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현세귀환록
182. 등장(2)
“누구냐!”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반응한 것은 자포자기한 드미트리가 아닌 마무리 일격을 가하려던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큰 소리로 목소리의 정체를 물으며,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낸 사람이 있는 곳은 전장의 상공 50미터 정도 높이의 하늘이었는데,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는 어느새 다섯 명의 사람이 나타나 있었다. 바로 강민과 그 일행이었다.
강민 일행은 루시페르 잔당이 도망치다가 그 길목을 막고 있는 아바투르 일행과 조우할 무렵 이곳에 나타났기에, 지금까지의 상황이나 서로 간에 오고 갔던 이야기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진행되는 상황을 두고 보고자 은신 마법을 펼치고 있었는데, 정시아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드디어 나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유리엘이 마법을 해제하여 지금 강민 일행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강민 일행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지만, 대각선사는 과거 백무성의 심마를 제거하는 강민의 무위를 본 적이 있었기에 반색하며 그에게 말했다.
“강민 시주!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대각선사는 행여 강민이 거절하면 과거 도와주겠다던 약속까지 언급하려 했지만, 다행히 강민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네, 선사님. 안 그래도 그러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아…… 선재, 선재로다…….”
그렇게 강민이 대각선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일행들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는데, 그중 분노에 찬 정시아가 먼저 빠른 속도로 내려와 드미트리에게 다시금 쏘아붙였다.
“드미트리! 너 같은 악한이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이냐!”
그런 정시아의 말에 드미트리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되려 정시아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게 악한이라는 것이오?”
드미트리의 그런 반문에 정시아의 분노는 가중되었고,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에 대답하였다.
“역시! 네놈이 날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지! 사탕발림과 같은 말을 할 때는 언제고……. 난 소르빈 노이만의 딸 실비아다!”
소르빈이 언급되자 그제야 드미트리는 실비아가 누군지 알아차렸는지 기억을 더듬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 소르빈 님의 딸이라면…… 기억나는군. 그런데 그녀는 분명 뱀파이어가 아니었는데…….”
“역시 아버지를 말하니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군. 네가 나와 아버지를 죽이려 했을 때 아버지께서 당신의 진혈을 내게 옮겨주셔서 뱀파이어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날 이후 난 네게 복수를 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정시아가 화가 난 것은 분명 악인이라 할 수 있었던 드미트리가 루시페르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려는 가식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반응은 그녀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뭐라고? 내가 소르빈 님과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드미트리는 전혀 모른다는 식으로 반응했는데, 그의 그런 모습에 정시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 모른다? 모르시겠다?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는 이유가 무엇이냐?”
“시치미라니! 위에서 봤다면 잘 알 것 아니오! 어차피 지금 목숨을 내놓은 상황인데 내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무엇이겠소!”
드미트리의 항변에 정시아는 잠시 멈칫하였다. 그의 말처럼 지금 드미트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 그렇지만…… 분명 너였는데…….”
지금껏 분노하던 정시아는 뜻밖이라 할 수 있는 드미트리의 말에 다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드레이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하, 이런. 이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군. 난 그때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야.”
드레이크가 지칭하는 사람은 분명 정시아였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정시아는 드레이크를 돌아보며 외쳤다.
“무슨 말이냐!!”
“크큭. 이 얼굴로는 모르겠지?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말을 마친 드레이크는 왼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이 내려간 곳에는 드레이크가 아닌 드미트리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어엇…….”
“이렇게 하면 알겠지? 아. 그때 부른 이름이 실비였던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는군.”
경악한 표정의 정시아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당시 그와 그녀 사이의 애칭을 언급하는 드레이크, 그것도 드미트리의 얼굴을 한 그를 보면서 정시아는 그제야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드레이크가 드미트리로 가장하여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그때의 그녀를 매혹시켰던 그 멋진 모습도, 마음이 통한다고 느꼈던 대화도, 달콤했던 첫 키스의 추억마저도 모두 드레이크가 만든 거짓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바꾸며 낄낄대는 드레이크의 모습에 정시아의 놀람은 분노로 이어졌다.
“이, 이 자식…….”
“크크큭, 그때 죽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명줄이 길구만. 크큭.”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아바투르를 믿고 있어서 그런 건지 드레이크는 일체의 감춤도 없이 모든 것이 자신의 짓이라고 인정하였다.
옆에 있던 드미트리 역시 자신의 얼굴을 한 드레이크의 환영 마법과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시아가 왜 자신에게 그런 폭언을 하였는지 또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그런 폭언을 한 것이군요.”
상황을 파악한 드미트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고, 그의 말에 정시아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는 무고한 사람을 맹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시아는 드레이크에 대한 분노도 잠시 거두고 드미트리에게 사과를 했다.
“미, 미안해요. 당신이 범인인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상황을 보니 실비아 씨가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군요. 저놈이 잘못한 것이지 실비아 씨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해를 풀어서 다행이긴 한데,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하군요. 계속 은신해 계셨던 것이 나았을 텐데…….”
