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현세귀환록
175. 해원(1)
띠리리리- 띠리리리-
테이블에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던 벤자민은 휴대전화의 벨소리에 자신의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 액정의 화면에는 탈로스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연락처는 알고 있지만 평소 교류가 없던 탈로스의 연락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벤자민은 통화 승인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탈로스 님. 무슨 일입니까?”
-벤자민 총재. 우리 루시페르에서 공식적으로 유니온의 도움을 원하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위원회가 있었으면 위원회에 요청했을 것이나, 지금은 위원회가 없으니 유니온에 요청을 하는 것이오.
“……요청은 알겠는데, 그 사유가 무엇입니까?”
사유를 물어보는 벤자민의 말에 탈로스는 이를 악무는 소리와 함께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말을 한다는 느낌으로 벤자민에게 대답했다.
-루시페르의 본부가 벨리알, 아니, 악마들에게 넘어갔소!
“네? 본부가 넘어가다니…… 그리고 지금 벨리알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악마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약간 모호한 듯한 탈로스의 말에 벤자민은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한 번 더 물었다.
-악마들이 벨리알 소속 뱀파이어들의 몸을 빼앗아 갔소. 벨리알의 로드였던 드레이크만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고, 나머지 뱀파이어들은 뱀파이어가 아니라 악마들이었소!
“그…… 그런…… 아. 그럼 로드이신 블라디미르 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벤자민은 물어보면서도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만일 블라디미르가 건재했다면 제3 대행자인 탈로스가 연락할 것이 아니라 블라디미르가 직접 연락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악마들의 우두머리에게 당하고 말았소. 돌아가시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본부에 있던 나머지 뱀파이어들을 살리기 위해서 피의 폭주를 시전하셨으니 지금쯤은 아마…….
피의 폭주는 경지에 오른 뱀파이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피의 격노가 진혈을 각성시켜 일정 시간 동안 자신의 능력을 능가하는 힘을 보이는 방법이라면, 피의 폭주는 진혈을 태워서 그 진혈이 타는 동안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방법이었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만큼 당연히 그 페널티는 더욱 컸다. 피의 격노가 각성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 기간에 따라서 일정 시간 요양을 해야 하는 것에 비해, 피의 폭주는 폭주 시간이 끝나고 나면 진혈이 다 타버려서 시전자는 생명을 잃게 된다. 그건 즉, 목숨을 걸고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 탈로스는 블라디미르의 죽음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하긴, 블라디미르 님이 계셨다면 탈로스 님께서 연락할 리가 없겠지요……. 그럼 지금 새로운 로드는 탈로스 님이 되신 것입니까?”
-지금 로드를 추대할 상황은 아니지 않소. 다만, 제3 대행자로서 지금 루시페르에서는 내가 가장 높은 서열이다 보니 내가 이렇게 나서게 되었소.
루시페르에는 제1 대행자부터 제5 대행자까지의 다섯 대행자가 있었다. 하지만 1, 2 대행자는 블라디미르의 정책에 반하여 루시페르를 떠난 상태였고, 이후 그들이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지금까지 1, 2 대행자의 자리를 채우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일단 모스크바에서 남하하여 악마들로부터 자유롭다고 알려진 한국 쪽으로 가고 있소. 그곳에 도착한 이후 각 지부에 있던 인원들을 불러 모아 향후 대책을 논의하려 하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탈로스에게 물었다.
“아. 혹시 벨리알의 드레이크가 제2 대행자로 복귀를 주장하며 루시페르 지부의 규합을 꾀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루시페르를 떠났던 제1 대행자가 벨리알을 창설한 빅토르였고, 제2 대행자가 빅토르를 먹어 삼키고 다시 벨리알의 로드 자리에 오른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가 빅토르를 종속자로 만든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루시페르의 1, 2 대행자가 루시페르를 떠났다는 사실은 꽤나 유명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떠난 빅토르는 루시페르의 로드인 블라디미르의 아들이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 컸었다.
이후, 빅토르는 자신들을 따르는 뱀파이어들을 모아서 벨리알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카오틱에빌로서 활동한 반면, 드레이크는 몇 년 전 벨리알을 집어삼킬 때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었다.
-그럴 리는 없소. 드레이크가 악마 쪽에 붙은 것을 목격한 자가 한둘이 아니니 말이오. 그리고 블라디미르 님 앞에서 드레이크 스스로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고 직접 말을 한 사항이니 그 스스로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군.
“흐음…… 혹시 빅토르의 소식은 들은 바가 없습니까?”
-……벨리알에서 도망쳤던 뱀파이어의 말에 따르면 악마들의 우두머리에게 죽었다고 하는군. 그 사실을 들은 블라디미르 님께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악마들이 들이닥쳤었소. 만일 블라디미르 님만 온전한 상태였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벨리알 소속 뱀파이어 모두가 악마들의 숙주가 된 것은 아니었다. 숙주로 쓸 만한 악기가 없는 뱀파이어들도 제법 있었고, 그 전란 중에 도망친 뱀파이어들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정보가 루시페르까지 전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블라디미르는 열세의 상황에서도 후퇴하려 하지 않고 결사 항전하려다가 피해를 키운 측면이 있었다.
“우선 알겠습니다. 내부 검토 후 빠른 시간 안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기다리겠소.
