, 그런 놈들이 출현하면 우리가 나서려고 했었지. 그래도 광검지경의 녀석들을 완전히 상대하기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결계까지 펼쳐주었다는 것은 인간들이 사멸하도록 두고 보지는 않았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인간들이 감당하기 힘든 마물들이 나오면 강민과 유리엘이 나서려고 했었다.
광검지경의 마물은 당연히 처리하려 하였고, 그랜드 마스터급 중에서도 지역에 따라 해결할 수 없는 마물들은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였다. 다만, 강민이 언급한 것처럼 인간 중에서도 그런 마물을 상대할 만한 자가 있긴 하였다.
“그렇긴 하죠. 백두일맥의 백무성 가주는 이번에 보니 완전히 광검지경에 들어갔던 것 같고, 올림포스의 메르딘은 아직 10서클에 들지는 못했지만 토니우스의 지팡이를 사용한다면 한두 개 정도의 10서클 마법은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버티기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메르딘은 지난번 악마처리 퀘스트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려 토니우스의 지팡이를 획득한 바가 있었다.
물론 진짜 최고 득점자는 한 방에 악마의 주력을 전멸시킨 유리엘이었으나, 그녀가 내건 상품을 그녀 스스로 가져갈 수는 없었기에 차점자인 메르딘에게 우승을 넘긴 것이었다.
토니우스의 지팡이는 과거 이레스타 차원의 대마법사 토니우스가 사용하던 지팡이로 사용자의 마력 증폭은 물론이고 지팡이 내에 자체적인 10서클 마법 술식 몇 가지가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무구였다.
물론 아직 9서클 마법사인 메르딘은 이 토니우스의 지팡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능력의 일부만 사용하더라도 광검지경 초입의 마물 정도는 견제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 우리가 없는 동안 그 둘이 제대로 활약을 해줘야 할 텐데 말이야.”
“그 정도 능력이 되는 마물은 만나기 쉽지 않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마물이 나타난다면 그것도 인간들의 운명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