드미트리는 뒤에 있는 아바투르를 흘낏 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걱정스러운 말에 대답한 사람은 정시아가 아니라 드레이크였다.
“흐흐흐, 그래 저놈 말이 맞다. 숨어 있으려면 계속 숨어 있던지, 이렇게 튀어나온 바람에 간신히 잡고 있던 명줄이 끊기려고 하지 않느냐. 크크큭.”
드레이크의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정시아는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싸늘한 어조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어디 누구 명줄이 끊어지는지 두고 봐라.”
“기껏해야 마스터 정도의 능력자 몇 명이 추가된다고 해서 대세에 지장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네놈들 따위야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네년 덕분에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지.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고맙다고 말을 하는 드레이크의 이죽거림에 정시아는 분노가 극도로 치밀어 오르는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모습을 본 드레이크는 그녀를 더 자극하기 위해서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못 들어서 그렇게 화내는 것이냐? 크큭, 그때 먹은 블러드 코어 덕분에 이렇게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었지. 고맙다, 실비.”
실비라는 말을 들은 정시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비명과도 같이 크게 외치며 정시아는 마나가 집약된 팔을 휘둘러 플라잉 오러를 쏘아냈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경지는 그녀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드레이크는 별 어려움 없이 왼팔을 휘둘러 오러를 튕겨냈다.
퍼엉!
“하하하. 고작 이 정도 능력으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익!!!”
드레이크와 정시아 사이에 한 차례 공방이 오가는 가운데, 드미트리에게서 외마디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블러드 코어라고! 드레이크 네놈이 어찌 블러드 코어를 먹었다는 것이냐!”
드미트리가 블러드 코어를 언급하자 정시아는 다시 드레이크에게 덤벼드는 대신, 드미트리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제,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저놈에게 속는 바람에 아버지도 당하시고…… 아버지가 지키시던 그 물건도 저놈에게 빼앗겨 버렸어요…….”
과거 우연히 소르빈이 블러드 코어를 갖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드레이크는 그 후 호시탐탐 코어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블러드 코어는 뱀파이어 역사상 최악의 변종인 그랜드 마스터급 뱀파이어 카락스가 남긴 진혈의 결정으로, 그것을 흡수한다면 자신의 복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소르빈을 습격해서 빼앗을 수도 있지만, 블러드 코어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섣불리 그를 습격했다가는 오히려 복수할 기회만 멀어질 것이라 생각한 드레이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르빈의 집에서 개최한 대행자들의 가벼운 간담회에서 드레이크는 블러드 코어의 위치를 확인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바로 정시아, 당시에는 실비아라 불렸던 그녀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드레이크의 눈에는 간담회에서 다과 시중을 들던 실비아가 드미트리에게 반한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드레이크는 가벼운 환영마법을 통해 드미트리의 얼굴로 변신하여 그녀를 꾀었고, 실비아는 그것도 모르는 채 드미트리의 얼굴을 한 드레이크에게 빠져 버렸다.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출입이 빈번하면 소르빈이 의심할 것을 우려한 드레이크는 빠른 시간에 그녀를 유혹하여 소르빈이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장소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이후의 과정은 정시아의 말 그대로였다. 그렇게 정보를 확인한 드레이크는 비밀리에 움직여 블러드 코어를 찾아냈고, 그것을 막으려던 소르빈 또한 처리하였다.
당시 드레이크는 굳이 일반인인 정시아까지 처리할 생각은 없었으나, 정시아가 소르빈의 죽음을 목격한 이상 목격자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도 살수(殺手)를 날린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놈이 루시페르를 떠난 것도…….”
드미트리의 혼잣말과도 같은 말에 대답한 것은 드레이크였다.
“크큭. 그래, 그때 흡수한 블러드 코어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지. 공교롭게도 그때 빅토르가 블라디미르와의 갈등 때문에 루시페르를 떠났기에, 내가 떠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거라고 다들 오해해 주더군. 하하하.”
드레이크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그의 상황을 알기나 하는 듯이 과거의 악연이 나타나서 그가 했던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이고, 거의 평생을 엉뚱한 사람을 오해하고, 분노하고, 원망했던 정시아는 화가 나고, 억울한 상황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기는 왜 울어, 실비? 아. 그때 시간이 없어서 내 아이를 갖고 싶다는 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야? 크크큭.”
정확히 말하면 당시 정시아는 나중에 결혼하면 드레이크, 아니, 그가 하고 있는 모습인 드미트리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를 놀리고자 하는 드레이크는 그런 말을 지저분하게 비꼬았고, 그 말에 수치심까지 느낀 정시아의 두 눈에서는 더 굵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때 정시아의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오는 손길이 있었다. 최강훈이었다.
최강훈은 정시아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위로하는 한편, 드레이크에게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막돼먹은 주둥아리를 놀리는 것은 거기까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