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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귀환록-174화 (174/203)
  • # 174

    현세귀환록

    174. 확전(5)

    아바투르의 등장이었다. 아바투르는 바스라와 함께 라이트 소더를 찾으러 갔었지만, 그자가 이미 흔적을 지운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추적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이곳으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부하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케일라가 강제 귀환되는 것을 느낀 아바투르는 공간 이동까지 펼치며 서둘러 날아온 상태였다.

    “다, 당신은…….”

    전장을 장악하기 위해서 아바투르는 자신의 능력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대함에 지금껏 자신만만했던 드레이크는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호오. 네놈의 악기(惡氣)도 보통이 아닌데?”

    지금 아바투르는 드레이크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몸 전체에 서린 악기의 질만을 놓고 보면 골수까지 악기로 물든 이형태의 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드레이크는 그랜드 마스터의 강자였다.

    즉, 그의 몸은 이형태의 몸보다 훨씬 높은 내구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악기의 질은 약간 떨어졌지만 그 양은 이형태를 능가했기에, 아바투르는 지금의 몸과 드레이크의 몸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바투르는 결국 지금의 몸을 선택했다. 드레이크의 몸으로 옮겨간다면 내구력은 좋아지겠지만, 악기의 질이 지금보다 떨어지기에 동조화율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마기의 세밀한 컨트롤을 즐기는 아바투르에게는 내구도보다는 동조화율이 더 중요하기에 결국 이형태의 몸을 선택한 것이었다.

    고민하던 아바투르의 생각도 모르는 채, 옆에 있던 바스라는 기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호오. 주군 말대로 저 녀석의 악기는 상당하군요.”

    아바투르를 제외한다면 단연 자신이 가장 높은 서열이기 때문에 바스라는 당연히 자신이 드레이크의 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김칫국을 마신 것이긴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바투르가 드레이크의 몸을 포기한 상태이기에 그가 생각한 대로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긴 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이나 잘빠진 자동차를 보는 듯한 둘의 시선에 드레이크는 불쾌감이 들었지만, 아바투르의 기세에 눌린 드레이크는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 시선에서 상황에 대한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분명 이곳의 인간인데…… 그렇다면 몸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군.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눈빛을 보이는 것이겠지…….’

    이로써 드레이크는 악마들의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악마들은 전투의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뱀파이어들의 목숨을 붙여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아바투르를 보기 전까지는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제야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였는지 이해가 갔다.

    ‘결국 다른 놈들도 우리의 몸을 빼앗으러 온 것이군.’

    드레이크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빅토르는 아직까지 파루스와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파루스는 아바투르의 등장에 전투를 멈추려고 하였으나, 이지가 분명하지 않는 빅토르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사실 아바투르가 전장 전체를 장악한 상황이라 모든 전투가 멈춰진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빅토르와 파루스만이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빅토르를 바라보던 바스라가 아바투르에게 말을 건넸다.

    “주군. 그랜드 마스터급의 인물이 저렇게 노예가 되어버리다니, 이곳의 흑마법도 무시하지는 못하겠군요.

    “저건 흑마법이라기보다는 기물(奇物)에 의한 섭혼에 가깝군. 섭혼의 끈이 저놈에게 이어져 있어.”

    아바투르는 드레이크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 노예는 경지는 높으나 악기가 별로 없어 숙주로 쓰긴 힘들 것 같은데 어쩌시겠습니까?”

    “처리해야겠지.”

    말을 마친 아바투르는 빅토르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쿠아앙~!

    굉음과 함께 빅토르가 서 있던 자리는 움푹 파여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상처투성이의 빅토르가 자신의 검을 지팡이 삼아 버티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빅토르는 전신의 마나를 뿜어내며 호신막을 펼쳐 간신히 버텨냈던 것이었다.

    “호오. 이지가 흐려진 상태에서도 저런 판단을 하다니. 노예가 되기 전에는 꽤나 재능있는 녀석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랜드 마스터급까지 올라갔다는 사실만으로 재능은 어느 정도 증명한 것이겠지. 하지만 네 말처럼 노예가 된 상태에서 버텨낼 줄은 몰랐군. 파루스! 어서 처리해라!”

    아바투르의 마지막 말은 지금껏 빅토르와 싸우던 파루스에게 한 말이었다.

    나름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파루스는 갑작스럽게 빅토르를 타격한 아바투르의 공격에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아바투르의 명을 받들었다.

    쉬익~ 털썩~!

    파루스의 대검은 빅토르의 목을 향했고, 이미 아바투르의 공격을 버티느라 대부분의 힘을 소진해 버린 빅토르는 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파루스의 대검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헉…… 빅토르 님이…….”

    “아…….”

    “안 돼!!”

    빅토르가 나타났을 때 환호했던 뱀파이어들은 그의 죽음에 탄식의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구세주로 알았던 빅토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안 그래도 아바투르 등장 이후에 침체된 뱀파이어 쪽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아버렸다.

    그런 뱀파이어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드레이크의 심경은 매우 복잡한 상태였다.

