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현세귀환록
187. 준비(2)
“호호호. 그래도 네가 살아 있을 동안은 충분히 유지될 거야.”
“그, 그치만…… 그래도 우리 아이들도 있을 테고…….”
“아이들? 결혼도 안 해놓고 아이들이라니…… 설마…….”
유리엘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를 챈 강서영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언니! 그게 아니구요. 드림시티! 드림시티의 아이들 말이에요. 제가 죽고 나서도 드림시티에서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받아들인 건데, 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결계가 사라진다 하니…….”
영원한 삶을 사는 강민과 유리엘이 죽을 리는 없지만, 그것을 모르는 강서영은 유리엘이 있는 동안이라는 말을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다만 가족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나면 둘 역시 다른 차원으로 갈 테니, 강서영이 생각하는 것과 결과는 비슷하게 나올 것이었다.
그렇게 다소 시무룩해진 강서영을 보며 유리엘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없는 상황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유리엘의 대답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이번에는 강민이 그녀에게 물었다.
“대응이라니? 유리, 어떤 대응이야?”
“아직은 생각만 하고 있는 건데, 웜홀의 수준에 맞추어 별도의 아공간을 설정해서 그리로 마물을 모으는 방식이에요.”
강민은 유리엘 없이 제니아 혼자 아공간을 운영한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공간? 제니아가 아공간을 운영할 수 있을까?”
“어차피 지금 시스템에서도 사용자들의 수련을 위해 다르마 포인트를 활용하여 아공간을 열어주고 있잖아요. 그것의 다른 버전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죠.”
“음…… 그건 단순히 열어주기만 하는 것이잖아. 제니아가 아공간을 유리처럼 마음대로 컨트롤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강민의 생각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유리엘이 아공간을 다루는 능력은 그녀의 영혼에 담겨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배우려 해도 배울 수 없는 능력이었다.
아무리 유리엘이 제니아를 만들고, 아공간에 대한 능력을 부여했다 해도 유리엘처럼 운용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그렇지요. 저처럼 다루지는 못하겠지요. 그래서 나중에 만들 시스템에서도 지금 수련 시스템처럼 제니아는 단순히 아공간을 열고 비슷한 정도의 마물을 모으는 것 정도의 역할만 할 거예요. 뭐 그렇게 아공간 시스템이 도입되면 수련에서 아공간을 쓸 수는 없겠지만, 현실에서 실전을 통해서 실력을 올릴 수 있을 테니 상관없을 것 같네요.”
그렇게 설명하는 유리엘의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강민이 말했다.
“뭐 그렇다면야…….”
“다만 제니아가 아공간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만큼, 무한정 마물을 모을 수만은 없을 거예요. 일정 이상의 마물이 쌓이면 그 아공간은 사라지겠지요. 최초 설정한 한계 이상의 마나를 받아들여 터진다고 해야 하려나? 뭐 그런 방식이에요.”
유리엘이 직접 한다면 자유자재로 아공간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역시 제니아는 아무리 유리엘의 술식으로 아공간을 연다고 하더라도 그 아공간을 유리엘처럼 조절할 역량까지는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유리엘의 마지막 말에 강민은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반문하였다.
“그렇다면 마물이 한두 마리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 마리가 나와서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영구히 모아둘 수 있다면 모를까, 한도 이상이 되면 터진다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기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리엘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호호호, 당연히 모으기만 할 목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요. 아공간은 이곳에서도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 테니, 아공간이 터지기 전에 그곳으로 들어가 마물을 다 처리한다면 일반인의 피해 없이 마물을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웜홀은 일방통행의 통로였다. 즉, 한 웜홀을 통해서는 A라는 차원에서 B라는 차원으로 갈 수만 있지, B라는 차원에서 A라는 차원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돌아오기 위해서는 다른 웜홀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리엘이 만든 아공간은 웜홀의 출구와 아공간을 연결하여 마물을 가두고, 이후 지구에서도 아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를 만드는 일종의 통발과도 같은 구조였다.
물론 통발처럼 한 번 들어가면 임의로 탈출할 수는 없고, 마물을 다 처리하거나 아공간의 핵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탈출 술식을 발동해야 탈출이 가능하도록 조치할 계획이었다.
“그거 괜찮은데? 그렇게 된다면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과 생업을 이어가는 생활의 터전을 구분할 수 있겠군.”
고래로 전쟁에서의 피해는 직접적인 전쟁의 당사자들보다는 전장의 주위에 있는 민간인들에게 더 큰 피해가 나왔다.
하지만 지금 유리엘이 말한 방법이 사용된다면 전장을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분리하여 일반인의 불필요한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웜홀 폭주 때는 이 방법을 사용하긴 힘들 것 같아요.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 때문에 아공간에 가두어 둔다 하더라도 곧바로 다 터져 버려서 의미가 없을 테니 말이에요. 우선은 처음 생각한 대로 결계로 진행을 하고 차후에 아공간 방식을 적용하죠.”
“그래, 일단 주요 도시에 결계만 치더라도 문명을 유지할 정도의 사람들은 살릴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 정도면 충분히 재기할 만하겠지.”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유리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강민에게 물었다. 다만 그 이야기는 강서영이 충격을 받을 것을 감안하여 심어로 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살아남을까요?]
