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현세귀환록
190. 통합(1)
D-1일이 되면서 카운트다운의 시계는 날짜가 아니라 24시간 단위로 바뀌었고, 그렇게 바뀐 시계는 초 단위부터 남아 있는 숫자를 줄여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신들이 이날, 아니, 이 다음 날을 대비하여 준비한 것들을 한 번 더 점검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 대부분의 결계 도시 안에는 도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이상의 사람들이 들어온 상태였다.
건물의 옥상은 기본이고, 체육관 같은 공공시설 등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모든 곳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결계의 범위에 비해서 인구가 많은 곳에는 도로까지 사람들이 점거하고 있어 교통 또한 마비된 곳이 많았다.
그렇게 많은 나라에서는 임시 지하 방공호까지 설치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나 그래도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리엘이 결계를 여유 있게 펼쳐준 덕분에 도시 내에는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도시 외곽에 임시거처를 마련하여 상당수의 사람이 결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한국 또한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 웜홀의 폭주가 끝날 때까지 임시로 북한의 일부분을 오픈하고 수많은 사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구 인구의 80% 이상이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웜홀의 폭주를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자신의 거주지에 가진 것들이 많은 자 중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결계 안으로 피했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거주지에 별도의 용병들을 고용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시국이 시국인 만큼 평소보다 수십 배는 많은 보수를 약속했음은 물론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용병들은 그런 제안을 거절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웜홀의 폭주를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일부의 부류들은 이런 제안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어쨌든 결계 안은 안대로, 밖은 밖대로 행여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삶을 반추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껏 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하기도 하였다.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이성을 만나서 뒷일을 생각지 않는 광란의 파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마약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렇게 전 세계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방법으로 어쩌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 오늘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시간은 흘러 한국 시간으로 오전 11시 10분경, 카운트다운 시계는 마지막 초를 줄여가며 00시 00분 00초를 가리켰다.
이 순간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은 숨을 죽이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계를 둘러싼 차단벽 위에 있는 능력자들은 곧 나타날 마물을 즉살하기 위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결계 밖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장비를 갖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투쟁심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 * *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새벽 4시 10분이 되어 카운트다운 시계가 00초를 가리킨 지 몇 초가 지났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 같자, 차단벽 위에 있던 노랑머리의 이능력자가 입을 열었다.
“이거 뭐야? 아무 일도 없는 거…….”
하지만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휴대용 웜홀 탐색기에서 진동이 울리며 인근에 웜홀이 열렸다는 신호가 발생했다.
웜홀 탐색기는 통상적으로 웜홀 오픈 세 시간 전에 웜홀이 나타날 장소를 알려주었는데,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웜홀의 폭주 때문인지 웜홀 탐색기는 세 시간 전부터 붉은 화면만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웜홀이 열렸다는 신호에도 어디에서 열렸는지 그 장소는 알 수가 없었다.
“어디지? 어…….”
하지만 노랑머리는 웜홀 탐색기에서 보여주는 붉은 화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앞으로 수백 개의 웜홀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기 때문이었다.
새벽 시간이라 아직 날이 밝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방에 광원(光源)을 설치해 놓았기에 주위를 살피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노랑머리는 눈앞에서 열리는 웜홀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어쨌든 그제야 노랑머리는 탐색기가 왜 붉은 화면만을 나타냈는지 알 수 있었다. 탐색기의 감지 범위 모두에서 웜홀이 열렸기에 붉은 화면만이 나타났던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지금까지는 한 웜홀에서 한 마리의 마물, 많아야 두 마리 정도의 마물이 출현한 것에 비해, 지금 이 웜홀들에서는 수십, 수백의 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껏 노랑머리는 웜홀의 폭주라 해봤자 많아야 지역별로 수백 개의 웜홀이 나타날 것이고, 그곳에서 수백 마리의 마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많다고 할 수 있지만, 얼마 전 S급에 오른 자신이라면 A급 정도의 마물이라면 수십 마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세계적인 혼란 상황에서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마물을 처리하여 마정석을 얻을 기회로까지 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쏟아지는 마물들 사이에는 S급으로 보이는 마물만 대여섯 마리였다. 자신이 한 마리 한 마리 간신히 상대할 만한 마물이 대여섯 마리라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이능력자들은 일 대 일로 마물 사냥을 할 때는 자신의 등급보다 한 등급 낮은 등급의 마물을 찾는다. 그래야 위험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동급의 마물이라면 동급이라는 말 그대로, 거의 비슷한 수준의 무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 대 일로 상대하면 박빙인 경우가 많았다. 즉,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노랑머리는 이제 갓 S급이 되었다. 그 말은 즉 SF등급이라는 뜻이었다. S급 중에서도 최약체인 상황에서 많은 장비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S급의 마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물론 노랑머리도 믿는 구석은 있었지만, 그것까지 감안하더라도 저 마물들과 붙으면 십중팔구 자신이 죽을 가능성이 컸다.
또한 주위에 많은 이능력자가 있었지만, 자신과 이들만으로 지금 나타난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노랑머리는 주위를 향해 크게 외쳤다.
“바, 방공호로 대피하라!!!”
지금 차단벽 위에는 결계 밖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많은 일반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다.
