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현세귀환록
177. 해원(3)
그런 파루스의 안하무인에 가까운 모습에도 탈로스를 비롯한 루시페르의 지도부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투에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그런 행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파루스가 그런 행동을 하여 시간을 끌어주었기 때문에, 탈로스는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다소 몸을 추스린 탈로스는 고개를 들어 그의 옆에 있는 여성 뱀파이어를 잠시 바라보았다.
우아하다는 말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의 여성 뱀파이어는 계속되는 전투와 도주로 인해 다른 뱀파이어들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지쳐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태생적인 우아한 모습은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바래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탈로스가 자신을 바라보는지도 모르는 채 이제 다시 시작될 전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탈로스가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예카테리나, 아무래도 나는 여기까진 것 같소.]
탈로스의 갑작스러운 텔레파시에 예카테리나라 불린 여성 뱀파이어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에게 답을 하였다.
[탈로스! 무슨 소리예요!]
[로드께서 행한 일을 이제 나도 해야 한다는 소리요. 지금 상황에서 우리 루시페르를 존속시키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소.]
로드가 한 일이라면 얼마 전 악마들의 대침공 때 블라디미르가 했던 피의 폭주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피의 폭주의 대가는 곧 죽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예카테리나는 떨리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안 돼요, 탈로스! 차라리 여기서 모두 피의 격노를 사용해서 승부를 내 보아요! 그리고 이미 백두일맥에 연락을 했잖아요. 조금만 버티면 백두일맥에서 구조대가 올 거예요!]
[휴…… 이미 피의 격노를 사용한 수하들이 절반이 넘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것을 사용한다면 그 후유증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기조차 힘들 것이오. 또한 백두일맥을 기다리다 탈출 시기를 놓쳐, 대부분의 수하가 죽는다면 그것 또한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오.]
[그렇지만…….]
[리나.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이 방법만이 수하들을 최대한 많이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오.]
탈로스의 그 말에 이를 악문 예카테리나는 대답조차 못 하고 부릅뜬 두 눈에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탈로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리나, 지난 200년간 고마웠소. 당신이 없었다면 난 결코 대행자의 자리에도, 듀크급의 뱀파이어도 되지 못했을 것이오. 그리고…… 이렇게 먼저 가서 미안하오…….]
제3 대행자인 탈로스와 제4 대행자인 예카테리나는 이미 200년 전에 부부의 연을 맺은 사이였다. 그렇게 2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큰 다툼 하나 없이 늘 한결같은 모습의 부부였기에 그 슬픔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탈로스의 말처럼 지금 루시페르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너무 좁았다.
[……탈로스…….]
그런 상황을 알고 있는 예카테리나는 탈로스의 이름을 읊조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예카테리나와의 텔레파시를 끝낸 탈로스는 그녀의 반대쪽에 있는 미청년 드미트리에게도 말을 건넸다.
[드미트리. 나는 이제 로드처럼 피의 폭주를 사용할 생각이다.]
[3 대행자님!!]
[놀랄 것 없다. 어차피 우리 루시페르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방법이니. 어쨌든 내가 피의 폭주를 사용하고 나면 너는 예카테리나와 함께 살아남은 수하들을 이끌고 어서 빨리 남하하거라! 운이 좋다면 이곳으로 오는 백두일맥과 만날 수도 있겠지.]
[차라리 백두일맥을 기다리시는 것이…….]
드미트리 역시 예카테리나와 같은 말을 하였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에게 말한 것처럼 악마들이 얼마의 시간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같은 말로 드미트리를 설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피의 폭주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일단 한국의 영토로 들어가면 악마들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그곳에서 루시페르의 지부를 규합하여 반드시 우리 루시페르를 재건해야 할 것이야!]
탈로스의 죽음을 각오한 결의를 드미트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막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드미트리는 눈물 젖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에게 할 말을 모두 한 탈로스는 잠시 몸속을 관조하더니 이미 끓어오를 대로 끓어오른 진혈을 한 번 더 자극하였다.
마나가 이미 끓어오른 진혈을 자극하면서 진혈은 끓는 것을 넘어 스스로 타기 시작하였고, 이내 탈로스에게 엄청난 힘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 힘의 발현이 상당한 고통을 수반하는지 악물린 탈로스의 입에서 약간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으…… 으윽…….”
아직도 벨리카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던 파루스는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마나에 놀라 전면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몸 전체가 붉게 변한 탈로스가 자신의 롱소드를 들고 강대한 기파를 내뿜고 있었다.
아직 그랜드 마스터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이미 마스터의 경지에서는 극에 달해 있는 탈로스였기에 피의 폭주를 시전한 지금 그의 상태는 초입의 그랜드 마스터와도 해볼 만한 상태였다.
“뭐냐? 호오. 그래도 숨겨진 한 수가 있다는 것이었군.”
벨리카를 잠시 뒤로 물린 파루스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휘휘 저으며 전투준비 자세를 취하였다.
성적인 쾌락에 눈을 뜨긴 하였지만, 마룡족 출신답게 파루스에게는 여전히 전투가 가장 큰 쾌락을 주는 일이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파루스를 보조하고 있던 백작급의 악마들도 파루스가 자세를 잡자 다시 전투준비를 하였다.
그 순간 탈로스의 옆에서 더 큰 기파가 터져 나오더니 지옥의 염화(炎火)와도 같은 불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타남과 동시에 순식간에 파루스에게 날아간 불길은 그에게 직격하며 터져나갔다.
콰아앙-!
그건 바로 탈로스의 옆에 있던 예카테리나가 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상황에 탈로스는 황망해하며 그녀에게 외쳤다.
