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세귀환록-176화 (176/203)

# 176

현세귀환록

176. 해원(2)

말을 마친 유리엘은 눈을 감고 잠시 집중을 하였다. 현재 마나 위성의 통제권을 제니아에게 넘긴 상태이지만, 유리엘은 여전히 마나 위성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

통제권은 한 명에게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통제권의 등급은 당연히 마나 위성의 제작자인 유리엘이 더 높았기에 설령 제니아가 마나위성을 운용 중이라 하더라도 유리엘의 명령에 따라 마나 위성은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 분여의 시간이 지나자 감겨 있던 유리엘의 눈이 떠지며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흥미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려 주듯이 재미있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의 그런 분위기를 알아챈 강민이 유리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서요. 재미있네요. 호호호.”

“공교롭다니, 뭐가?”

강민의 물음에 유리엘은 친절히 스크린까지 띄우면서 설명을 해주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에서 지금 한국으로 남하한다는 루시페르 녀석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에 결국 악마들에게 따라잡혀서 전투가 벌어졌어요. 저기 보이죠?”

“그렇군. 음. 그럼 일을 한 번에 처리하려면 시아까지 데리고 가야겠네.”

어차피 악마들을 처리하고 나면 루시페르의 제5 대행자 드미트리와 정시아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기에 강민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리엘이 재미있다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잠시 스크린을 조작하여 다른 곳의 화면을 보여주며 유리엘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또 뭐가 있어?”

“저기 봐요. 루시페르에서 백두일맥에 연락해서 그런지, 아니면 자기들 영역에서 싸움이 벌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백두일맥에서 루시페르와 악마들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어요. 아까 속도를 보면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것 같아요.”

지금 악마들이나 루시페르의 뱀파이어들이나 다들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라 그런지 대부분 추적을 방해하는 마나 파장을 뿌리고 다니는 상태였다.

그래서 세부 스캔으로는 실시간 추적이 가능하지만 세부 스캔을 끝낸 지금의 마나 위성의 상태로는 실시간 추적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유리엘은 도착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유리엘의 말을 들은 강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반문하였다.

“루시페르에서 단독으로 악마들과 싸운다면 얼마 전 본부에서 쫓겨난 전력이 있으니 당연히 밀릴 테지만, 백두일맥에서 돕는다면 그리 일방적이지는 않겠는데?”

“그렇죠. 백두일맥에는 광검지경인 백무성이 있으니 쉽게 밀리지는 않을 거예요.”

얼마 전 강민에게 두드려 맞으며 심마를 제거한 백무성이 최근에 제대로 된 광검지경에 올랐다는 것을 강민과 유리엘은 알고 있었다.

혹시 또 같은 심마에 빠질까 봐 강민이 약간의 잔류 마나를 남겨 놓았었는데, 그것이 광검지경에 다시 오르면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악마 군주와의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단숨에 척살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유리엘이 스크린에 띄운 화면을 이리저리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가고 있을 때, 강민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리엘에게 물었다.

“아. 악마들의 군주는 누군지 확인했어?”

“그걸 확인하려 한 거니 당연히 그것부터 찾아봤죠. 보니까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았던데, 여기서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요.”

“이거 스무고개 퀴즈를 하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재미난 점이 나오는구만.”

“호호호. 이게 마지막일 거예요. 저기 봐요, 악마들의 군주가 숙주로 삼은 인간이 바로 이형태예요.”

유리엘은 스크린의 한 부분을 확대해서 강민에게 보여주었는데, 강민은 그 얼굴을 보고 누군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허…… 저기 저 녀석은……. 설마 그때 그놈이야?”

이형태는 흔한 성에 그리 특이할 것 없는 이름이었지만, 강민과 유리엘이 아는 이형태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스크린에 나오는 얼굴 또한 그 기억과 동일했다.

바로 과거 무명 연예인을 성폭행하려 했던 폭력조직 일광회의 두목 이일광의 아들 이형태였다.

“허…… 그때 보았을 때는 악마 군주가 들어갈 정도의 제물이 될 녀석은 아니었는데…….”

이미 무수한 경험을 통해서 강민은 악마들의 제물이 될 만한 물질계의 생명체들에 대한 특성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형태의 상태는 강민이 아는 조건에 들어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 그 조건을 충족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 민이 시전한 금고아의 술법이 영향을 준 것이겠죠. 근본부터 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녀석이 악한 생각을 품을 때마다 고통을 받는다고 그 생각을 하지 않을 리가 없지요. 아마 복수심과 함께 점점 더 악한 생각을 품다가 그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아요.”

“그랬다면 그 악기가 골수, 아니, 영혼까지 장악했겠군. 그래야 악마 군주가 들어갈 정도의 제물이 될 수 있겠지.”

여기까지 말한 강민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번 악마의 창궐 중 일부분은 내 책임이라 할 수도 있겠군.”

악마의 창궐을 웜홀 폭주를 대비한 훈련 정도로 생각하긴 하였지만, 지금까지 인세에 끼친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지금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행을 제한하고 있었고, 계엄을 선포한 나라도 상당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능력자들이 충분하지 않은 몇몇 소국에서는 스스로 방어할 상황이 되지 않았기에 아예 유니온에 완전히 기대고 있는 나라조차 생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 따지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의 예방주사가 없었으면 나중에 웜홀이 폭주하면 피해는 더 클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하지.”

“어쨌거나 민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제 결자해지를 하러 가 볼까요? 호호호.”

악마 군주가 이형태임을 몰랐을 때도 처리하려 하였는데, 일말의 책임감까지 느끼는 지금은 더욱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래, 가는 길에 애들도 데리고 가지. 시아야 옛일을 해결해야 할 것이고. 강훈이나 엘리아도 최근 수련에 열심이던데,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자고.”

