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현세귀환록
178. 해원(4)
루시페르의 로드였던 블라디미르의 풀네임은 블라디미르 폰 카르마인이었다. 그리고 이 카르마인 혈족은 드레이크의 혈족인 디오니크 혈족과 함께 루시페르를 창건했던 두 주역 중의 하나였다.
과거 루시페르 창설 전까지만 해도 뱀파이어들은 하나로 뭉쳐진 단체가 없었고, 대부분이 혈족 단위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대의 뱀파이어들은 특유의 능력으로 자신들이 속한 인간 사회를 배후에서 조종하며 인간의 피를 취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인간 이능력자가 단체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특히, 뱀파이어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만든 뱀파이어 헌터라는 조직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뱀파이어들을 척살하며 뱀파이어들의 공포로 불리기도 하였다.
수십 개의 혈족이 이 뱀파이어 헌터에게 괴멸당하자, 뱀파이어들도 세력을 규합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세력이 약한 혈족은 세력이 강한 혈족에게 의탁하기 시작했고, 수백 개가 넘던 뱀파어어의 혈족들은 수십 개의 혈족으로 재편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머릿수가 많아진 혈족들은 적극적으로 뱀파이어 헌터들과 맞서 싸웠고, 몇몇 혈족에서는 자체적인 헌터 킬러들까지 운용하며 뱀파이어들과 헌터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뱀파이어를 아우르는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피가 포션의 재료가 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또다시 상황은 달라졌다. 그것은 뱀파이어 헌터뿐만 아니라 다른 이능력자들도 뱀파이어를 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전면으로 이능력자들이 나서기 시작하자 덩치가 커진 혈족조차도 인간 이능력자들의 연합공격에 밀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결국 상위권에 드는 혈족마저 인간 이능력자 연합에 쓰러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뱀파이어의 혈족 중 가장 큰 혈족 두 개인 카르마인 혈족과 디오니크 혈족의 주도하에 통합단체의 창설 논의가 이어졌고, 결국 두 혈족과 상위 10개 혈족이 함께하여 통합단체가 설립되었다. 그것이 바로 루시페르였다.
루시페르가 창설되며 뱀파이어들이 조직적인 대응을 하자, 인간 이능력자들의 피해가 너무 커졌고 결국 전면적인 공방은 잠정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물론 이후에도 뱀파이어의 혈액에 대한 수요는 있었기에 사냥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처럼 혈족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활동하는 뱀파이어를 공격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과거의 상황이 전면전이라면 그 정도 공방은 휴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엽적인 문제였기에, 루시페르가 등장하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게 창건된 루시페르 최초의 로드는 카르마인 혈족에서 맡았다. 이는 차기 로드는 디오니크 혈족에서 맡는다는 약정을 전제로 하여 합의된 사항이었다.
실제로 최초의 로드 이후 차기 로드는 디오니크 혈족에서 맡았고, 그 이후 세 번째는 다시 카르마인 혈족으로 넘어갔다.
문제는 네 번째 로드 선정에서 생겼다. 분명 이번 차례는 디오니크 혈족에서 맡을 차례였는데, 차기 로드 예정자인 디오니크 혈족의 장이자 혈족에서 유일한 그랜드 마스터급 뱀파이어인 자크레이가 갑작스럽게 살해당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혈족에서는, 아니, 혈족뿐만 아니라 루시페르에서도 그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랜드 마스터급 뱀파이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상대도 그 정도의 역량은 갖추어야 할 텐데, 그런 범인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결국 뱀파이어 헌터 수장의 짓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채, 조사는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디오니크의 혈족에서는 로드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져 버렸고, 결과적으로 카르마인 혈족에서 차기 로드를 선정하여 연속으로 로드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로드가 된 뱀파이어가 현재, 아니, 지금은 죽은 블라디미르였다. 그리고 당시에 죽음을 맞이하였던 디오니크 혈족의 장이 드레이크의 아버지인 자크레이였다.
자크레이의 죽음은 디오니크 혈족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랜드 마스터급인 만큼 절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능력을 갖고 있는 자크레이였는데, 로드 양위 이야기가 나올 무렵 너무 허무하게 가버렸다.
특히, 자크레이의 아들 드레이크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의 이유는 다른 디오니크 혈족의 뱀파이어들과는 달랐다.
자크레이의 죽음을 목격한 유일한 뱀파이어가 바로 드레이크였기 때문이었다.
별에 관심이 많았던 드레이크는 자크레이가 죽던 그 날도 별을 보기 위해 밤하늘을 살펴보다가 수 킬로미터 밖에서 발생한 생소한 불빛에 망원경을 돌렸다가, 아버지 자크레이의 죽음을 확인했다.
