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현세귀환록
181. 등장(1)
반면 백승의 이탈로 갑자기 진의 기운이 약해지는 것 같자, 드디어 진의 파훼가 성공한 것이라 오해한 바스라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진을 완전히 깨부수려 하였다.
그때 그의 앞으로 사람 크기의 불덩어리가 다가왔다. 그의 경지라면 이런 불덩이의 등장을 모를 수가 없었지만, 지금 바스라는 멸마진 안에서 오감을 차단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기 때문에 불덩이가 지척에 이를 때까지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공세는 피하거나 잘라 버리면 그만이었다. 바스라는 쓸데없는 마기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 일단 몸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는데, 추적 기능이 있는지 이 불덩이는 바스라를 쫓아왔다.
어쩔 수 없이 바스라는 광검을 휘두르며 불덩이를 쪼개어 잘라 버리려고 롱소드를 휘둘렀다.
콰아앙!
하지만 바스라의 광검과 부딪힌 불덩이는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터져 버렸다.
그 뜻밖의 상황에 바스라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마기를 집중하여 호신막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터져 버린 불덩이의 파편들은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호신막에 붙어서 그대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단순한 불길이었다면 바스라의 호신막에 그냥 사라졌을 것이지만, 이 불길은 단순한 불길이 아니었다. 백승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마(魔)를 멸하기 위해서 만든 멸마의 불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불길은 바스라의 호신막을 야금야금 갈아먹으면서 불길의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어헛!!”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바스라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 역시 보통의 악마가 아니었다.
다시금 마기를 집중하여 호신막을 크게 키운 후에 일순간 없애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금선탈각의 계책이었다.
문제는 이 불길을 그 정도 방법으로는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지능이라도 있는 거처럼 불길은 호신막이 사라지자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바스라에게 날아갔다.
금강승의 몸을 태워 만든 이 멸마의 불꽃은 멸마진 안에서라면 이동에 제한이 없었고, 마기를 추적할 수 있는 공능까지 있었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진 안에 들어온 마기를 소멸시킬 때까지는 무한정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광검에는 타격을 받는 것인지 확실히 처음보다는 크기가 줄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아챈 바스라는 몇 번이나 광검으로 불꽃을 잘라내어 그 크기를 줄여나갔다. 십수 차례의 칼질 끝에 처음에는 성인 남자 크기만 하던 불꽃은 이제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어 버렸고, 몇 차례만 더 잘라낸다면 완전히 불꽃을 없애 버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바스라는 이 불꽃만 없다면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멸마진을 파훼하고 나머지 금강승까지 해치우는 것도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콰앙!!
바스라가 어린아이 크기만 하던 불꽃을 잘라냈을 때, 이 불꽃은 처음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크윽!!”
하지만 바스라는 다시금 버텨냈다. 뜻밖의 폭발이었지만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바스라는 그런 긴급 상황에도 충분히 대처할 만한 역량이 있었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터진 불꽃은 조금 전처럼 합쳐지지도 않고 사라져 버렸기에,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바스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끝인 건가? 내가 마기 폭발까지 사용했으니 저승에 가서 자랑해도 될 것이야. 크크큭.”
그렇게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다시 마기를 집중하고 있는 바스라의 기감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조금 전 터져서 사라진 불꽃들의 기운이었다.
“이거 참 질기군. 그렇게 사라진 것이 아니었…… 허억!!”
다시 불꽃이 나타난 줄 알고 귀찮다는 듯이 말을 하던 바스라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큰 경호성으로 말을 마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엄청난 불길이 그의 사방, 아니, 상하까지 전 방위를 둘러싸고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신막을 두른 바스라는 광검으로 불길을 자르며 이곳을 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잘라내어 피한 곳에도 여전히 불길은 있었고 결국 바스라는 호신막으로 불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윽…… 이, 이 기운은…….”
직접 불길에 닿자 그제야 바스라는 이 불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멸마진 전체가 타오르며 바스라를 태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건 멸마분신이 시전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멸마진의 최후의 수단, 천마멸(天魔滅)이었다.
“으윽…… 윽…….”
천마멸의 불길은 바스라의 마기를 분쇄하며 호신막까지 태우기 시작했고, 이제 바스라는 호신막 없이 직접 몸으로 천마멸의 불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마를 멸하는 천마멸의 불길은 악마대공이라는 지고한 자리에 있는 그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타오르고 있던 멸마진, 아니, 천마멸의 중심에서 한 줄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바스라의 단말마였다. 그렇게 비명 소리가 나온 지 십수 초가 지나자 드디어 천마멸의 불길은 거두어졌다. 마기가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이었다.
실상은 강제 귀환이었지만, 어쨌든 멸마진 안에 있던 모든 마기는 사라진 상태였다.
털썩.
그리고 힘을 다 썼는지 멸마진을 유지하고 있던 흑승, 청승, 황승은 탈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은 다섯 금강승 중 두 명이 희생하여 악마대공 바스라를 잡아낸 것이었다.