물론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느 정도의 위험인지 알 수 없었기에, 만용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차단벽 위에는 수많은 이능력자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다지 위험을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에게 실질적인 공포를 느낀 사람들은 노랑머리의 외침이 신호나 된 듯 허겁지겁 차단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 으윽…….”
“미, 밀지 마세요!”
“빨리 내려갑시다!”
이미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엘리베이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단벽에는 엘리베이터도 있었지만, 전기 공급이 끊기는 상황을 대비해서 계단 또한 마련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계단으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이내 계단 역시 가득 차버렸다.
서로 급하게 내려가다 보니 사람들은 엉켜서 넘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사람들에 밀려 넘어진 몇몇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 마물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이지만 압도적인 마물의 숫자에 사람들의 공포심은 커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인간들에게는 다행히도 웜홀에서 쏟아져 나온 마물들은 일사불란한 체계 같은 것은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마물들 사이에서도 일부 마물들은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인지 서로 싸우는 마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마물이 그런 것은 아니었고 상당수의 마물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차단벽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다만, 마물들은 차단벽까지 곧바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마물들이 차단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차단벽 앞에 포진하고 있는 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단벽 아래에서 군부대를 지휘하던 중후한 인상의 50대의 중년인이 마물들이 접근해 옴에 따라 공격을 명했다.
“공격하라!!”
타타타타타~!
휘이이잉- 쿠아앙!!
콰앙! 콰앙!
콰가광!!
중년인의 명에 따라서 소총부터 자주포, 박격포까지 다양한 무기가 마물들을 향해서 쏟아졌다.
지금 군인들이 사용하는 열병기들은 과거처럼 물리적 파괴력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총알을 제작할 때 마정석의 가루를 넣고, 총기에도 간단한 마나 회로를 설치하여 일정 정도는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물론 전문적인 이능력자들이 사용하는 마나 라이플보다는 성능이 떨어지는 양산형 무기였지만, 일반적인 총기에 피해를 입지 않는 마물들에게도 약간의 피해를 줄 수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기나 하는 듯 군인들의 병기는 상대적으로 약한 마물의 마나장을 뚫으며 피해를 주었고, 심지어는 단순히 물리적 충격에는 피해를 입지 않을 영체(靈體) 종류의 마물들도 약간씩은 타격을 입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잡을 수 있는 것은 하위 등급의 마물뿐이었다. C급 정도의 마물만 되어도 열병기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A급 정도 마물은 아예 그 공격을 무시하고 군대에게 달려들었기에, 조금 전 명령을 한 50대 중년인은 이를 악물며 전방을 바라보더니 무전기를 들고 외쳤다.
“저등급 마물들은 처리했으니 능력자를 투입해 주시오!!”
중년인의 말에 따라 차단벽 위에 올라가 있던 이능력자들 수백 명이 차단벽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에 나타난 능력자들은 수백 명이지만, 도시 전역에는 이런 전장이 수백 곳이 넘게 생겼을 것이었다. 즉, 이 도시 하나만 해도 동원된 이능력자가 수만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능력자의 대부분은 D급이나 E급 같은 하위 능력자였고, A급 이상의 상위 능력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때 이능력자들의 선두에 선 부리부리한 눈의 40대 장년인이 입을 열었다.
“자, 저 마물들을 해치우고 우리의 도시, 우리나라를 지키자!”
“지키자!!”
“우오오오!!”
“가자!!”
몰려오는 마물에게 공포심이 들 수도 있었기에 장년인은 이능력자들의 애국심을 자극하여 전의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일단 가능한 원거리 공격부터 시작하라!”
장년인의 명령에 따라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능력자들은 각자 화염구나 얼음창, 전격 화살 등을 펼쳐서 공격하였고, 그런 능력이 없는 능력자들은 옆에 놓여 있는 투창이나 마나 라이플 등의 개인 화기를 이용하여 원거리 공격을 가하였다.
아무래도 능력자들의 공격이라 그런지 살아남았던 몇몇 저등급 마물들은 그 공격에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고등급 마물들은 이 정도 공격에 약간의 타격을 입을지언정 치명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결국 상당수의 마물들은 이능력자들의 근거리까지 다가왔고, 롱소드를 든 20대 청년의 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마물과 이능력자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챙챙챙-!
콰지직!!
“으악!!”
“죽여라!!”
“뒤로 피해!!”
지금까지 한두 마리의 마물만 상대하던 이능력자들은 마물과의 이런 대규모 접전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들이 무너지면 뒤의 도시까지 밀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지 이능력자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마물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이능력자들과 마물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처음 전투 명령을 내린 장년인은 옆에 있던 노랑머리에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네이트 씨, 저 뒤에 있는 고등급 마물들을 부탁하오.”
네이트라 불린 노랑머리는 장년인의 말에 다소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하토르 단장님, 지금 언뜻 보기에도 S급 마물이 적어도 다섯 마리가 넘는데, 그걸 저 혼자 처리하기엔…….”
“그렇지요. 하지만 자세히 보시면 저들 사이에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잘만하면 각개격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부탁드립니다. 특히 이 난전 속에서 네이트 씨의 그 능력을 사용한다면 저 마물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마물들을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말했지만 여전히 네이트는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결국 하토르 단장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이곳에서 네이트 씨만이 저 S급 마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감안해서 향후 처리하시는 마물에 대한 마정석의 소유권은 물론이고, 전에 약속했던 보수의 다섯 배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