흉수는 당시 루시페르의 로드인 크라서스와 그의 아들 블라디미르였다. 둘 다 그랜드 마스터의 강자였기에 자크레이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크라서스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블라디미르가 뒤에서 치명상을 가했기에, 자크레이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후 블라디미르는 자크레이의 진혈을 채취하는 등 뱀파이어 헌터가 한 짓처럼 일을 꾸몄고, 드레이크는 멀리서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아버지 자크레이의 죽음에 드레이크는 사실을 밝히려 하였으나,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역시 100살이 넘은 뱀파이어였기에 순진하게 사실을 밝혔다가는 자신 역시 크라서스 부자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후 드레이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수련에만 집중하였고, 결국 제2 대행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블라디미르 일가에 대한 복수의 칼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미르와 그의 큰아들 빅토르까지 처리한 이상, 저 멀리 있는 드미트리만 처단한다면 이제 블라디미르의 더러운 피는 그 명맥을 끊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카르마인 혈족 자체야 많이 남아 있지만,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장의 직계만 끊어버린다면 자신의 원한을 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드레이크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루시페르의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끌고 있던 드미트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드레이크! 이 배덕자(背德者)!! 네놈이 악마를 끌어들여 우리 루시페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드레이크는 드미트리의 배덕자라는 말이 우스운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다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크크큭…… 배덕자라……. 하긴 네놈은 블라디미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있었지. 빅토르만 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무슨 소리냐!!”
“애초에 배덕자는 네놈의 부친 블라디미르였다는 말이다.”
드미트리는 드레이크의 말에 잠시 혼란을 느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하지 마라! 네놈이 배덕자이자 배신자인 것은 여기 있는 루시페르의 전 뱀파이어가 다 아는 사실이지 않느냐! 어디서 감히 로드를 욕보이려 하는 것이냐!!”
드레이크는 드미트리의 외침에 혀를 차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쯧쯧. 하긴 진실을 모르는 지금이 더 행복하겠지. 하지만 블라디미르의 유일한 핏줄인 네놈이 행복 속에서 죽어가게 할 수는 없지. 네놈은 모르겠지만…….”
드레이크는 과거 루시페르의 비사를 핵심만 풀어서 드미트리에게 설명하였다. 그 설명은 드미트리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루시페르의 뱀파이어 전체에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죽은 블라디미르였지만, 드레이크는 그의 죽음이 고결한 희생으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레이크의 이야기를 다 들은 드미트리는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며 강한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드레이크!!!”
“크크…… 지금 내가 널 속여 무얼 하겠느냐? 이제 네놈만 처리하고 나면 내 몸과 영혼은 모두 저기 아바투르 님께 바쳐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 내가 널 속이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랴?”
드레이크가 몸과 영혼을 바친다는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는 드레이크가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멍하게 있는 드미트리에게 드레이크는 자신의 애검을 빼 들고 다가섰다.
“저승에 가면 네가 직접 블라디미르에게 물어보거라!”
드레이크의 검에는 이미 붉은 강기가 덧씌워져 있었고, 지금 그의 강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루시페르 측에선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발현되는 강대한 강기의 힘에 정신을 차린 드미트리는 잠시 상황을 고민하다가 곁에 있던 수하 중 가장 높은 직급의 수하에게 텔레파시를 건넸다.
[우리가 같이 살아남기는 힘들 것 같다. 내가 피의 폭주를 사용하면 즉시 수하들은 모두 이곳에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주하라! 일정 거리를 도주하고 나면 남쪽으로 피해서 한국으로 들어가. 아직 악마들이 그곳으로 들어오지는 못한다고 하니 그곳에서 지부장들에게 연락해서 지시를 받도록 해라.]
한 곳으로 도망쳐서는 바위에 내던져진 계란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드미트리는 사방으로 흩어지도록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 있는 악마들이 강자이긴 하지만 10명에 불과하기에 사방으로 흩어진다면 삼백여 명이 남는 루시페르의 뱀파이어들 중 누군가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드미트리가 피의 폭주를 시전하려고 할 때, 전장의 남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어라!!!”
아직 남쪽에서는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은 강렬하게 드러났다. 아마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그런 존재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 전장에 도착했는데, 그 선두에는 흰색 도포를 입은 백무성이 서 있었다.
드미트리와 루시페르의 잔당에게 마지막 희망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과거 루시페르를 방문했던 백무성을 알고 있었기에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백 가주님!! 드디어 오셨군요!!”
“허어……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이것밖에 남지 못한 것이오? 3 대행자 탈로스와 4 대행자 예카테리나는 어찌 되었소?”
“그것이…….”
백무성은 드미트리의 표정만 보아도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연락한 탈로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무슨 상황인 줄 알겠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오. 어쨌든 이제는 안심하시오. 여기는 우리가 맡겠소.”
백무성이 맡는다는 이야기에 드레이크 뒤쪽에 있던 바스라가 입을 열었다.
“백 가주라 했던가? 그간 잘 지내셨소?”
“이 기운은……. 그렇군. 그때 도망갔던 악마 놈이군.”
전에 만났던 바스라는 마계에서 몸을 투영하여 이곳에 몸을 구성한 상태였기 때문에, 키로스탄의 몸을 입은 지금과 외모가 달랐다.
하지만 백무성은 그 속에 있는 기운을 읽어내고 바스라가 당시의 그 악마임을 알 수 있었다.
“허허. 도망이라니. 그때는…… 뭐 작전상 후퇴 정도로 해둡시다.”
“그게 도망이지 않나? 그래, 이번에도 도망칠 생각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