    ‘어떡하지…… 이제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썼는데……. 할 수 없지. 도박을 해봐야겠군…….’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드레이크는 아바투르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벨리알의 로드 드레이크입니다. 대화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드레이크가 보낸 뜻밖의 텔레파시에 호기심을 느낀 아바투르는 그의 물음에 답을 하였다.

    [이 상황에서 무슨 대화를 하자는 것이지?]

    [일종의 협상을 하자는 것이지요. 지금 전투를 보니 군주의 군세는 우리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자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군주의 몸 역시 이곳의 인간임이 틀림없어 보이니, 이 전투의 목적은 살아 있는 뱀파이어들의 몸을 확보하려는 것 아닙니까?]

    [……파루스 녀석이 너무 노골적으로 일을 벌였군.]

    적당히 싸우면서 살아남은 놈들만을 대상으로 해도 충분할 텐데, 아바투르의 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싶었던 파루스는 최대한 살생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전투를 진행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드레이크 역시 악마들의 목적을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드레이크가 눈치를 챈 듯하자 아바투르는 굳이 드레이크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저도 눈이 있는데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요.]

    [어쨌든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지금이라도 네놈을 처리하고 뱀파이어들을 숙주로 삼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아바투르의 말처럼 이미 그가 전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드레이크가 제시할 수 있는 제안은 없었다. 그 혼자 힘으로 지금의 뱀파이어들을 다 해치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레이크 역시 이 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 드레이크가 하려는 것은 제안이라기보다는 벼랑 끝 전술과도 같은 협박의 일종이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지금 뱀파이어들에게 지시를 내려 결사 항전해서 옥쇄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리고 사로잡히면 악마의 제물이 되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니 항전하다가 밀릴 것 같으면 심맥을 끊어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지시하면, 군주의 목적을 이루시기 힘드실 텐데 말입니다.]

    [……영악한 놈이로군.]

    지금 악마들은 뱀파이어들을 다 해치울 수는 있어도, 죽으려고 마음먹은 뱀파이어들을 다 살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들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사로잡으러 온 것이기에, 드레이크가 그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아바투르는 이렇게 묻고는 있었지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면 드레이크부터 제압하고 다른 뱀파이어들 중 마스터급만이라도 심맥을 끊기 전에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마스터급 뱀파이어들만이라도 확보한다면 그 목적을 상당히 달성했다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악한 드레이크는 아바투르가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하였다.

    [저만 살려주시면 됩니다.]

    [뭐? 허…… 네가 네 입으로 이 집단의 로드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너 혼자 살겠다고?]

    아바투르는 드레이크가 영악하다고 생각했지만, 드레이크는 영악보다는 비열한 쪽에 가까웠다.

    [그렇습니다. 저는 루시페르의 로드 블라디미르의 죽음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지요. 그리고 애초에 저는 이곳의 로드 따위가 아니었지요.]

    이곳의 로드는 조금 전 죽음을 맞이한 빅토르였다. 드레이크는 블러드 코어의 힘으로 그를 구속한 뒤에 로드의 자리를 강탈한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벨리알 소속의 뱀파이어들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벨리알의 뱀파이어들은 드레이크에게는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그리고 버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드레이크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아바투르는 그런 사연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럼 널 살려준다면, 넌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협상이라는 것은 주고받는 것이었다. 아바투르가 드레이크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드레이크 역시 아바투르에게 그에 상응한 것을 주어야 협상은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드레이크의 대답은 아바투르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곳의 뱀파이어들을 산 채로 모두 군주께 바치겠습니다.]

    벨리알의 로드인 드레이크의 명이라면 뱀파이어들을 악마들에게 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제물이 될 거라고 말한다면 휘하의 뱀파이어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지만, 적당한 미사여구로 속인다면 손쉽게 모든 뱀파이어들을 숙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바투르의 생각에 드레이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드레이크의 몸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문제는 있지만, 가까이에서 살펴본 그의 상태는 이상한 기물에 이미 몸이 장악되어 있는 상태라 숙주로서의 활용도는 낮아 보였다.

    애초에 드레이크의 몸을 탐내고 있던 바스라도 그런 드레이크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있는 상태였다.

    [흐음…… 그런데 만약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인 다음, 나중에 널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부족하지만 나름의 안전장치도 있습니다.]

    [안전장치?]

    [지금 마스터급 이상의 뱀파이어들은 제가 가진 블러드 코어가 소멸하면 그 생명력도 함께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블러드 코어는 저의 심장과 일체화가 되어 있어 제가 죽으면 같이 소멸할 것입니다.]

    지금 드레이크의 말은 자신이 죽으면 부하들이 같이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시전한 대법은 아니었으나, 공교롭게도 지금 드레이크의 목숨을 구하는 생명줄이 되어주고 있었다.

    물론 그 대법을 시전 받은 뱀파이어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진혈의 증폭도를 높여주는 대법 정도로만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확실히 널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쪽이 낫겠군. 역시 영악한 녀석이군.]

    [그럼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드레이크가 살아남는 대가로 벨리알의 뱀파이어들은 악마들의 숙주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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