짝짝짝.
그들의 전투가 끝나자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인데? 바스라가 그렇게 갈 줄이야. 마기 폭발까지 사용한 바스라를 그렇게 보내다니……. 게다가 특이한 기운이 바스라의 마핵까지도 일부 손상시켰군. 마계로 돌아가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본신의 능력 또한 조금 떨어졌겠는걸.”
의외라는 듯한 투로 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아바투르였다. 금강승들과 바스라가 전투를 하는 동안 이미 아바투르는 백무성과의 전투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아바투르가 멀쩡히 서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은 당연히 그가 조금 전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을 보여주기나 하는 듯 지금 아바투르의 앞에는 의식을 잃은 백무성이 덩그러니 쓰러져 있었다.
높은 경지에서의 전투라서 그런지 백무성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치명상으로 보이는 상처 하나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의 단전 부근에 불의 검에 지져진 듯한 상처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광검지경의 초입에 있었던 백무성과 자유로이 광검을 다루는 아바투르 사이의 격차가 생각보다 컸던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백무성은 아직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이 상태로 놓아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둘 것만 같았다. 그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그 때문에 금강승들이 바스라를 잡았음에도 전투를 지켜보던 백두일맥의 일원들과 루시페르의 잔당들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아바투르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아바투르와 상대할 사람은 저기 쓰러져 있는 백무성과 바스라를 잡은 다섯 금강승 정도였는데, 백무성은 이미 그에게 패해 버렸고, 바스라를 잡은 금강승들 역시 지금 전투 불능의 상태였다.
이제 방해자들이 어느 정도 치워진 것 같자, 아바투르는 자신의 뒤에 대기하고 있는 드레이크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자, 이제 너의 복수를 할 시간이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겠지?”
약속을 언급하는 아바투르의 시선을 느낀 드레이크는 얼른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 주군께서 이렇게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셨듯이, 저 역시 복수만 끝나면 처음 그 약속대로 주군께 제 영육을 바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시작하거라.”
“네! 주군.”
드레이크 역시 이제 홀가분한 표정으로 드미트리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 우리 사이의 문제도 모두 끝내자.”
드레이크의 자신만만한 말투에도 드미트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를 막을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백무성과 금강승들을 제외하더라도 지금 백두일맥에는 상당수의 강자들이 남아 있었다. 대각선사도 있었고, 그 외에도 마스터급의 무력을 지닌 이들도 몇 명 있었기에 이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드레이크와 한 번 해볼 만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드레이크가 아니었다. 바로 백무성을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한 아바투르가 문제였다.
백무성 정도의 능력만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남아 있는 백두일맥과 루시페르의 일원들을 다 처리할 정도였는데, 아바투르는 그런 백무성을 능가하는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다들 절망적인 표정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드미트리가 입술을 깨물더니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드레이크! 만일 내가 순순히 목숨을 내놓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보내줄 수 있나?”
드레이크는 뜻밖의 제안에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표정은 이내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크큭. 이봐 드미트리, 순진한 거야 아님 멍청한 거야. 네놈 따위의 목숨은 지금 얼마든지 내가 취할 수 있는데 그것을 지금 협상 조건으로 내민다는 것인가?”
드미트리가 말한 제안은 어느 정도 해볼 만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지금처럼 상대가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는 제안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드미트리 역시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이것까지 준다면 어떨까?”
드미트리는 품속에서 손가락 두 개 정도 굵기와 손바닥 정도 길이의 조그마한 막대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 그것은!!”
드미트리가 꺼낸 막대의 정체를 아는지 드레이크는 깜짝 놀라는 얼굴을 하였다.
“그래, 제2 대행자였던 만큼 역시 바로 알아보는군. 로드의 인장이다. 만일 다른 이들을 보내준다면 이것까지 순순히 내어주지.”
로드의 인장을 본 드레이크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인장이라니……. 저것을 흡수한다면 아바투르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음…… 아니야. 인장을 갖고 있었던 블라디미르 역시 아바투르, 아니, 바스라에게조차 이기지 못했지. 그렇다면 킹급 이상의 뱀파이어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일 텐데…… 그래도 한 번 발버둥을 쳐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어차피 복수만 한다면 난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
드레이크는 인장을 보며 잠시나마 이런저런 고민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복수심만으로 수백 년을 살아온 드레이크는 더는 세상에 미련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현장의 주재자는 드레이크가 아니라 아바투르였다. 그가 드미트리와의 약속에 따라 이곳의 잔당들을 보내준다고 해도 아바투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깨끗이 인장에 대한 욕심을 포기했다.
만일 영혼을 바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면 드레이크의 판단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현재 드레이크에게는 지금의 복수만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좋은 제안이긴 하다만은 더 이상 내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이번 복수가 끝나면 나 역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드레이크와 아바투르간의 약속을 모르는 드미트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지금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크윽…….”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드미트리에게 하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미트리! 네놈 따위가 정의로운 척하지 마라!!”
그것은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정시아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