[글쎄, 음……. 절반 정도는 살아남지 않을까?]
[절반이라니, 민은 인간의 생존율을 높게 보네요. 결계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수는 지금 이주한다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사 분의 일도 안 될 것 같은데 말이에요.]
유리엘의 말처럼 결계에 포함되는 주요 도시의 인구수는 전체 지구 인구의 20% 정도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강민의 절반이라는 추정은 낙관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민 역시 근거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결계 안의 사람만 치면 그것밖에 안 되겠지. 하지만, 결계가 펼쳐진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해서 인류가 투쟁한다면 절반 정도의 생존율이 그리 가능성이 없는 숫자는 아닐 것 같은데 말이야.]
[흠……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 번 두고 봐야겠어요.]
강민의 추정대로 절반 정도의 생존율을 보인다고 해도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었다. 현재 80억 명의 인구 중에서 절반이라 하면 거의 40억 명의 인구가 사멸하는 것이었다.
지구 인구의 1%인 8천만 명만 하더라도 한국의 인구수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그런데 40억 명이면 가히 천문학적인 사망자였다.
즉, 웜홀의 폭주는 지금까지 지구 상에 있었던 그 어떤 재앙보다도 많은 사상자를 낼 재앙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지구의 생산력을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80억의 인구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까지 인구수를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의 인구수가 40억 명 정도였는데, 그 인구가 80억 명까지 불어나는데 40년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물들이 창궐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문명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넘쳐나는 마정석으로 인해 마나 문명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할 테니, 지구의 인구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빠르게 불어날 것이 자명하였다.
* * *
제니아의 카운트다운 시계가 D-80을 가리키는 날이었다. 능력자라면 느낄 수 있을 만한 거대한 마나 유동이 발현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지구인의 머릿속에 제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리미리 알려주었으면 어떻게 대응할지를 생각해야지, 공포에 빠져서 삶을 포기하다니. 나약한 인간들이란 어쩔 수 없군. 어쨌든 공지사항이다. 미약한 정신력을 가진 네놈들 때문에 주인님께서 다시 한번 수고를 해주셨다.]
제니아의 목소리는 못마땅하다는 뉘앙스가 가득했지만, 그녀 역시 전달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전에 시전한 웜홀 차단 결계의 내용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지금 지도에 표시해 주는 부분은 이번 웜홀의 폭주 시 웜홀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님께서 친히 결계를 펼쳐 주셨기 때문이지. 아, 그렇다고 마물이 결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웜홀의 출현만 막는 것이니 결계 밖에서 나타나서 결계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마물은 알아서 막도록.]
여기까지 말을 한 제니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세계 지도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지도에는 200여 개의 표식이 나타나 있었다.
지도의 표식을 확대해서 보면 한 도시를 감싸고 있는 원형의 결계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만일 세계의 도시 현황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결계가 펼쳐진 곳의 규칙성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지금 결계가 펼쳐져 있는 곳은 인구 3백만 이상의 대도시와 국가별 수도였다. 한 국가의 수도는 인구가 3백만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유리엘이 결계를 펼쳐 준 것이었다.
다만, 악마의 창궐로 이미 국가로서의 존립을 포기한 소국들은 그런 배려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한국은 도시가 아니라 국토의 전역이 다 들어가 있다는 점이었다. 결계를 펼친 유리엘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이유를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국만이 이런 배려를 받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주인님께서 이런 수고까지 감수하시니 더 이상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대응책이나 준비해서 최대한 인간들이 많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도록.]
그렇게 제니아의 공지는 끝이 났다. 그녀의 말을 간단하였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과 의미는 간단하지 않았기에 세계는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소란은 지금까지처럼 공포와 패닉만이 가득한 소란은 아니었다.
물론 공포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세기말적인 혼란스러운 분위기는 팽배해 있었지만, 하나의 희망의 불씨가 나타난 이상 전과 같은 절망적인 분위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상황과 어디 한 군데에는 기댈 곳이 있는 상황은 천지 차이만큼 다르기 때문이었다.
즉, 세계는 제니아의 공지로 인하여, 정확히 말하자면 유리엘의 웜홀 차단 결계 덕분에 생긴 희망으로 서서히 활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희망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거주지가 결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또다시 좌절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전과 같은 좌절은 아니었다. 적어도 결계에 포함된 도시로 옮겨 갈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결계 밖의 사람들은 모두 국가의 수도나 주요 도시처럼 결계가 펼쳐진 곳으로 이주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결계가 도시의 외각까지 다 포함할 정도로 넓긴 하였지만, 결계 밖의 사람들이 모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넓진 않았다.
결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넘쳐나는 이주자들 때문에 출입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도시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운이 좋게 결계 안에 포함된 사람들과 운이 나빠 결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도시 밖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고, 도시 안의 사람들은 점점 나빠지는 도시의 치안과 환경 때문에 도시로의 이주를 강력히 막기를 원했다.
그렇게 이주가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갈등조차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세계의 상황은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멸망으로 치달으며 죽어가던 세계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활기의 중심에는 한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