“그래요. 음. 지금 애들은 중국에 있네요. 그리로 가서 데려가죠, 뭐. 그럼 가 볼까요?”

유리엘의 말에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엘은 언제나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딱!

* * *

백두산 인근 산자락에서는 수백 명 간의 대규모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루시페르와 아바투르가 이끄는 악마들 사이의 전투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는 꽤나 시간이 지났는지 전장에서는 이미 전술이나 대형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모두가 뒤섞인 마구잡이식의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채앵- 챙!

“죽어라!!”

“아악!!”

한 곳에서는 검과 검이 맞대어지며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각종 마법이 난무하며 많은 생명을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지금도 전장의 한구석에서 거의 일 미터 규모의 불덩이가 떠오르더니 악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휘이이잉!

“모두 피해라!”

“안 돼!!!”

쿠아앙!!

“으아악!!

“커헉…….”

불덩이 공격은 수많은 악마의 비명을 자아내며 악마들을 강제귀환시켰지만, 아직도 수많은 악마가 남아 있었고 그 숫자는 루시페르의 몇 배 이상은 되어 보였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부딪히는 소리, 깨지는 소리, 터지는 소리가 나며 수백 명의 인원이 얽혀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모두가 부릅뜬 눈으로 생사를 도외시한 공격을 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전장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흉험함은 다른 모든 전장을 합친 것보다도 더 심각하였다.

하지만 그 전투는 이미 막바지에 다다른 듯 보였다. 어느 정도 승패가 갈린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흐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군.”

나라크의 몸을 입은 파루스가 2미터가 넘는 대검을 어깨에 척 걸치며 탈로스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미 오른쪽 팔이 날아가 버린 탈로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나머지 팔로 바닥을 지탱하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탈로스를 비웃기나 하는 듯, 이레인의 얼굴을 한 또 다른 악마가 입을 열었다.

“호호호, 제대로 된 숙주를 얻은 파루스 님은 역시 대단하시네요. 저 뱀파이어도 나름 한 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손쉽게 처리하시는군요.”

“역시 물질계에서 움직이려면 물질계 놈들의 몸을 입는 것이 가장 좋지. 어떠냐? 지금 네가 입은 몸도 악기는 좀 부족하지만 드물게 내구력이 좋은 여성체 아니냐. 확실히 낫지 않느냐?”

이레인 역시 마스터에 도달한 뱀파이어였기에 내구력은 평범한 뱀파이어에 비해서 월등히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레인의 몸을 입은 악마는 왠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파루스에게 말을 건넸다.

“네, 그렇지요. 그런데 듣기로는 지금 이 몸이 케일라 후작님께서 노리던 몸이라 들었는데…….”

케일라에 비해 하위 작위인 여자 악마는 그것이 두려웠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는데, 파루스는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크크큭, 그랬었지. 하지만 뭐 어떠냐? 이제 케일라 그 멍청한 년이 강제 귀환되어 버렸는데.”

“하지만, 돌아간다면…….”

“겁먹을 것 없다, 벨리카. 어차피 강제귀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면 최소 십 년은 걸릴 것이니까. 하하하하.”

자의로 돌아간 악마라면 모를까, 강제 귀환된 악마는 그 후유증이 상당했다. 마계로 귀환하는 준비과정 없이 갑자기 마계로 귀환되어 버렸기 때문에 파루스의 말처럼 마기를 안정화시키는 것에만 최소 십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더군다나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사스투스처럼 마핵마저 상해 버린다면, 마계로 귀환한 뒤 과거의 경지마저 찾기 힘든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벨리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악한 벨리카는 케일라보다는 약간 윗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파루스에게 자신의 안전을 확인받고 싶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었다.

자작 정도에 불과한 벨리카의 능력으로는 케일라가 후유증에 시달린다 하더라도 감히 케일라에게 대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벨리카의 기색을 읽었는지, 아니나 다를까 파루스는 한마디 말을 더 덧붙였다.

“뭐 만약 케일라 년이 너한테 해코지를 한다면 내가 막아주지. 네년의 기술이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군. 나중에 마계로 돌아가서도 내 휘하로 오너라. 흐흐흐.”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뱉은 파루스는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던 벨리카의 가슴을 이리저리 주물렀고, 이미 십수 번 이상 몸을 섞은 벨리카 역시 그게 싫지 않은지 적극적으로 파루스에게 몸을 맡기며 그에게 안겼다.

후작위의 파루스는 휘하에 자신의 정욕을 받아주는 많은 악마가 있었지만, 그 스스로가 마룡족인 만큼 대부분 마룡족 여성체 악마였다.

그리고 애초에 전투 종족인 마룡족은 성적인 관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살육과 파괴에서 쾌락을 느끼기에 사실 파루스는 성적인 부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뱀파이어의 몸을 갖고 같은 뱀파이어인 벨리카와 몸을 섞어보니 육체관계에서 오는 쾌감이라는 것은 파괴와 살육에서 오는 쾌감과는 또 다른 차원의 쾌감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이렇게 새로운 쾌감에 눈뜬 파루스는 나중에 마계로 돌아가서도 적극적으로 인간형의 마족을 수집하여 이 쾌감을 즐길 계획이었다.

파루스 정도의 능력자라면 신체 변환에 자유로웠기 때문에 굳이 인간이나 뱀파이어의 몸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이렇게 쾌락을 주는 벨리카는 나중에 마계로 귀환하면 가장 먼저 자신의 하렘에 넣을 생각이었고, 허무하게 강제 귀환되어 버린 케일라 따위에게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도록 놓아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벨리카 역시 그런 것을 목적으로 파루스에게 접근했기에 둘의 욕망이 맞아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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