“리나!! 이게 무슨 짓이오! 그리고 피의 폭주라니!! 어서 그만두고 드리트리를 데리고 이곳을 피하시오!”
탈로스가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녀가 이렇게 나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 역시 피의 폭주를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예카테리나는 탈로스의 외침에도 단호한 말투로 그에게 대답했다.
“어차피 당신이 없으면 난 살 수 없어요! 저놈을 잡고 우리 같이 저승으로 가요! 그리고 지금 폭주를 중단해 봤자 그 후유증으로 짐만 될 뿐이에요!”
여기까지 말한 예카테리나는 이번에는 드미트리를 향해 외쳤다.
“드미트리! 너는 어서 수하들을 끌고 남하하거라!”
예카테리나가 참전한 것을 확인한 드미트리 역시 같이 전투에 뛰어들려고 하였으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수하를 본 드미트리는 입술을 깨물더니 수하들에게 외쳤다.
“3, 4 대행자님들의 희생을 허투루 만들지 마라! 나를 따르라!!”
이미 나이가 지긋한 몇몇 뱀파이어들은 탈로스와 예카테리나와 함께 악마군과 맞섰으나 상당수의 뱀파이어들은 드미트리를 따라 빠르게 전장을 이탈하였다.
* * *
한참을 달려가는 드미트리의 등 뒤로 거센 마나 충돌의 여파가 느껴졌으나 드미트리는 눈물을 꾹 참으며 빠르게 남쪽을 향해서 달려나갔다.
그러나 탈로스와 예카테리나의 희생에도 드미트리는 전장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십여 명의 악마가 이미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리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있는 뱀파이어였기에 보통의 악마라면 그냥 베고 지나갔을 것이지만, 지금 앞에 있는 악마들은 보통의 악마들이 아니었다. 바로 아바투르를 필두로 한 바스라 그리고 드레이크와 그 수행 악마들이었다.
악마들 역시 한국 땅으로 가면 그들이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완전히 루시페르를 끝내기 위해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파루스 녀석, 결국 여기까지 뱀파이어들을 보내는군요. 숙주까지 입은 몸이라면 충분히 혼자서 상대할 만할 텐데 말입니다.”
바스라의 말에 아바투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너 역시 지금 숙주의 몸에 적응하려면 좀 더 움직여봐야 하지 않겠나? 그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아바투르의 말처럼 지금 바스라 역시 과거 벨리알의 뱀파이어였던 키로스탄의 몸을 숙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군 말처럼 적응해야 하긴 하지만, 지금 저놈들로는 부족하지요. 얼마 전 러시아에서 해치운 이놈들의 로드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된 적응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녀석. 그때 그놈이 마지막에 생명을 태우면서 냈던 힘에 당황했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아바투르의 지적에 바스라는 약간 쑥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이놈들을 처리하며 적응도나 올려 보아라. 이 녀석들만 처리하고 나면 한국이란 나라에 펼쳐진 결계를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그렇게 광범위한 영역에 펼쳐진 결계는 천계에서도 보기 힘들 것인데 말이야.”
“네, 주군!”
그렇게 아바투르와 바스라가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 있던 드레이크가 부복하며 아바투르에게 말을 건넸다. 이미 아바투르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드레이크는 무릎을 꿇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주군, 저놈들 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저 뱀파이어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드레이크가 가리키는 자는 바로 루시페르의 마지막 대행자인 드미트리였다.
“호. 저 녀석과도 은원이 있었던 것이냐?”
“네. 저자가 로드인 블라디미르의 또 다른 아들이지요. 그리고 그의 마지막 핏줄이기도 합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저자가 마지막이라는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저자만 처리한다면 제 몸과 영혼은 모두 주군께 바치겠습니다. 제 몸을 다른 분의 숙주로 사용한다 해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드레이크가 아바투르의 수하로 들어간 이후 그에게 요청한 유일한 것이 루시페르의 괴멸과 블라디미르 일가의 척살이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계약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아바투르를 설득했다.
영혼을 준다는 것은 단지 몸을 주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윤회의 가능성을 모두 버리고 영원히 계약한 악마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몸과 영혼을 모두 획득할 수 있다면 단지 몸만 숙주로 삼는 것보다 월등히 높은 효율로 숙주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아바투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아바투르가 사용하는 이형태의 경우는 악기에 영혼이 잠식당해서 영혼 자체가 변질되어 버린 상황이라 영혼의 힘을 쓰기 힘든 상황이었다.
물론 그 몸과 영혼을 장악한 악기 때문에 일반적인 숙주에 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마기를 끌어올 수 있었지만, 만일 이형태가 그 악기를 유지하며 자발적으로 영혼을 바쳤다면 지금보다도 더 많은 마기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드레이크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악기는 이형태를 훨씬 능가하였다.
따라서 만일 드레이크의 몸과 영혼을 받아서 오롯이 이용할 수 있다면, 지금 이형태의 몸으로 사용할 때보다도 더 많은 마기를 마계에서 가져올 수 있을 것이었다.
마계에서의 능력에 비교해보면 그때의 7할 가까이 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여 아바투르는 드레이크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루시페르를 제1의 타깃으로 삼아 지금껏 공격해 왔었다.
“마지막이라…… 그래 마지막인 만큼 네가 마무리해야겠지. 바스라, 적응도는 다음에 올려야겠다.”
바스라 역시 아바투르와 드레이크 사이의 계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뒤로 물러나 드레이크에게 기회를 주었다.
아바투르의 허락을 받고 전면에 나온 드레이크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복수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제 곧 블라디미르 일가를 지구 상에서 모두 지워 버리겠습니다……. 제 영혼마저 악마에게 바쳤기에 저승에서도 뵐 수 없겠지만. 이제 우리 일족의 원한을 풀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