과거 위원회의 고위층에 속했던 자들은 지금 유니온이 퍼니셔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벤자민이 유니온의 총재이긴 하지만 큰 사안은 그 혼자 판단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퍼니셔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탈로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벤자민의 결정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탈로스와 전화를 끊은 벤자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강하던 루시페르가 무너졌다고? 악마들의 힘이 생각보다 큰 것 같군. 아무리 제니아 시스템의 퀘스트로 능력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한다고 해도 루시페르가 무너질 정도면 강민 님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 여쭤봐야겠군.’
어차피 지시를 받아야 하는 벤자민은 그만 생각을 정리하고 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강민이 벤자민과의 통화를 끝내자, 옆에 있던 유리엘이 강민에게 물었다. 당연히 그녀는 벤자민의 목소리 또한 다 들었기 때문에 통화의 내용은 잘 알고 있었다.
“민, 어떻게 하려고 해요?”
“음…… 이렇게 되면 이제는 처리하는 것이 맞겠지. 더 놔뒀다가는 예행연습으로 보기엔 피해가 너무 커질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얼마 전 제니아가 상급의 악마들이 악마 탐지기에 잡히지 않는다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가 보네요.”
몇 주 전 정기보고에서 제니아는 악마 탐지기로 파악했던 악마들 중 A급 이상 악마들의 상당수가 탐지기에서 사라졌다는 보고를 했었다.
악마 탐지기는 악마들의 마기로 탐색을 하는 것이라, 숙주를 얻어서 인간이나 뱀파이어 같은 이 세계에서 태어난 생명체의 몸에 들어가게 되면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보고로는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악마들이 탐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 큰 문제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악마들은 악마 탐지기에 그 위치와 등급 정도가 낱낱이 파악되어, 이능력자들은 자신의 등급에 맞는 악마를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을 얻은 악마들은 이 탐지기에 걸리지 않아서 인간들은 악마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나서 피해를 주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지금이야 루시페르를 목표로 한 드레이크의 요청 때문에 루시페르부터 쳤지만, 이제 루시페르를 해결한 이상 무차별적으로 인간 세상에 대한 공격이 들어올 것이었다. 따라서 이 악마들을 빨리 처리하지 않는다면 인간 세상의 혼란과 피해는 더욱더 가중될 것이 자명하였다.
“그렇군. 악마들을 찾으려면 전에 말한 세부 스캔을 해야 하지? 제니아 시스템을 멈춰야 하는 건가?”
“일단 카르마 시스템은 놔두고 다르마 시스템만 잠시 중지시켜서 세부 스캔을 한 번 돌릴게요.”
“음? 전면 중단해야 하는 것 아녔어?”
저번에 물어보았을 때는 제니아 시스템 전부를 잠시 멈추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유리엘은 일부 중단만으로도 세부 스캔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충전이 된 상태니 마나 소모가 큰 다르마 시스템만 한 달간 중지한다면 지구 전역을 대상으로 한 번 정도는 세부 스캔이 가능할 것 같아요. 아직 실시간 세부 스캔까지는 무리겠지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아요.”
“어차피 핵심 악마들만 잡으면 될 일이니까. 밑에 녀석들이야 이 세계의 인간으로도 충분하겠지.”
“아, 그런데 루시페르는 어쩔 거예요?”
벤자민의 말에 따르면 루시페르의 잔당들은 일단 한국을 목표로 남하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초인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속도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지역까지는 도착할 것이었다.
“어차피 악마들은 처리하려 했으니, 그놈들은 루시페르와 관계없이 처리하면 될 것인데…….”
루시페르가 도와 달라는 것은 자신들의 성지에서 악마들을 몰아내는 것을 도와 달라는 것이기에 악마들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요청에 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리엘이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죠. 악마들은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아에게도 묵은 원한을 해결할 기회를 주는 게 어때요?”
정시아는 루시페르와 오래된 원한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루시페르의 제5 대행자인 드미트리와 정시아가 구원이 있는 것이었다.
과거 정시아가 강민의 식솔이 되었을 때 강민은 정시아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제안을 했었는데, 그때 정시아의 대답은 자신이 능력을 길러 해결하겠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B급 능력자밖에 되지 않아서 원한을 해결한 능력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녀 역시 마스터가 된 상황이었다. 이제는 그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었다.
그녀 역시 그런 것을 느끼고 있는지 마스터가 되고, 제니아 시스템이 도입된 뒤로 과거보다 훨씬 더 열심히 수련에 임하고 있는 중이었다.
“흐음…… 그런데 그 드미트리라는 자는 마스터가 된 지 수십 년은 되었을 것인데, 시아가 가능할까? 괜히 좌절감만 더 주는 거 아닐까?”
어차피 생존 마법기를 지급하였기에 목숨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고된 노력의 끝이 또 실패로 끝난다면 그녀는 실의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다.
“호호호. 민도 이제 시아를 많이 아끼나 봐요. 그런 생각까지 해주다니 말이에요.”
“아. 뭐…….”
강민이 그답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을 짓자 유리엘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좌절감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야 성장이 있겠죠. 얼마 안 있으면 웜홀의 대폭주가 일어날 텐데 미리미리 단련해둬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 그래, 일단 악마들을 처리하고 나면 시아를 드미트리인가 하는 녀석과 대면시켜 주자.”
“그래요. 그럼 세부 스캔을 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